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18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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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剛泉寺施主僧-富者村 |
이칭/별칭 | 「둔터들과 초래 바위」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팔덕면 |
집필자 | 박정미 |
[정의]
전라북도 순창군 팔덕면에서 둔터 부자촌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강천사 시주승과 둔터 부자촌」은 시주승이 횡포를 일삼던 양반을 혼내 줄 생각으로 명당 터의 지맥이었던 초래 바위를 훼손하여 명당의 맥을 잘라 버리게 하였고, 이 때문에 부자들이 벌을 받아 살던 마을이 폐허가 되고 말았다는 풍수담이자 명당 파손담이다. 이를 「둔터들과 초래 바위」라고도 한다.
[채록/수집 상황]
2002년 12월 양상화가 엮어 순창 문화원에서 간행한 『순창의 구전 설화』상의 176쪽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둔터들은 팔덕면 소재지에서 덕천 방면으로 통하는 다리인 용산교를 지나 반월형의 모양으로 동서로 길게 둘러싼 뒷등 아래 펼쳐진 넓은 들판이다. 이곳에 몇백 년 전 자자손손 부귀를 누리며 행세깨나 하던 부자촌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 부자촌의 자손들은 번창하여 문무에 능했고, 많은 하인들과 소작농들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권세까지 누리고 있어 그 위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이렇게 권세와 부귀와 영화를 누리며 살다보니 자만심과 다른 사람에 대한 경멸은 대단했고, 인근 주민들에게 그들은 부러운 존재이기보다는 무서운 존재가 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부자촌에 강천사에 있던 한 암자의 시주승이 찾아와 시주할 것을 권하며 목탁을 두드렸다. 때마침 숭유 억불 사상이 전국을 뒤덮을 때라 이 부자는 시주승을 잡아 묶어 놓고 주리를 틀어 말할 수 없는 갖은 곤욕을 보인 후 돌려보냈다. 그 후에도 이 집에 시주를 온 시주승들은 하나같이 곤욕을 치러야 했다.
이 같은 일이 반복되자 부자들의 횡포를 그대로 볼 수 없다고 생각한 한 시주승이 이 부자촌 양반들을 혼내 주기로 하였다. 이 시주승은 풍수지리에 능한 스님이었는데, 도승으로 변장을 하고 부자촌을 찾아갔다. 그는 마을에서 가장 권문 대가로 알려진 부잣집을 골라 대문 앞에서 푸념 삼아 말을 늘어놓았다.
"허허, 이거 큰일 났군. 이 집이 오늘날까지 몇 대를 두고 이렇게 부귀영화를 누린다마는 이제 그 운이 다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거 참 안타깝구나. 다만 한 가지 묘책이 있기는 한데…."
시주승은 혀를 끌끌 차고 뒤돌아서서 대문을 나섰다. 이 말을 들은 하인이 집주인에게 달려 들어가 시주승의 말을 전하였다. 그러자 집주인이 부리나케 뛰어 나와 시주승을 붙잡고 애걸복걸하며 그 묘책을 알려 달라고 간청하였다. 이에 시주승은 못 이기는 체하며
"이 마을 앞 냇물 저기 보이는 초래 바위가 횡액을 불러오고 있으니 저 바위를 헐어야 재앙을 모면할 수 있소이다."
하였다. 사실 그 바위는 이 마을이 영원히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명당 터의 지맥을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이 바위를 없애면 명당 터의 지맥을 자르는 일이었다.
이 말에 속아 넘어간 마을 양반들은 더 많은 부귀를 누리고자 하는 욕심에 하인들을 동원하여 며칠을 두고 그 바위를 헐어 버렸다. 그러자 갑자기 마을 장정들이 연달아 급사를 당하고, 그토록 번창했던 마을은 순식간에 피폐해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마을은 집 한 채 남지 않은 폐허가 되고 말았다.
[모티프 분석]
「강천사 시주승과 둔터 부자촌」의 주요 모티프는 '부자의 시주 거부', '시주승의 보복', '풍수로 징치' 등이다. 시주승에게 시주를 거부하고 오히려 곤욕을 당하게 하는 것은 「강천사 시주승과 둔터 부자촌」 이야기의 출발점이 된다. 그런 양반을 징치할 목적으로 양반 스스로 풍수의 맥을 잘라 내게 하여 양반촌의 멸망을 불러오게 한다. 부자의 인색함과 시주승에 대한 시주 거부는 장자못 전설의 원형적인 모티프이며, 부자촌 양반 스스로 명당의 맥을 자르게 하고, 이로 인하여 몰락하게 되는 것은 절맥형 풍수 전설의 원형적인 모티프로 볼 수 있다. 장자못 전설과 절맥형 풍수 전설은 전국적으로 넓게 분포하여 전승되고 있는 전설의 유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