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600325 |
---|---|
한자 | 朝鮮時代 |
영어공식명칭 | Joseon Dynasty |
영어의미역 | Joseon Dynasty |
영어공식명칭 | Joseon Dynasty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남도 순천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이욱 |
[정의]
1392년에서 1910년까지 조선왕조가 지속되었던 시기 전라남도 순천 지역의 역사.
[연혁 및 행정 구역]
조선이 건국되어 1413년(태종 13) 순천부는 순천도호부로 바뀌었다. 그보다 앞서 1396년(태조 5)에는 여수현이 다시 순천부의 관할 지역으로 편입되었다. 여수현과 함께 순천도호부의 관할 지역이었던 돌산현, 부유현 및 다수의 향·소·부곡 등은 15세기 말까지는 모두 직현이 되었다. 1598년(선조 31) 광양현이 순천도호부에 통합되었다가 곧 복구되었다. 1725년(영조 1)에는 여수도호부가 신설되어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여수도호부사를 겸임하였다. 그러나 1년 만에 여수도호부는 폐지되고 순천부의 관할이 되었다. 조선시대 내내 순천의 읍격에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 다만 역적의 고향 등의 이유로 일시적으로 강등되는 경우가 있었다. 순천에서도 몇 차례 그런 사례가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1630년(인조 8), 1631년(인조 9), 1663년(현종 4), 1669년(현종 10), 1733년(영조 9), 1786년(정조 10) 등 모두 6차례에 걸쳐 순천의 지방관이 현감으로 나오고 있다. 도호부가 현으로 강등되면 10년 동안 그 위상이 유지된다. 때문에 위 6차례 기사 중 10년이라는 기간을 감안하면 모두 네 차례 현으로 강등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강등 사유는 1786년 기사에서만 확인할 수 있다. 역적 이태수(李泰守)의 출생지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10년 뒤 다시 순천은 도호부의 지위를 되찾았다. 그리고 1895년 지방통치제도 개편 때 순천도호부는 순천군으로 개칭되었다.
영조 연간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따르면, 조선 후기 순천부의 행정 구역 안에 소안면(蘇安面)·장평면(長平面)·해촌면(海村面)·용두면(龍頭面)·율촌면(栗村面)·소라포면(召羅浦面)·삼일포면(三日浦面)·여수면(麗水面)·상이사면(上伊沙面)·송광면(松廣面)·쌍암면(雙巖面)·주암면(住巖面)·도리면(道里面)·하이사면(下伊沙面)·별량면(別良面)·서면(西面)·월등면(月登面)·황전면(黃田面)의 18면 34개 방리로 나누어져 있었다.
[정치와 군사]
순천도호부에는 부사 1인이 있었는데, 정3품 문관이 파견되었다. 그리고 조선 전기까지는 종 9품의 관원이 향교의 교수로 파견되었는데, 조선 후기에는 폐지되었다. 부사의 임기는 1,800일[5년간, 뒤에는 2년 반으로 고쳐짐]을 원칙으로 삼았으며, 또 출신지에 부임하지 못하게 하고 가족도 동반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는 수령의 권력 남용과 토착화를 방지하려는 조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기간이 만료되기 전에 교체되는 일이 많았다.
세조 때 진관체제가 시행되면서 순천이 전라도 동부의 거진이 되었다. 순천부사가 첨절제사가 되어, 낙안(樂安)과 보성(寶成)의 두 군과 광양(光陽)·흥양(興陽)·능성(綾城)·동복(同福)·화순(和順)·구례(求禮) 등 여섯 현을 통할하였다.
[사회와 경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나타난 순천부의 호수와 인구수는 호수가 4백 67호, 인구가 2천 6백 18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세종 이후 순천의 인구를 알 수 있는 자료는 1618년(광해군 10) 편찬된 『승평지(昇平志)』인데, 여기서는 3,587호에 1만 2,039명의 인구로 나와 있다. 이 중 659호가 신호(新戶), 즉 새로 파악된 호라고 적혀 있다. 임진왜란의 여파로 줄어들었던 인구가 점차 회복되면서 이전에 비해 20% 이상 증가하는 추세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증가세는 1729년(영조 5) 『중간승평지(重刊昇平志)』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호수 14,318호에 인구 4만 5,070명으로, 호수와 인구 모두 1618년에 비해 거의 4배 증가하였다.
그런데 그 이후부터는 인구가 감소세를 보인다. 1759년(영조 35)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1만 4,199호에 4만 1,869명으로 1729년에 비해 약간의 감소세를 보이더니, 1881년(고종 18) 『신증승평지(新增昇平誌)』에서는 8,532호에 3만 847명으로 1759년에 비해 30% 이상 호수와 인구수 모두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통계가 현실을 반영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40여 년 뒤인 1923년의 인구는 조선인만 10만 7,987명으로 나타난다. 더구나 1881년까지 인구 통계는 지금의 순천과 여수를 모두 포함한 것이지만, 1923년의 통계는 여수를 제외한 당시 순천의 인구를 파악한 것이다. 따라서 18세기 이후 순천의 호구 감소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라기보다는, 조선의 인구 파악 및 조세 수취 정책이 총액제로 운영되면서 나타난 현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세종 초 순천부의 경지 면적은 전답을 합하여 7,315결인데, 논과 밭이 각각 절반이었다. 땅이 기름지고, 경지 면적 역시 다른 지역에 비해 넓은 편이었다. 이외에도 해산물, 소금, 산림 생산물 등이 풍족하게 생산되었다. 이후 임진왜란 직전까지는 경지 면적이 점차 늘어나 1만 1,000여 결까지 증가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큰 타격을 입으면서 경지 면적은 급감하였다. 1618년 편찬된 『승평지』에는 논 2,545결, 밭 818결로 총 3,368결이었다. 세종 대의 46%, 임진왜란 직전의 31% 수준으로 감소하였다. 이후 점차 회복해서 1729년에는 논 6,673결, 밭 5,310결, 합 1만 1,983결로 임진왜란 직전의 수준을 상회하였다. 1759년 『여지도서』에는 논 5,405결, 밭 2,646결로 줄어든 것으로 나타난 반면, 1881년 『신증승평지』에서는 1729년의 수치와 동일하게 나타난다.
