항목 ID | GC041007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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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可近旌閭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갈산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고수연 |
건립 시기/일시 | 1774년 - 명정을 받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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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축|증축 시기/일시 | 1964년 - 김가근의 7세손 김재헌이 정려각 건립 |
현 소재지 | 김가근 정려 -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갈산리 |
성격 | 정려 |
양식 | 이익공 양식|겹처마 팔작지붕 |
정면 칸수 | 1칸 |
측면 칸수 | 1칸 |
[정의]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갈산리에 있는 조선 후기 효자 김가근(金可近)의 정려.
[개설]
김가근[1658~1740]은 안동의 안풍군 김득신[1604~?]의 손자로 1658년(효종 9) 충청북도 괴산의 능촌리에서 태어났다. 김가근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조부를 모셨다. 그러던 중 조부가 병이 들어 지극히 간병하였는데 갑자기 화적들이 집에 들었다. 김가근은 자기 몸으로 화적의 칼을 막아 조부를 지키고 겨우 목숨을 구하였는데, 이에 사람들이 모두 지극한 효자라고 칭송하였다.
김가근은 서산 지역 안동 김씨(安東金氏)의 입향조로, 원래 괴산군 일대에 일가를 이루고 있었으나 말년에 처향으로 낙향하여 은거하였다. 김가근의 처는 해미현 여미리 이동백(李東白)의 딸 전주 이씨(全州李氏)이다. 낙향한 후에는 후학을 양성하였으며,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위치]
서산시 운산면 소재지에서 서산 방향으로 약 1㎞ 정도 가면 갈산리에 이르는데, 김가근 정려(金可近旌閭)는 갈산1리 마을 입구 소로에서 서편으로 난 밭길을 따라 80m 정도 들어가 정문거리라 부르는 곳에 위치한다.
[변천]
김가근의 효행을 기리고 정려를 받으려는 노력은 김가근이 세상을 떠난 직후부터 시작되었다. 『영조실록(英祖實錄)』에 의하면 1744년(영조 20) 9월 22일 장령 윤광천(尹光天)이 참봉 김가근의 행적을 칭송하며 특별히 정려하도록 상소하고 있다. 당시 이 상소에 대해 왕이 해조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지시하였으나,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즉시 정려를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후에도 서산 해미 사림들의 지속적인 노력이 계속되었고, 사후 34년 만인 1774년(영조 50)에 비로소 가선대부로 추증되고 정려를 받았다. 김가근 정려의 현판은 1964년에 7세손 김재헌(金在憲)이 정려각 건립과 함께 개건한 것으로, 정려 건립 시 함께 만들어진 원래 현판의 유무는 확인되지 않는다.
[형태]
방형의 시멘트 기단 위에 세워진 정면 1칸, 측면 1칸 규모의 건물이다. 방주형 초석 위에 8각 돌기둥을 세우고 다시 둥근기둥을 올렸으며, 전면과 양 측면은 홍살을 둘렀다. 후면은 중방 밑까지 벽돌로 채우고 중방 위는 시멘트로 처리하였다. 처마는 겹처마이며 팔작지붕에 이익공(二翼工) 양식의 건물이다.
[현황]
2011년 현재 김가근 정려 내부에는 석재로 만든 명정 현판[가로 114㎝, 세로 37㎝]이 있으며, 현판에는 ‘효손증가선대부이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부총관행 절충장군첨지중추부사김가근지문(孝孫贈嘉善大夫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總府副總管行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金可近之門)’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김가근 정려로부터 북서쪽으로 100m 정도 떨어진 야산 구릉에 김가근의 묘소와 1833년(순조 33)에 세운 구묘비, 최근에 다시 건립한 신묘비가 있다.
[의의와 평가]
명정을 받은 김가근이 서산 해미 지역의 안동 김씨 입향조이며, 사후 정려의 명정에 해미 사림들의 지속적인 노력과 천거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당시 서산 지역에서의 안동 김씨의 활발한 사족 활동과 영향력을 추측해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