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05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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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獨立運動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임숙정 |
[정의]
일제 강점기 전라북도 순창군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벌인 운동.
[개설]
1910년 8월 22일 「한국 병합에 관한 조약」이 강제로 체결되면서 대한 제국은 멸망하고 일제 강점기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때 순창 지역에서는 독립을 찾기 위한 다양한 활동이 일어났는데 이를 독립운동이라 한다.
[국권 회복 운동]
먼저 자결 순국한 이들을 살펴볼 수 있다. 매천(梅泉) 황현(黃玹),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등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항일 의지를 표명했는데, 순창 출신 인물로는 공치봉(孔致鳳)을 들 수 있다. 전라북도 순창군 금과면 방성리에서 태어나 의병 활동을 했던 공치봉은 경술국치(庚戌國恥)에 비분강개하여 단식 자결하였다.
이후 독립운동은 시기별로 모습을 달리한다. 1910년 일본에 의해 국권이 강탈된 후 의병들은 더 이상 국내에서 활동이 불가능해졌다고 판단하여, 만주와 연해주로 이동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의병 계열이 모두 국내를 떠났던 것은 아니다. 의병장 돈헌(遯軒) 임병찬(林秉瓚)은 1912년 대한 독립 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라 하여 비밀 결사대를 조직하였다. 독립 의군부는 왕정복고를 목표로 했던 복벽주의(復辟主義) 유림들의 독립 단체로 의병 출신들을 모집하여 투서 운동과 태극기 게양 운동을 통해 국권 회복을 모색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군자금 모집 사건이 발각되면서 와해되고 말았다.
순창 출신 독립 의군부 단원으로는 김상기(金相璣)가 있다. 김상기는 1855년 1월 7일 태어나 복흥면 하리 199번지에 살다가 1913년 2월 독립 의군부에 참여하였다. 독립 의군부 자체가 의병 출신자만 가입이 가능했기에 그 역시 백낙귀(白樂龜) 의병 부대에서 활약했다. 1926년 5월 26일 사망했으며 1990년 애족장을 받았다.
[3·1 운동]
1910년 독립운동을 대표하는 활동은 3·1 운동이다. 순창에서의 3·1 운동은 박동진(朴東鎭)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박동진은 1919년 3월 15일 밤 자택에서 「조선 독립단 만세」, 「조선 독립단 독립 만세」 등의 문서 3통을 작성하고, 3월 17일 오후 1시경 순창군청, 순창 헌병 분견소 및 순창 학교 앞 게시판에 붙여 전국에서 민중 봉기가 일어났음을 알렸다. 3월 20일 밤에는 천도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순창군민 200여 명이 순창읍 뒷산에 모여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때 노병화(盧炳華) 등 10여 명의 천도교인들은 일본 측의 고문에도 굽히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4월 11일 장날 아침에는 또 “독립 만만세! 오늘 11일 독립 만세를 부를 것이니 모두 모이라 만약 헌병이 출동할 때에는 모두 죽여라!”는 내용의 격문이 붙었기에 일본은 증파되어 오는 보병대 일부를 순창읍에 배치하였다. 박동진은 만세 운동이 사전에 발각되어 징역 1년 형에 처해졌다.
3·1 운동 결과 우리에게는 임시 정부가 성립되었다. 임시 정부는 국내와 계속 연락을 취하며 독립운동을 펼쳐나갔는데 이 연락원 중에 순창 출신 조완석(曺完錫)이 있었다. 조완석은 1895년 7월 3일 생으로 순창 남계리에 거주했다. 1923년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결심하고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 요인들과 만나 활동하다가 신의주에서 체포되어 징역 10월 형을 받았고 미결 기간을 합산해 1년 5개월 형을 받았다.
[의열 투쟁과 비밀 조직 활동]
1920년대 독립운동은 의열 투쟁의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임시 정부는 칠가살론(七可殺論)이라 하여 죽여도 되는 일곱 부류[적괴, 매국적, 창귀, 친일 부호, 반성 없는 관공리, 불량배, 모반자]를 설정했으며 의열단(義烈團)과 같은 단체들이 생성되었다. 순창 출신의 법조인 김병로(金炳魯)는 김상옥(金相玉) 의사 사건, 2차 의열단 사건 등을 변호하였다. 1930~1940년대 들어 일본은 전 세계와 전쟁을 하게 되었고 이를 위해 조선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병참 기지로서의 역할을 강요받았다. 이에 대해 순창에서는 비밀 조직을 만들어 독립운동을 수행해 나갔다.
순창의 대표적인 비밀 조직으로는 화령회(和寧會)가 있다. 화령회는 1942년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던 박래은(朴来殷)이 체포되자 이에 분노한 순창 농림 학교 학생들이 만든 항일 단체로, 대표는 3학년 재학 중인 이희동(李熙東)이었다. 민족정신 고취, 독립에 관한 토론, 항일, 독립투사들과의 긴밀한 연락, 민족의 독립 쟁취를 위한 활동 등을 펼쳤다. 회원으로는 민병호(閔丙浩)·홍석길(洪錫吉)·양태철(梁態喆)·이병기(李秉起)·진강욱(晉岡旭)·노필식(盧必熄)·서선표(徐先杓)·서규선(徐圭善)·홍상근(洪相根)·신영식(申永植)·신병식(申丙植)·정영조(鄭永祚)·김용철(金容哲) 등이 있었다.
순창 출신인 임봉호(林鳳鎬)·박도병(朴道秉)·정주영(鄭周泳)이 수원 고등 농림 학교 재학 시절인 1939년 4월에 민족 문화 보존을 목적으로 한글 연구회를 만들었다. 1941년 9월 대다수 회원들이 잡히면서 와해되었다. 이 외에도 홍영기(洪英基)가 1940년 11월에 일본에서 설립한 단체인 ‘우리들’이 있다. 일본 도쿄[東京]에서 김창옥(金昌沃)·강수원(姜壽元)·박석우(朴錫祐) 등과 함께 동아 연맹 한국 학생 좌담회에서 민족 문제 등을 논의하다가 연맹이 민족의 자주성을 말살하고 있다고 깨닫고 결성한 비밀 단체다. 홍영기는 민족을 통치할 수 있는 지도 원리를 계발하기 위하여 철학을 공부하다 잡혀 2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 외에도 순창 출신의 개별 항일 활동으로 김상권(金相權)이 1943년 9월 3일 사관학교 응시 시험을 볼 때 일본의 패망은 필연적이라는 사실을 기술한 일이 있었다. 정진호(鄭鎭浩)는 1944년 전주 공립 농업 학교 재학 중 창씨개명과 식민지 교육 정책에 반대하여 혈서 동맹을 하기도 하였다. 또한 광복군으로 작전을 수행하던 중 전사한 조동현(趙東鉉)도 있었다. 이러한 치열한 독립운동의 결과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