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6003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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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樂安郡 |
영어공식명칭 | Nagan-gun |
영어음역 | Nagan-gun |
영어공식명칭 | Nagan-gu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지명/고지명 |
지역 | 전라남도 순천시 |
시대 | 고려/고려 |
집필자 | 이욱 |
[정의]
고려시대부터 대한제국기까지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 지역을 중심으로 설치된 행정구역의 명칭.
[명칭 유래]
낙안군이라는 지명은 고려시대에 처음 사용되었다.
[형성 및 변천]
백제시대에는 분차군(分嵯郡), 신라 경덕왕 때는 분령군(分嶺郡), 고려시대에 처음 낙안군(樂安郡)으로 기록되었다. 고려 전기에 낙안군은 수령이 파견되지 않는 속현이었다. 995년(성종 14)에는 해양도 소속으로 승주에 설치되었던 연해군절도사의 관할 아래 있었다. 그 이후 1018년(현종 9) 지방제도를 정비하면서 나주목에 직속하는 속현이 되었다. 이후 낙안군이 나주목의 직할을 벗어나고, 다시 주·군·현의 위치를 회복한 시기는 1172년(명종 2)에 감무가 설치되면서부터이다. 고려말 낙안 지역에는 왜구의 침입으로 인해 치소가 현재 순천 낙안읍성 자리로 옮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초기 김윤길(金贇吉)이 토축(土築)하였던 읍성은 1424년(세종 6) 석성으로 개축되었으며, 객관은 1450년(세종 32)에 증축되었다. 대략 세조 대 무렵이면 주요한 읍치 시설이 완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낙안군은 대략 오늘날의 순천시 낙안면, 순천시 외서면, 순천시 별량면 일부,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전라남도 고흥군 동강면 등을 포함하고 있었다. 조선 전기의 기록에 따르면 소 4곳[가용·품어·초천·개영]과 부곡 1곳[군지]이 낙안군에 속해 있었으며, 306호, 1,439명의 호구에, 13명의 시위군, 25명의 진군, 166명의 선군이 배당되어 있었다. 또한, 경작지는 2,016결이며, 논이 그 3/5에 미달하였다.
18세기 중반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영조 35, 1759]에서는 2,653호, 8,069명에 논 1,684결여·밭 595결여[총 2,279결여]로 증가하였다. 그 30년 뒤의 『호구총수(戶口總數)』[정조 13, 1789]에서는 2,780호, 9,018명으로, 19세기 중반의 『대동지지(大東地志)』[고종 1, 1864]에서는 다시 2,590호, 8,440명에 경작지 3,255결로 변화하고 있다.
또한, 세조 대에 편성된 진관체제에서 낙안군은 순천진관에 속해 있었다. 말하자면 낙안군수는 동첨절제사로서 첨절제사인 순천부사의 지휘를 받게끔 편제되어 있었던 셈이다. 순천진관은 중앙군의 5위체제에서 전위를 담당하는 군단인 충좌위의 좌부에 편성되어 있었고, 유사시에는 하나의 독립된 방어단위가 되어 자전자수(自戰自守)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므로 전쟁이 일어날 경우 낙안군수는 동첨절제사의 직임으로 낙안군의 군사를 인솔해 첨절제사인 순천부사의 지휘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
조선시대 대부분 기간을 전라도 관하 12개 군 가운데 하나로서 종4품 군수의 통치를 받던 낙안군은 1908년에 폐지되는 운명을 맞이하였다. 관내의 11개 면 중 읍내면·내서면·외서면·동상면·동하면·초상면·초하면의 7면이 순천군에 병합되고, 나머지 고상면·고하면·남상면·남하면의 4면은 보성군으로 이속되었다.
[위치 비정/행정 구역상의 구분]
낙안군은 현 순천시의 서남부에 위치하였다. 이곳의 서남쪽 방향을 제외한 지역은 모두 산지로 이루어졌다. 서북쪽에 가장 높은 고동산(高東山)을 정점으로 서쪽의 외서면의 경계를 따라 백이산으로 산줄기가 이어지고 동남쪽이 서쪽과 대칭적으로 제석산, 오봉산, 호사산과 같은 높은 산지로 둘러싸여 있다. 동북쪽은 우산이 높게 솟아 있다. 면의 중앙부에는 진산인 금전산(金錢山)이 있다. 교촌천과 낙안천의 두 하천이 면의 중앙을 북에서 남으로 흘러내려 낙안면 신기리에서 합류하는데, 이 두 하천 주변에 넓은 퇴적지와 침식평야가 있다. 지방도가 면소재지에서 동서남북으로 교차한다. 순천시 낙안면 면소재지인 동내리를 비롯한 낙안면 서내리·교촌리 등 19개의 법정리를 관할하고 있다.
[관련 기록]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지와 『고려사(高麗史)』 지리지에 의하면, 백제시대에 분차군(分嵯郡), 신라 경덕왕 때 분령군(分嶺郡), 고려시대에 낙안군(樂安郡)이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