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901136 |
---|---|
한자 | 廣石洞-都堂-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의례/제 |
지역 | 경기도 시흥시 광석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덕묵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일제강점기 - 굿을 하던 사람들이 파출소에 연행된 뒤부터는 유교식 제의로 축소 |
---|---|
의례 장소 | 당재 - 둔대곡 북서쪽에 있는 야트막한 산 |
성격 | 민간 신앙|마을 제사 |
의례 시기/일시 | 10월 초순경 |
[정의]
경기도 시흥시 광석동 둔대곡에서 동네 사람들이 도당에 모여 그 마을의 수호신에게 복을 비는 굿.
[개설]
일제강점기까지 시흥시 광석동 둔대곡에서는 도당굿(都堂-)을 지내다가 그 후 고사식으로 바뀌었다. 굿을 할 당시에는 하중동에 살던 큰 만신(萬神)[무녀]을 당골로 삼아 제의(祭儀)를 주관하게 하였다. 당시 동원된 무당 일행은 10여 명이 되었으며 당 앞에는 벼 한 섬을 묶어다 놓았다. 제일(祭日)은 햇곡식이 난 후인 10월 초순경에 마을 노인들이 회의를 하여 보름 안에 하상동 요골에 살던 한학자에게 물어서 택일을 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당고사 날이 되면 마을은 잔칫날로서 동네의 모든 주민이 일을 파하는 날이었다. 특히 이 지역은 금기를 엄격히 지키고 있었는데, 2005년에는 당주를 맡은 통장 집에 사는 다른 가구의 노인이 위독한 상태가 되자 제일을 연기하기도 하였다. 제관은 '당주'라고 하여 마을 회의에서 부정 없고 깨끗한 사람으로 선출하였는데, 근래에는 통장이 맡아 하고 있다. 예전에는 당주 집 대문에 솔가지를 표시하고 황토를 펴 놓기도 하였다. 제의를 위해 당주인 통장은 제의 전에 목욕재계(沐浴齋戒)를 하고 일 년간 길러 온 수염까지 자르고 제의를 주관하였다.
[연원 및 변천]
오래전부터 행해져 왔으나 언제부터 있어 왔는지 정확한 연원은 알 수가 없다. 예전에는 2년에 한 번 당굿의 형태로 지내기도 하였다. 당굿을 할 때는 사흘씩 삼현육각(三絃六角)[악기 편성의 명칭. 향피리 2, 대금·해금·장구·북 등 6인조가 원칙이나 경우에 따라서 악기의 종류나 편성 인원에 조금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을 반주로 하고 광대가 놀았던 제법 규모가 있는 제의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굿을 하던 관련자가 파출소에 연행되어 머리를 깎이고 피리와 꽹가리를 치며 ‘조리돌림[형벌의 일종]’을 당한 뒤부터는 유교식 제의로 축소되었다. 유교식 제의를 지낸 후에도 한동안 무당을 불러 비손[두 손을 비비면서 신에게 병이 낫거나 소원을 이루게 해 달라고 비는 일]을 하게 하였으나 몇 년 후 사라졌다.
1970년대 후반에는 마을의 30대 장년층이 연이어 사망하는 일이 있어서 여름에 고사를 한 번 더 치르기도 하였다. 6.25전쟁 이전에는 마을 제의 전날 대동 우물에 우물 고사를 지내고 대동 우물 앞, 마을 입구, 마을 앞뒤 고갯길가 등 마을 사방에 각각 두 개씩의 장승을 세웠다.
[신당/신체의 형태]
마을의 북서쪽에 있는 '당재'라고 하는 낮은 산에 제당(祭堂)을 모신 도당할아버지와 할머니 내외를 마을신으로 모신다. 원래 당 주변에 있던 향나무, 은행나무 등의 고목도 신목(神木)으로 여겼는데 오래전에 말라 죽었다. 그러나 당 주변의 말라 죽은 나무들은 누구도 손을 대지 못할 정도로 금기시된다.
