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17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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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處女總角-寃魂-塔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순창읍 남계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박정미 |
수록|간행 시기/일시 | 2002년 12월 - 「처녀 총각의 원혼을 풀어준 가마탑」 『순창의 구전 설화』상에 수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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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지명 | 남계리 가마탑 - 전라북도 순창군 순창읍 남계리 239-3 |
성격 | 열녀담|해원담|가마탑 유래담 |
주요 등장 인물 | 염씨 총각|조씨 처녀 |
모티프 유형 | 남편을 따라 죽은 열녀|가마탑 조성 |
[정의]
전라북도 순창군 순창읍 남계리에서 가마탑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처녀 총각의 원혼을 풀어준 가마탑」은 혼인을 약속하였지만 어쩔 수 없이 혼인을 할 수 없는 상황에 닥치자, 이것이 한이 되어 총각이 죽고 처녀도 자결을 하여 총각의 뒤를 이었다는 조씨 처녀의 열녀담이다. 또한 사랑을 이루기 위해 죽음까지도 불사하여 하늘과 땅에 서린 이들의 원혼은 풀어 주고자 가마탑을 세우게 되었다는 해원담(解寃談)이자 가마탑 유래담이다.
[채록/수집 상황]
2002년 12월 양상화가 엮어 순창 문화원에서 간행한 『순창의 구전 설화』상의 37~38쪽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순창군 좌부방 대동창에는 순창을 본관으로 하는 염씨가 오랫동안 양반으로 살고 있었다. 이 염씨 집안에 총각이 있었는데, 혼인할 나이가 차서 오산방에 살고 있는 창령 조씨의 규수와 혼담이 있었다. 두 집안은 혼인을 하기로 약속하고 대례를 치를 날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런데 조선 전기 연산군 시절, 궁에서 각 고을에 채홍사를 파견하여 미모의 여인이 있으면 궁으로 올려 보낼 것을 요구하였고, 여기에 조씨 집안의 규수도 뽑혀 가게 되는 일이 발생했다. 채홍사의 요구는 어느 누구도 거부할 수가 없었기에 규수는 한양으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염씨 총각은 식음을 전폐하하다 결국은 죽고 말았다. 염씨 총각은 죽어가면서 그의 부모에게 조씨 처녀가 한양으로 갈 때 지나가게 될 길의 사거리에 자신을 묻어 달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겼다. 총각의 부모는 원통하게 죽은 자식의 한을 풀어 주기 위해 총각의 시신을 길옆에 묻었다. 이 사실을 들은 조씨 처녀도 매우 원통해 하였다.
드디어 조씨 처녀가 한양으로 가는 날이 되었다. 채홍사는 처녀를 가마에 태우고 한양으로 가는 길을 재촉하여 가다가, 총각이 묻힌 무덤의 옆을 지나게 되었다. 처녀는 그곳에서 잠시 쉬어 가길 청하였다. 가마꾼들이 가마를 내려놓고 잠시 쉰 뒤에 다시 가마를 들어 올렸으나 어찌 된 일인지 가마가 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가마꾼들이 의아해서 가마 안을 들여다보니 처녀는 이미 싸늘한 시신이 되어 있었다. 조씨 처녀가 염씨 총각의 무덤 옆에서 자결을 한 것이었다. 그 두 사람의 사랑이 하늘에 닿고 땅에 닿아 가마가 땅에서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조씨 처녀의 부모들이 달려와 아무리 달래도 가마는 움직이지 않았다. 급기야 고을 군수가 와서 두 사람의 원혼을 위하여 가마탑을 세워 줄 것을 약속하자 그제야 가마가 땅에서 떨어졌다. 고을 군수는 나중에 약속대로 가마 모양의 탑을 세워 주었고, 매년 정월 보름에 이들을 위한 제사를 지내 주었다. 이때부터 이 지방에서는 처녀 총각이 죽으면 반드시 사거리 길 가운데 시신을 묻어 주어야 후환이 없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다.
[모티프 분석]
「처녀 총각의 원혼을 풀어준 가마탑」의 주요 모티프는 ‘남편을 따라 죽은 열녀’, ‘가마탑 조성’ 등이다. 비록 대례를 치르지는 못했지만 혼인을 약속했으니 부부 사이인 것이다. 혼인을 할 수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 홀로 죽어간 남자와 이를 따라 자결한 여인의 열녀담은 죽음까지도 지아비를 따라야 한다는 유교적 윤리관을 보여 주고 있다. 또한 「처녀 총각의 원혼을 풀어준 가마탑」에는 사랑하는 남녀를 억지로 떼어 놓아 그들이 죽음에 이르게 될 때 그 원혼이 하늘과 땅에 미치기에 이 원혼을 풀어 주어야 한다는 민중의 믿음도 담겨 있다. 가마탑을 만들어 주겠다는 약속을 하기 전까지 가마가 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원혼은 반드시 풀어 주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러한 형태의 해원담은 다양한 형태로 전국에서 전해 내려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