조선 전기 순천의 토산 공물은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범가죽·삵괭이가죽·여우가죽·잘·족제비털·칠·감·귤·석류·배·매화·분곽(粉藿)·꿀·밀[黃蠟]·대추·지치·죽순·상어·전복·홍합·붉은 큰새우·차[茶]·표고·목화·오죽·대방석,염매, 녹용, 천문동, 맥문동, 난향, 오징어뼈, 심황, 수포석, 백복령, 인삼 등 모두 36종이었다.
군정은 조선 전기에는 시위군이 17명, 수호군이 79명이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크게 증가하였다. 『여지도서』에 의하면, 순천부에는 좌수영에 소속된 수군 2,985명을 포함해 영(營)이나 부(府), 6진(鎭)의 군교·이속 및 각색 군액을 합하면 8,571명이었다. 당시 순천부의 남정이 1만 8,593명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군역 부담이 매우 무거웠음을 알 수 있다. 백골징포나 황구첨정과 같은 병폐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다.
[교통과 통신]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돌산(突山), 성두(城頭), 진례(進禮), 백야(白也) 등 4개의 봉수대가 있었다. 『여지도서』에도 4개의 봉수가 보이는데, 성두 대신 ‘성황당산 봉수’가 보인다. 이름만 바뀐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역으로는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양률(良栗)·낙수(洛水) 두 개의 역만 있고, 고양역(高陽驛)은 왜구 때문에 폐지했다고 나온다. 『여지도서』에는 양률역, 낙수역과 함께 덕량역(德良驛)이 관아 동쪽 60리[약 24㎞]에 있다고 나와 있다. 고양역은 순천부 서쪽 50리[약 20㎞]에 있었는데, 덕량역은 그와는 반대 방향이었다. 이로 보아 조선 전기와는 다른 교통로가 조선 후기에 개통된 것으로 보인다. 이들 역은 모두 오수역에 속해 오수찰방의 관할에 있었다.
원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연지원(蓮池院)·건천원(乾川院)·심원(深院)·신점원(薪岾院)·잔수진원(潺水津院)·고양원(高陽院)·신당원(神堂院)·광천원(廣川院)·이제원(梨濟院)·남원(南院)·동백원(冬栢院)·구음곡원(仇音谷院)·동원(東院)·성생원(成生院)·무상원(無常院)·내례원(內禮院) 등 17개나 있었는데, 『여지도서』에는 성성원(星省院)·선천원·송치원 등 3곳밖에 없었다. 정부의 정책 변화에 따라 원이 대폭 축소되었다.
[문화]
조선 전기의 성리학 보급과 정착은 순천에서도 나타나고 있었다. 성리학 보급의 학문 기관으로는 조선 초기에 세워진 향교가 중심에 있었다. 순천향교는 1407년(태종 7)경에 세워졌으나, 근처에 있는 옥천의 범람과 전쟁 때문에 여러 차례 이전하였다가 1801년(순조 1) 현재의 위치인 전라남도 순천시 금곡동으로 옮겨왔다. 1500년(연산군 6) 김굉필(金宏弼)이 순천으로 유배 오면서 순천 지역 성리학은 전기를 맞았다. 16세기 이후 순천에 들어온 사족들이 김굉필과의 학문적 연원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때문에 순천에는 전라도 최초의 사액서원인 옥천서원이 가장 먼저 창건되었다. 옥천서원에는 김굉필이 배향되었다. 이후 이수광(李睟光)을 배향하는 지봉서원[청수서원] 8개의 서원과 임진왜란 때 무장으로 공을 세운 장윤을 배향한 정충사, 허일을 배향한 충렬사, 충민사 등이 건립되었다. 이들 12개의 서원은 독자적으로 운영되는 한편 그 중심에는 향교가 있었다. 때문에 순천에는 “순천향교의 재임과 장의가 조그만 고을 수령보다 낫다.”라는 말이 있다.
조선의 억불책에 따라 순천 지역의 불교 사원은 조선 초기부터 정비되었으며 축소되었다. 그러나 민간의 불교 신앙이 뿌리 깊게 존속하였을 뿐 아니라, 어느 정도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순천에는 천년 고찰로 일컬어지는 정혜사, 순천 송광사, 순천 선암사, 대광사, 흥국사, 대흥사 등이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정혜사에 부처의 치아 사리가 보관되어 있었다는 기록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