제당은 원래 짚으로 만든 짚주저리[볏짚으로 우산처럼 만들어서 터주나 업의항[항아리] 따위를 덮는 물건] 형태였으나 1970년대 후반 문 없이 반 칸 넓이로 시멘트 블록으로 쌓고 기와를 얹어 현재의 제당을 만들었다. 또한 제당 옆에 문이 없는 정사면체의 조립 패널 안에는 동자상을 모셔 놓았다. 이 동자상은 2004년에 갑작스런 동네의 우환을 막기 위한 방편으로 마련하였다. 당시 장현동과 월곶동을 잇는 장월선 도로 공사 후 마을의 장년과 노인 몇 사람이 뇌출혈로 대수술을 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때 한 스님이 말하기를 범배산의 샘줄이 마을로 이어지는 핏줄인데 도로 공사가 이것을 끊어 놓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주민들은 그 후 스님의 말에 따라 당 옆에 동자상을 모시게 되었다. 당시 주민들은 도로 공사 현장 사무실에 찾아가서 동네에 굿을 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현장 사무실은 100만 원을 기탁하였다.
[절차]
제물을 나르기 전에 마을 청년회에서 제장(祭場)에 올라가 동자상 안에 등촉(燈燭)을 밝히고 동자상에 대한 유일한 제수(祭需)인 녹차를 올렸으며 어두운 제당에 등을 설치하였다. 저녁 7시에 마을의 남자 어른들이 각 제수를 나눠 들고 제장으로 향하였다. 이날 노인들은 제의에 참석하지 않았고 마을 청년회의 40~50대 10여 명이 주축이 되어 제의를 진행하였다. 먼저 통장이 잔을 올리고 재배(再拜)한 후 작성한 축문을 읽은 뒤 모두 재배하였다. 도당 주변에 술을 뿌리고 참석한 주민 중 원하는 사람들은 잔을 올리고 기원하였다. 마지막으로 대동소지(大洞燒紙)[마을 전체를 대상으로 한 소지]를 올린 후 참여한 주민 모두가 각자 소지를 올렸다. 예전의 축문은 전하지 않고 1990년부터 한글 축문을 매년 같은 형식으로 작성해 오고 있다.
[축문]
2005년에 올린 한글 축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올해도 음력 동짓달 길일을 택하여
우리 마을의 수호신이신 도당할아버지 도당할머니께
마을 주민들 모두의 정성을 몰아서 당치성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 옛날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우리 둔대곡마을에서는
도당할아버지 도당할머니께 정성을 드려왔습니다.
앞으로도 항상 정성껏 치성을 올리겠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우리 마을을 항상 지켜 주시고
가정마다 항상 안녕과 복을 주셨습니다.
앞으로도 먼 훗날 언제까지라도 둔대곡마을 보살펴 주실 것을 간곡히 기원합니다.
도당할아버지 도당할머니께서 오늘 우리 마을 정성이 부족함이 있어도
너그럽게 이해하여 주시고 소례를 대례로 받어 주시길 비옵니다.
이상으로 마을 주민을 대표해서 ○○○ 통장이 고해 올렸습니다.
[현황]
2005년 당고사는 당일 오전 9시에 통장이 방송을 통하여 고사를 지내는 날임을 알리고, 노인들을 소집하여 제당 입구부터 당 주변 청소를 시작하였다. 제당 청소 후 집집마다 쌀을 추렴하였으며 부정이 있는 집에서는 다른 집에서 꾸어서 내게 하였다. 떡은 팥시루떡으로 도당할아버지 내외와 산신에 한 시루씩 바치는데 찹쌀 10㎏과 멥쌀 6㎏으로 두 말 정도이며 장곡동에 있는 방앗간에서 맞추었다. 떡은 추렴에 참여하지 않아도 마을 주민 모두에게 봉송(封送)하였다. 제수에 사용할 돼지 한 마리는 미리 도살해 온 것을 통장이 직접 분육(分肉)해 주민에게 파는데, 제비(祭費)에 들어간 소요 비용과 견주어 마을의 호수로 나누어 가격을 정하였다. 뼈와 내장 등은 고사 후 마을 잔치의 안주로 사용하고 돼지머리는 제수로 사용하였다. 그 외 제물은 당일 오후에 구입하였다. 과일은 사과, 배, 감, 대추, 밤 등이며 조과(造菓)는 산자(饊子), 약과(藥果), 옥춘(玉瑃), 젤리 등이었다. 통북어 두 마리와 막걸리도 필요하였다. 소지 종이는 인근 만신집에서 구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