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9004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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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浪公定鎬頌德碑 |
영어공식명칭 | Nanggong Jeongho Memorial Monument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비 |
지역 | 경기도 시흥시 능곡동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방문식 |
현 소재지 | 경기도 시흥시 능골길 26[능곡동 6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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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소재지 | 경기도 시흥군 능곡 삼거리마을 |
성격 | 송덕비 |
관련 인물 | 낭정호 |
[정의]
경기도 시흥시 능곡동에 있는 낭정호의 공덕을 칭송하는 문자를 새긴 비.
[개설]
낭공정호 송덕비(浪公定鎬頌德碑)는 낭정호(浪定鎬)의 덕을 기려 일제강점기에 소작인들이 세운 비이다. 1930년대 낭정호는 경기도 경성부(京城府)[지금의 서울특별시]에 살면서 시흥군에 토지를 가지고 소작을 부리던 부재지주(不在地主)였다. 그러나 소작인들의 곤궁함을 알고 당시로는 드물게 금전적인 부조를 해주어 칭송을 받았고, 이에 소작인들이 돈을 모아 송덕비를 설립하였다.
본래 송덕비를 세우는 조건은 과거부터 까다로웠다. 조선시대 송덕비는 백성들이 관직자의 은덕을 생각해 비를 세우고자 할 때, 주사(州司)가 중앙에 올리면 왕의 칙령으로 허가를 받아 건립하는 것이 항례(恒例)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백성을 위협하거나 자신의 재물을 이용해 억지로 송덕비를 세우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건립 경위]
송덕비의 건립 배경을 알 수 있는 기록이 1932년 12월 8일 『매일신보』에 실려 있다. 기사에 따르면 낭정호는 경성부 다옥정(茶屋町) 74번지[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다동]에 거주하였다. 낭정호는 시흥군 수암면 능곡리에 땅을 가진 토지의 지주로, 소작인들에게 춘궁기 때마다 씨앗을 무료로 배부하고 소작료 운반비를 대신 부담해 주었다. 이에 소작인들이 낭정호를 항상 칭송해 오던 중 시흥군 군자면 장현리 권희(權憘) 외 37명의 소작인들이 돈을 모아 송덕비를 건립하였다.
[위치]
낭공정호 송덕비는 시흥시 능골길 26 영모재공원 내에 있다. 본래 위치는 능곡 택지 개발이 되기 전 자연 마을인 삼거리마을이었다. 주변 개발과 무관심 속에서 훼손될 위기에 있던 비석을 김규성 등 뜻있는 마을 주민들의 보호로 현재 위치인 공원 내 '문명석·조덕준 자선기념비' 옆에 있게 되었다.
[관련 인물]
송덕비의 주인공인 낭정호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까지 활동한 인물로 보인다. 비록 그의 출생과 사망, 전말을 알 수는 없지만 당시 신문을 통해 그의 행적을 대강 짐작할 수는 있다. 1908년 5월 7일자 『황성신문』에 따르면 그는 황해도 해주에 있던 근대식 사립 교육기관인 해동학교를 나왔고, 근대 문물을 빨리 받아들여 경제적으로 성공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낭정호는 『조선은행회사요록(朝鮮銀行會社要錄)』 1925년판에 지금의 서울특별시에 있던 합자회사 유풍상회(裕豊商會)의 사장이라고 소개되었고, 1932년 12월 8일 『매일신보』에 시흥군 수암면 능곡리 일대 토지의 지주라고 소개되었기 때문이다.
송덕비에 기록된 내용처럼 주변에 베푸는 사람이었음은 그가 벌인 자선사업으로 확인할 수 있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대한매일신보』와 『동아일보』에는 낭정호가 샌프란시스코 재난 동포 구휼금, 국채 보상 의연금, 수재 의연금 등 다양한 기부 활동을 벌였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형태]
비를 만드는 과거의 전통인 이수(螭首)[머리]와 귀부(龜趺)[받침돌]를 비롯하여 비신(碑身)까지 단순화되어 전체적인 인상은 소략하다.
[금석문]
유아낭공춘경추렴(唯我浪公春耕秋斂) 오직 우리 낭공만이 봄에 밭 갈고 가을에 거두시네
금세활불보급주휼(今世活佛補給周恤) 현세에 살아 있는 부처님같이 도와주시고 두루 구휼해 주시네
소작세민만구공송(小作細民萬口共頌) 소작하는 영세민들이 입을 모아 칭송하네
영보구명재차명비(永保軀命載此銘碑) 영원히 몸과 목숨을 보전하시기를 바라며 이 비문에 싣노라
소화7년12월일(昭和七年十二月日) 소화7년[1932년] 12월
[의의와 평가]
과거 조선시대 송덕비는 엄격한 규정 속에서 왕의 칙령으로 허가를 받아야 세울 수 있었다. 조선 후기에는 가문과 스스로를 높이기 위해 주변에 강요하는 악영향을 보였다. 그러나 낭정호가 걸은 삶의 궤적을 살펴볼 때 낭정호는 과거 엄선된 기준에서도 송덕비가 세워질 수 있는 위인으로 평가할 수 있다. 또한 송덕비의 본래 목적이 교훈과 교화라고 할 때 낭정호 송덕비는 설립 취지에 부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