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6003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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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古代 支配勢力 |
영어공식명칭 | ancient dominant force |
영어의미역 | ancient dominant force |
영어공식명칭 | ancient dominant forc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남도 순천시 |
시대 | 고대/고대 |
집필자 | 이순엽 |
[정의]
고대 전라남도 순천 지역에서 활동했던 지배세력의 동향
[개설]
순천은 한반도 남단에 위치해 북으로는 산악지대를, 남으로는 해안을 끼고 있으며, 역사적으로 전라남도 동부 지역의 군사·행정·교통·교육·문화의 중심지로 발전해왔다. 삽평(欿平)·승주(昇州)·평양(平陽) 등으로 불려온 순천은 예부터 산천이 아름답고 물산이 풍부하며, 인심이 후하여 살기 좋은 고장이라 하여 ‘소강남(小江南)’으로 불러 왔다. 그래서인지 일찍부터 선사문화가 형성되었고, 순천 지역의 발전 과정을 고대사회의 지배세력을 통하여 살펴볼 수 있다.
[마한시대]
순천을 포함한 전라남도 동부권의 광양, 여수, 고흥, 보성 등지는 고대사학계에서 마한권역에 포함시키고 있다. 그 시기는 지석묘사회가 소멸하는 기원전 2~1세기경부터 가야문화가 파급되는 5세기 중엽 이전까지로 볼 수 있다. 마한은 78개 소국으로 이루어졌으며, 순천을 중심으로 한 전라남도 동부 지역에는 불사분사(不斯墳邪), 불운(不雲), 원지(爰池), 초리(楚離) 등의 소국이 존재했다고 한다. 이 소국들이 순천 지역까지 포괄하고 있었는지, 그 규모와 체제·경제구조 등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순천은 소국가에서 소국연맹체 단계를 거치면서 고대 국가인 백제에게 통합되었을 것이다. 소국연맹시기에는 같은 전라남도 지역이지만 영산강 유역에서는 대형의 옹관묘[독무덤]가 발견되고 있는 반면, 순천 지역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영산강 유역보다 일찍 백제에게 점령되었던 까닭에 대형고분이 만들어지지 못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시대]
마한시대에 이어 백제가 순천 지역을 복속시킨 것은 서기 369년(근초고왕 24)이라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기 추정은 고고학적인 발굴조사 등으로 볼 때 많은 의문점을 내포하고 있다. 고고학적인 발굴조사에 의하면 전라남도 동부 지역에서 백제계 유물이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6세기 전반기인데, 이와 관련하여 광양 용강리 고분이나 여수 고락산성 출토유물이 방증자료이다.
백제의 지배에 들어간 순천 지역의 상황을 알려주는 구체적인 자료는 찾아보기 어렵다. 백제의 지방통치조직으로는 담로제가 알려져 있다. 담로는 성을 중심으로 하는 거점 중심의 지방통치조직으로, 3세기 구수왕(仇首王) 대부터 사료에 나타나는데 무왕(武王) 대에는 22담로제로 완성되었다. 22담로에는 국왕과 인척 관계에 있었던 자제종족이 파견되었을 것이다. 순천 지역 역시 전라남도 동부 지역 교통의 중심지였던 만큼 22담로 중 하나에 속했을 것이다. 담로제에서는 담로 지역에 살고 있었던 인민에 대한 지배권과 수취 권한을 중앙에서 직접 장악하였고, 담로 이외 지역은 여전히 지방토착세력이 수취권을 쥐고 있었다.
사비시대에 백제의 지방통치조직은 5방제로 바뀌었다. 5방제에서는 방-군-성의 순으로 병력 동원 명령이 하달되었고, 방은 군을, 군은 성을 직접 통치하였던 지역 분할 통치방식이었다고 하겠다. 5방제에서는 담로제 시기와 비교가 안 되는 다수의 지방관이 파견되었고, 생산을 담당하고 있던 개인과 개별 호(戶)에게 직접 세금을 부과하였다. 5방제에서 순천 지역은 남방성에 속했을 것이다, 남방성의 순천 지역 토착 세력 역시 백제의 중앙통치력이 강화됨에 따라 권력을 빼앗기며 중앙집권화에 편제되었다.
[통일신라(남북국)시대]
백제가 660년(의자왕 20)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하자 옛 백제 영토는 신라에 병합되었다. 그렇지만 통일신라(남북국)시대의 순천 지역은 백제시대와 큰 차이 없는 행정영역을 유지하면서 명칭만 삽평군(欿平郡)에서 승평군(昇平郡)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효도를 강조하는 사회적인 분위기에서 경덕왕 때 구례에 4사자석탑이 조성되었다. 의상계 화엄종은 실천성이 강해 효도와 출가의 갈등을 조화시키려는 효선쌍미신앙을 성립시켰는데, 이에 4사자석탑과 같은 상징적인 조형물이 만들어졌다. 또 「천관산기」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장보고의 세력이 장흥만이 아니라 전라도 동부지역을 넘어 남해안 전역까지 확산되었음 알 수 있다. 장보고가 해상무역에 기반을 둔 세력가였음을 고려해 볼 때 순천·여수 지역은 당연히 장보고의 주요한 거점이었을 것이다. 하대로 접어들면서 지방호족세력이 성장하였고, 고려 왕건(王建)과 후백제 견훤(甄萱)의 투쟁기에 이르러 승평군은 후백제 세력권 밑에 있었다. 고려와 후백제의 투쟁기에 있어서 초기에는 견훤의 강력한 지원세력 집단이었으나 후에는 왕건의 편으로 태도를 바꾸었다. 이로 인하여 940년(태조 23) 승평군은 승주로 승격되었다. 고려 개국과 동시에 왕건은 지방호족 흡수책으로 각 지방에 할거하고 있는 29명의 호족과 인척 관계를 맺는데, 전라남도 지방에서는 나주와 승주 두 곳 뿐이다. 이때 승주에서는 순천박씨인 박영규(朴英規) 집안이 연관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당시 승평 지방을 관장하면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세력은 중앙정부가 아니라 박영규를 중심으로 한 지방호족세력이었던 것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