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07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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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張判介生家-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터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금과면 내동리 연화 마을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황미연 |
소재지 | 장판개 생가 터 - 전라북도 순창군 금과면 내동리 연화 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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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생가 터 |
[정의]
전라북도 순창군 금과면 내동리 연화 마을에 있는 판소리 명창 장판개의 생가 터.
[발굴 조사 경위 결과]
현재까지 발굴 조사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현황]
1. 안내판조차 없는 생가
근대의 대명창 장판개(張判介)[1885~1937]의 소리 고향이자 판소리 교육 공간이었던 전라북도 순창군 금과면 연화리 삿갓데 마을[현 내동리 연화 마을]의 일대는 과거의 명성은 찾을 수 없이 훼손되고 흔적조차 사라지고 있다. 장판개의 생가이자 판소리 교육 기관으로 알려진 이곳에서 장판개의 본 모습을 찾을 수 있는 길은 요원한 실정이다. 현장 답사에서 내린 결론과 현지 원로들의 의견을 종합해 보면 장판개의 자취가 있었던 공간들은 이제 마을 회관 위쪽에 새로 건립된 양옥 가옥으로, 그 밑에 위치한 교육 기관은 마을 회관으로 변해 있다.
전라북도가 문화재청의 후원을 받아 장판개의 생가 터를 알리는 안내판을 마을 입구에 세웠지만 그마저 얼마 전 여름 태풍으로 인해 흔적을 찾을 수 없으며, 그 자리에는 잡초만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등 방치되고 있다. 장판개의 생가는 이제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이 변모해 가고 있고 시간이 흐르면 장판개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자취마저 찾을 수 없을 것이라는 현재 주민들의 설명이다.
장판개가 태어나 소리의 길에 입문하였고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살았던 집은 문화재가 아니라는 이유로 훼손되고 방치되고 있으며 후손들마저 떠난 지 오래되었다. 더욱이 이곳은 부인 김옥란과 함께 장판개가 당골판 여러 개를 가지고 있으면서 전통 문화를 전파하였던 곳으로 역사적 의미도 있는데 간과되고 있다.
2. 생가에 대한 철저한 고증 필요
현재 생가를 놓고 전라남도 곡성군 겸면 현정리라는 설과 전라북도 순창군 금과면 내동리 연화 마을이라는 설이 양분되면서 그에 대한 추모 사업도 오히려 전라남도에서 활발하다는 것이 학계의 설명이다. 『판소리 이백 년사』는 물론 『한겨레 음악 사전』과 한국 역대 인물 종합 정보 시스템 등에도 장판개가 전라남도 곡성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더욱이 전라남도 곡성군은 장판개를 추모하는 대대적인 사업도 전개하고 있어 순창군의 확고한 의지를 바탕으로 한 추모 사업이 절실하다.
연화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김미수[80세]는 “연화 마을은 분명하게 장판개가 태어난 곳이 맞다. 이웃 곡성이 장판개의 고향이라고 주장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어른들로부터 이곳에서 태어나 창 활동을 한 것을 듣고 자랐다.”며 “이러한 주장 때문인지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전국의 판소리 전공자와 대학생들이 답사를 오고 있다.”고 말하였다. 또 김미수는 “장 명창은 집안 내력이 세습 무가인 관계로 어린 시절부터 장 명창의 소리는 순창을 넘어 곡성·구례·남원 등에서도 유명하였다.”며 “장 명창에 대한 제대로 된 추모 사업이 이제라도 시작되었으면 좋겠다.”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연화 마을 주민 최상기[85세]는 “장판개는 매우 화려한 옷차림에 미남에다 풍부한 성음으로 일세를 풍미하던 대명창이었지만 말년에는 아편 중독으로 심한 고통을 겪다 천수를 다하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며 “마을 뒷산인 아미산 자락에 장판개 부부의 묘소가 합장으로 있다.”고 증언하였다.
순창 군민들은 장판개를 추모하기 위해 2010년 7월 29일 전라북도 순창군 금과면 금과 들소리 전수관 앞마당에 ‘금과 학순 장판개 명창 추모비’를 건립해 장판개의 생애와 예술 업적을 기리고 있다. 장판개의 기일에 맞춰 제사도 지내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현재 금과 들소리 보존회가 장판개 명창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정례적인 사업을 펼치고 있는 셈이다.
[의의와 평가]
장판개는 한 시대를 뛰어넘는 판소리로 예술적인 완성도와 대중적인 지지도, 그리고 가계를 통해 소리를 전수시키고 완성시킨 인물이다. 그러나 장판개의 업적과 발자취를 장판개 생가 터에서 찾기란 이제 어렵게 되었다.
장판개의 생가와 추모비의 안내를 맡은 구태서 전 순창 국악원장은 “땅 속에 묻힌 수백 년 된 뼈도 다시 맞추어 좋은 곳에 묻고 오래된 쇠뭉치도 찾아 문화재로 보호하고 있는 이 때, 우리의 얼과 뿌리를 잘 전달하여 잊히지 않도록 해야 한다.”며 “장판개의 생가 복원과 주변의 판소리 성지화 작업이 시급하다.”고 말하였다.
2007년 문화재청과 한국 관광 공사는 업무 협의를 갖고 장판개의 생가와 묘소를 복원해 관광 자원화하는 방안을 논의한 바 있지만 이마저 유명무실한 상태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장판개의 잊혀져 가는 흔적을 작게나마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연화 마을에는 장판개 생가 터가 남아 있으며, 연화 마을 뒷산인 아미산에는 장판개 부부의 묘소가 합장되어 있고, 금과 들소리 전수관 앞마당에는 장판개를 기리는 추모비와 제단이 조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판개의 무형 자산과 유형 자산이 존재하는 만큼 차후에는 장판개를 재조명하는 대대적인 복원 사업이 연화 마을에서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어전 명창 장판개의 소리제를 10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계승하고 복원 정리하여 발전시키고 있는 상황에서 그에 대한 본래의 모습 찾기가 시급하다. 또한 장판개의 각종 유물을 집대성해 장판개의 생가를 중심으로 전시하는 방안도 모색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