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1016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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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僉知-人形 |
분야 | 생활·민속/민속,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물/유물(일반) |
지역 | 충청남도 서산시 음암면 탑곡리 고양동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강성복 |
[정의]
충청남도 서산시 음암면 탑곡리 고양동에서 전래되는 「서산박첨지놀이」에 등장하는 인형.
[개설]
서산시 음암면 탑곡리 고양동에서 지금까지 전승되고 있는 「서산박첨지놀이」는 2000년 1월 11일 충청남도 무형 문화재 제26호로 지정되었다. 주인공 박첨지를 통해 양반 사회의 모순을 해학적으로 풍자하는 우리나라 유일의 마을 단위 민속 인형극이다. 이 놀이가 서산시 음암면 고양동에 전래된 것은 일제 강점기에 강원도에서 들어온 남사당패의 유영춘이 고양동에 정착한 것이 계기가 되었고, 이후 주연산과 김동익에 의해 고양동의 추석놀이로 정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서산박첨지놀이」에 사용되는 인형 및 인물상은 박첨지, 박동생[박첨지 동생], 큰마누라, 작은마누라, 명노[박첨지 처남], 스님, 불상, 평안감사, 홍동지, 목수 4, 상제로 10여 종이 있다. 주요 재료는 바가지나 나무를 사용하고 있으며, 인형 제작에는 예능 보유자인 김동익을 중심으로 솜씨 있는 회원들이 참여한다.
[형태 및 특징]
「서산박첨지놀이」 인형은 과거에는 고(故) 주연산이 직접 만들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주로 바가지나 수수깡을 이용하여 인형을 만들었기 때문에 특별한 재료가 들어가지 않았다. 나무는 오동나무를 사용하는 게 원칙이지만, 예전에는 수종을 가리지 않았다. 공연을 하고 나면 이를 보관할 회관이 없어서 상엿집 궤짝에 인형과 소품들을 담아서 모두 불태우는 게 관례였다.
놀이에 등장하는 상여도 만들어서 태웠는데, 상여는 수수깡으로 간단하게 만들었고, 상제 인형에는 집에서 아이들이나 여자들이 입던 낡은 옷감을 꿰매서 입혔다. 지금처럼 반영구적인 인형이 제작된 것은 문화재로 지정되기 이전이다. 인형극이 입소문을 타고 여기저기 공연을 다니면서 인형도 정성 들여 제대로 만들기 시작하였다. 현재 인형과 소품은 김동익이 총 지휘를 하고 목수 일은 이남식이 맡는다.
전수회관에 보관된 「서산박첨지놀이」 인형의 형태와 특징은 다음과 같다. 주요 인물인 박첨지와 박동생, 큰마누라, 작은마누라, 명노, 스님은 탈과 유사하게 가면을 쓰고 옷을 입혔다. 먼저 박첨지는 짙은 밤색 얼굴에 수염이 덥수룩한 것이 인자한 양반의 모습을 띠고 있으며 옷은 소복을 입었다. 박동생은 소복을 걸친 것은 동일하되 박첨지에 비해 턱수염이 훨씬 적고 인상은 고약한 표정이다.
큰마누라는 온통 곰보로 뒤덮인 얼굴에 주홍색 옷을 입었으며, 작은마누라는 각시탈처럼 이마와 양쪽 볼에 연지곤지를 찍고 연분홍색 옷을 걸쳤다. 그런가 하면 박첨지의 처남 명노는 큰마누라와 혈연지간임을 나타내려는 듯 얼굴은 곰보이고, 스님은 머리에 고깔을 쓰고 남색 가사를 걸쳤다. 또한 허리춤에 붉은 방망이를 찬 홍동지는 얼굴과 몸이 온통 붉은색 물감으로 채색되었고, 목마를 탄 평안감사는 말을 타고 도임하는 관찰사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이 밖에 상제는 굴건제복을 입었고, 상여와 상여꾼들, 그리고 만장행렬은 상여가 나가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의의와 평가]
「서산박첨지놀이」는 서울 중심의 국가 무형 문화재로 지정된 유랑 예인 집단과는 달리 유랑인의 전통을 잇되 마을 공동체의 문화로 자리 잡은 독특한 성격을 지니면서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다. 「서산박첨지놀이」가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마을 단위의 민속으로 전승되어 오늘날까지 단절되지 않고 이어지고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의이다. 따라서 「서산박첨지놀이」에 등장하는 인형들 역시 그 제작 주체가 과거 유랑 예인에서 고양동 주민들에 의한 마을 공동체로 뿌리를 내렸다는 점에서 문화사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