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9005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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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文化柳氏 |
영어공식명칭 | Munwha Hwa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경기도 시흥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심우일 |
[정의]
류차달을 시조로 하고, 황해도 신천군 문화면을 본향으로 하는 경기도 시흥 지역의 세거 성씨.
[연원]
시조(始祖) 류차달(柳車達)의 7세인 문간공(文簡公) 류공권(柳公權)의 두 아들인 류언침(柳彦琛)과 류택(柳澤)으로부터 크게 두 계파가 생겨서 현재 문화 류씨(文化柳氏)의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다. 그 후 고려와 조선 시대에 걸쳐 많은 인물이 증시(贈諡)에서 시호를 내려받고, 대과(大科)에 134인이 급제하는 등 걸출한 인물들을 배출하여 명문 가문이 되었다.
[입향 경위]
18세인 류수천(柳壽千)과 19세인 류잠(柳潛)[1509~1576]에 이르러 시흥 지역에 뿌리를 내렸다. 강희맹(姜希孟)의 사위가 김성동(金誠童)이요, 김성동의 사위가 류수천이다. 또한 류수천의 아들 류잠은 하동 정씨(河東鄭氏) 정승렴(鄭承廉)의 딸과 혼인을 하였다. 진주 강씨(晉州姜氏), 안동 김씨(安東金氏), 하동 정씨가 이미 시흥 지역에서 경화사족(京華士族)으로 큰 세력을 갖고 있는 상태에서 혼인 관계를 통해 문화 류씨가 시흥에 기반을 잡은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20세인 류자신(柳自新)[1541~1612]이 조선의 제15대 왕 광해군의 장인이 됨으로써 집안이 크게 흥성하고, 21세인 류희분(柳希奮)을 위시로 하여 대북(大北) 세력의 중심 가문이 되었다. 하지만 1623년 서인(西人)들의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가문이 수난을 당하였다.
[현황]
통계청의 2000년 인구 총조사 자료에 의하면 시흥시에 거주하는 문화 류씨는 513가구 1,769명이다.
[관련 유적]
'류자신 선생 묘 및 신도비'는 시흥시 향토유적 제4호으로 지정되었으며 경기도 시흥시 능곡동 산32에 있다. 묘역 앞에 자리한 영모재(永慕齋)는 1882년(고종 19)에 건립된 것으로 시흥시 관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