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9000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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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京畿邑誌仁川府邑誌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유물/서화류 |
지역 | 경기도 시흥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손승호 |
[정의]
1871년에 편찬된 『경기읍지』에서 현재 경기도 시흥시의 지리적 사항을 기술한 읍지.
[개설]
『경기읍지(京畿邑誌)』는 당시 경기도에 있던 35개 군현의 읍지를 기록한 경기도 도지(道誌)이다. 고종 대에 수집 가능한 지방 자료를 집대성하여 전국의 도지를 편찬하였는데, 이 읍지는 고종 대 첫 번째로 편찬된 경기도 도지이다.
[형태 및 구성]
경기 각 군현의 읍지를 6개의 책으로 합해서 제작한 필사본으로, 지방 세력의 입장에서 각 지방의 인물과 문화를 드러내기 위해 작성하였다. 읍지의 크기는 가로 30.0㎝, 세로 20.2㎝이다. 제1책은 71장, 제2책은 106장, 제3책은 86장, 제4책은 66장, 제5책은 118장, 제6책은 11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읍지에 포함된 지도는 채색이 되었으며, 37장 53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읍지의 형식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으로 대표되는 전통적인 지리지나 읍지 형식을 따랐다. 지금의 시흥시가 포함되는 인천부에 관한 내용은 제6책에 '동치십년시월 일 인천부 읍지(同治十年十月日仁川府邑誌)'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는데, 10월은 명확하게 기록되었지만 날짜는 기록되지 않고 여백으로 남아 있다.
[특징]
목차는 건치 연혁(建置沿革)‚ 관원(官員)‚ 군명(郡名)‚ 성씨(姓氏)‚ 풍속(風俗)‚ 산천(山川)‚ 방리(坊里)‚ 토산(土産)‚ 성지(城池)‚ 봉수(烽燧)‚ 관방(關防)‚ 제언(堤堰)‚ 교원(校院)‚ 역원(驛院)‚ 사묘(祠廟)‚ 총묘(塚墓)‚ 고적(古蹟)‚ 공해(公廨)‚ 창고(倉庫)‚ 호구(戶口)‚ 전부(田賦)‚ 봉름(俸廩)‚ 관속(官屬)‚ 인물(人物)‚ 명환(名宦)의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경기지(京畿誌)』에 신설된 바 있던 제영조(題詠條)는 『경기읍지』에서 제외되었다. 당시 경기도에 있던 다른 군현과 달리 인천도호부의 읍지는 시작 부분에 『여지승람(輿地勝覽)』을 계승하였음을 명시적으로 밝혀 놓았다.
지금의 시흥시에 해당하는 신고개면·황등천면·전반면에 속하는 각 리의 명칭을 비롯하여 소래산이 기록되어 있다. 현재 시흥시의 진산(鎭山)이라 할 수 있는 소래산이 인천의 진산으로 기록되어 있는 점이 특이하다. 제언조에는 당시 신고개면에 있던 장둔(獐屯), 황등천면에 있던 송우송(松又松)과 며아내(旀兒乃), 전반면에 있던 소교(召橋)와 무지내(無池乃) 등이 기록되어 있다. 전반면에 있는 제언은 1795년에 은언군(恩彦君)에게 처음 내려주어 농사짓게 하였다는 기록도 포함되어 있다.
지금의 시흥시에 해당하는 지역에는 청평군(淸平君) 한언(韓堰)의 무덤, 청천군(淸川君) 한준(韓準)의 무덤, 판서(判書) 한여직(韓汝溭)의 무덤, 교천군(蛟川君) 이극정(李克正)의 무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구종직(丘從直)의 무덤, 영의정(領議政) 권대운(權大運)의 무덤,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의 무덤, 판서 서정수(徐鼎修)의 무덤 등이 있던 것으로 기록되었으며, 소래산 아래에는 하우명(河友明)의 표비(表碑)가 있다는 기록도 포함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이 읍지는 18세기의 전통을 재결집하여 국가의 지방 통치에 활용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고종 대에 첫 번째로 편찬된 경기도 도지로 평가되며, 19세기 고종 초반의 정국 운영 상황을 잘 보여준다. 1841년에 편찬되었던 『경기지』의 내용을 보완하여 그 이후의 변화상을 잘 반영해 준다. 조선 후기 시흥시의 지리적 상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해 주지만, 시흥시에 관한 내용이 많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