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1012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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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天主敎校友村 |
영어의미역 | The Village of Brothers in the Same Faith of Roman Catholicism |
분야 | 종교/기독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서산시 |
집필자 | 김성태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08년 5월 - 충청남도 홍성군 구항면 공리에 서산성당 설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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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17년 10월 - 안학만 신부, 서산시 팔봉면 금학리 공소로 성당 이전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19년 10월 - 폴리(D.Polly)신부, 서산시 음암면 상홍리 공소로 성당 이전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37년 10월 5일 - 바로(P.Barraux)신부, 서산시 동문동으로 이전 |
최초 설립지 | 서산성당 - 충청남도 홍성군 구항면 공리 |
주소 변경 이력 | 서산성당 - 충청남도 서산시 팔봉면 금학리 |
주소 변경 이력 | 서산성당 - 충청남도 서산시 음암면 상홍리 |
주소 변경 이력 | 서산성당 - 충청남도 서산시 동문동 665-3 |
현 소재지 | 서산 동문동 성당 - 충청남도 서산시 동문동 665-3 |
[정의]
조선 후기 충청남도 서산 지역에 형성된 천주교 신자들의 신앙 공동체 마을.
[개설]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계속되자 신자들은 보다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곳을 찾아 나서게 되었다. 이러한 교인들이 모여 신앙 공동체를 이룬 곳이 교우촌이다. 천주교 박해기에 교우촌은 서양인 선교사들의 은거지와 신자들의 피신처 역할을 하였으며, 박해 이후에는 그대로 공소로 발전하였다. 이들 교우촌은 한국식 천주교 문화 형성에 근간이 되었을 뿐 아니라 후에 지역의 성당 설립에 초석이 되었다.
[서산의 교우촌과 공소]
박해기의 교우촌은 주로 산곡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산지로 이주한 신자들은 화전을 일구거나 옹기를 제작하여 연명하는 경우가 많았다. 서산 지역에는 팔봉산과 가야산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산곡의 교우촌은 관가의 눈을 피하기에 용이하였고, 생계를 유지하며 신앙 공동체를 이루는 데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교우촌은 비밀리에 활동하던 선교사들의 거점이기도 하였다. 서양인 신부들은 교우촌끼리 구축된 연락망에 따라 신자들의 보호를 받으며 일대를 순방하였고, 이렇게 신부가 순방하는 교우촌이 곧 공소가 되었다. 공소에는 신부로부터 임명된 공소회장이 있었는데, 회장은 신부를 대신하여 신자들의 기본적인 신앙생활을 돌보는 교우촌의 지도자였다. 교우촌 공소에서는 회장의 집이나 혹은 따로 마련된 곳에서 주일 예배와 교리 교육 등을 수행하였고, 신부가 순방할 경우 미사나 세례식 등이 거행되는 간이 성당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서산 지역 교우촌의 분포]
문서상에 드러나는 서산 지역 주요 교우촌의 분포는 우선 1884년부터 1885년까지 내포 지역의 교우촌을 순방하였던 두세(Doucet, 丁加彌)[1853~1917] 신부의 보고서와 1883년부터 1889년까지의 교세 통계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는 선앙골[서낭골], 황골[현 서산시 팔봉면 대황리], 소길리[현 서산시 팔봉면 금학리], 가재[현 서산시 음암면 상홍리], 대방이[현 서산시 성연면 명천리], 원마루[현 서산시 운산면 수평리], 황소고개[현 서산시 고북면 용암리] 등이 나타나고 있다.
1890년 이후 공소로 발전한 교우촌은 너리실[현 서산시 성연면 명천리], 아나미[현 서산시 성연면 고남리], 미럭벌[현 서산시 운산면 용장리], 강당이[현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일락골[현 서산시 해미면 황락리], 한티[현 서산시 해미면 대곡리] 등이 있으며, 1922년에 추가된 공소로는 벌뜸[현 서산시 해미면 대곡리], 송뜸[현 서산시 해미면 대곡리], 매령리[현 서산시 고북면 음암리], 원골[현 서산시 운산면 수평리], 길마재[현 서산시 음암면 탑곡리], 장두처[현 서산시 음암면 탑곡리]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소길리교우촌은 1917년부터 1919년까지 그리고 가재교우촌은 1919년부터 1937년까지 각각 현 서산 동문동성당의 전신인 서산성당이 자리했던 곳이다.
[의의와 평가]
교우촌은 박해기 천주교 신자들의 피신처이자 삶과 신앙의 터전이었다. 서산 지역은 특히 박해가 가장 극심했던 해미의 진영과 홍주의 진영이 인접했음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많은 교우촌이 형성되었다는 것이 주목된다. 서산 동문동 성당의 전신인 서산성당 소속으로 소길리[금학리] 교우촌과 가재[상홍리] 교우촌이 형성되었고, 해미·운산 등지에도 교우촌의 기반 위에 성당이 세워졌다. 이처럼 교우촌은 박해 시기는 물론 현재에 이르기까지 서산 지역 천주교 문화와 신앙의 발전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