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1008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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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雅 |
영어음역 | Jo A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서산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해준 |
유배|이배지 | 서산 - 충청남도 서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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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평양 |
대표 관직 | 사인(舍人) |
[정의]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서산 지역에 평양 조씨가 이거하게 된 계기를 마련한 인물.
[가계]
본관은 평양. 정숙공 조인규(趙仁規)의 현손으로, 아버지는 조호(趙瑚)[?~1410]이다. 조아(趙雅)의 첫째 아들 조효종(趙孝宗)은 예산현감을 역임했으며, 둘째 아들 조숙종(趙叔宗)은 1451년 증광시(增廣試) 내과에서 1위(位)로 합격한 후 공조좌랑으로 임용되었다. 셋째 아들 조계종(趙季宗)은 문과를 거쳐 교리로 재직하던 중 1480년 숙종의 둘째 아들 조요경(趙堯卿), 셋째 아들 조준경(趙俊卿)과 종손 조팽령(趙彭齡)을 인솔하여 서산·태안 지역으로 내려와 자리잡았다.
[활동 사항]
조아는 서산·태안 지역에 거주하는 평양 조씨들이 서산에 정착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한 인물이다. 1409년 서형 조희민(趙希閔)이 연루된 사건에 연좌되어 형제들과 함께 형조도관(刑曹都官)의 노비(奴婢)를 삼는 가화(家禍)를 당하였다. 이어 아버지 조호가 불충(不忠)한 말을 했다고 여승(女僧) 묘음(妙音)이 유숙(柳淑)의 손자 유혜강(柳惠康)에게 밀고하여, 그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1410년 다시 옥에 갇히는 등 당시 평양 조씨 일가가 큰 고초를 겪었다. 1415년에 가재와 노비를 돌려받았으나, 이후 서산에 유배를 온 정확한 시기와 기간 등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구체적인 활동 사항은 알 수 없다.
다만 조아의 형 조수(趙須)는 세종대에 와서 조희민의 일에 연좌되어 귀양간 것이 여러 해가 지났으며, 후학을 가르칠만 하다며 직첩(職牒)을 돌려주고 집현전에서 일을 하도록 서용(恕容)한 것이 1435~1437년 경이므로, 이 시기의 조아가 처한 환경도 유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조아의 둘째 아들 조숙종은 1451년(문종 1) 증광시(增廣試) 병과에 합격한 후 공조좌랑으로 임용되었으며, 조숙종의 첫째 아들 조진경(趙晉卿)도 관직에 올랐다. 그러나 셋째 아들 조계종은 1480년 조숙종의 둘째 아들 조요경, 셋째 아들 조준경, 종손 조팽령을 인솔하고 서산·태안 일대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조계종 후손들은 서산시 부석면 지산리에 집성촌을 이루고 거주하고 있으며, 이들은 교리공파이다. 조팽령 후손들은 태안군 원북면 대기리에, 조요경 후손은 태안군 원북면 반계리에, 조준경 후손은 태안군 이원면 포지리에 집성촌을 이루었으며, 이들은 대사헌공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