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6006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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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姜振遠 |
영어공식명칭 | Kang Jin-won |
영어음역 | Kang Jin-won |
영어공식명칭 | Kang Jin-won |
이칭/별칭 | 승우(承宇) 형원(亨遠),성산(聖山),강형오(姜炯吾/姜亨吾),강형우(姜亨宇),강승지(姜承旨),강여명(姜汝明),강의연(姜義淵) |
분야 | 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남도 순천시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홍영기 |
출생 시기/일시 | 1881년 - 강진원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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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921년 - 강진원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77년 - 강진원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출생지 | 강진원 출생지 - 전라남도 순천시 서면 운평리 당천마을 |
활동지 | 신기마을 - 전라남도 순천시 승주읍 두월리 |
성격 | 의병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강진원 의병부대 의병장 |
[정의]
근대시기 순천 출신으로 의병부대를 만들어 구국운동을 펼친 의병장.
[가계]
강진원(姜振遠)[1881~1921]은 현 전라남도 순천시 서면(西面) 운평리(雲坪里) 당천(堂川)마을에서 태어났다. 강진원의 본관은 진주, 자는 승우(承宇), 혹은 형원(亨遠)이며, 호는 성산(聖山)이다. 이명은 강형오(姜炯吾/姜亨吾), 강형우(姜亨宇), 강승지(姜承旨), 강여명(姜汝明), 강의연(姜義淵) 등 많은 편이다.
[활동 사항]
강진원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익혔으나 장성한 후 노모를 봉양하고 병든 동생을 돌보면서 출사하지 않고 학문에 매진하고, 제자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강진원은 현 순천시 승주읍(昇州邑) 두월리(斗月里) 신기(新基)마을에 서당을 개설하여 10여 명의 제자를 길렀다. 당시 강진원은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으나, 사상만큼은 매우 투철하여 춘추의 의리 사상을 중시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 이래 국운이 날로 기울어가자 전국적으로 의병이 봉기하였다. 강진원 역시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의병에 투신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1908년 음력 6월 하순 강진원은 순천 출신의 우국지사인 김명거(金明巨)·김화삼(金化三)·권덕윤(權德允)·김병학(金柄學), 곡성 출신의 김양화(金良化)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강진원은 의병장이 되어 선봉대장(先鋒隊長) 김화삼, 훈련대장(訓練隊長) 최성재(崔性栽), 수포대장(收砲隊長) 김병학, 행군대장(行軍隊長) 김명거, 모사(謀士) 김양화, 서기(書記) 권덕윤, 조창국(趙昌國) 등 수십 명으로 진용을 구성해서 일사보국(一死報國)을 맹세하였다. 이후 순천의 조계산(曹溪山)에 근거지를 구축하여 먼저 군사훈련을 시행했다. 당시 조계산에는 의병들이 이용할 수 있는 암자가 많았으며, 스님들도 이들의 구국투쟁을 지원해주었다. 당시 일본은 “송광사(松廣寺)와 선암사(仙巖寺)가 자리한 조계산에는 의병의 출몰이 잦으며, 지형적인 조건에 의하여 의병을 진압하기 어렵다.”라고 파악하고 있다. 일제가 조계산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던 셈이다.
강진원의 의병부대는 의병의 모집, 무기의 조달, 일본 군경의 활동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다른 의병부대와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를테면 1908년 9월 조규하(趙圭夏)[1877~1908] 및 신정백(申正栢)[1877~1909] 의병장이 이끄는 의진과 더불어 현 전라남도 곡성군 석곡면(石谷面)의 조지촌(鳥枝村)에서 격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조규하 의병장을 비롯한 약 25명 내외가 전사하였다. 하지만 강진원 의병부대는 불굴의 항일투쟁을 이어갔다. 즉 1908년 10월에는 일본군 3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거두었고, 11월에 고흥 과역장날 일본 군경 분파소 등을 공격하여 일본인 순사와 은행원 등을 죽이고 군자금 및 무기를 확보하였다. 흔히 이를 과역승첩(過驛勝捷)이라 한다. 바로 이어 이들은 고흥읍의 주재소와 우편소 등을 공격하여 피복과 공금을 노획하여 군자금으로 활용하였다. 이들이 뱃길을 이용하여 여수 지역으로 퇴각한 정황을 입수한 일본 군경의 집요한 추격을 받아 상당한 타격을 받기도 했다.
1909년에 들어서도 강진원 의병부대는 수십 명에서 일백 명의 규모를 유지하며 순천, 고흥, 곡성, 구례, 남원, 여수 등지를 무대로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이들은 공전영수원이나 우편소 등을 공격하여 군자금을 확보했으며, 일본 군경과 싸워 신식 무기를 조달하기도 했다. 이후 강진원은 효과적인 의병활동을 하기 위해 인근 의병부대와 때로는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전력(戰力)의 열세를 극복하였다. 하지만 1909년 음력 6월에는 순천의 서면 운평리 당천마을 색천사정(索川社亭)에서 기습을 받아 큰 피해를 보았다. 이로 인해 강진원은 남은 의병을 수습하여 최성재에게 맡기고 경상남도 통영(統營)의 연내도(蓮內島)[현 경상남도 통영시 욕지면 연화리 연화도로 추정]에 일시 피신하였다. 바로 이 시기에 일제는 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작전[1909년 9~10월]’이라는 대규모 군사작전을 전개하여 전라남도 의병을 강력히 진압하던 중이었다.
일본군의 포위망을 벗어났던 강진원은 병탄을 전후한 시기에 외가인 현 순천시 승주읍 두월리의 신기마을에 은신하며 제자를 기르면서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1912년부터 1913년 사이에 강진원과 함께 군자금을 모으던 동지 강몽굴(姜夢屈) 등이 체포되어 1913년 6월 순국하기도 했다.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강진원 역시 일제 경찰의 집요한 추적을 받아 1921년 8월 격렬한 저항 끝에 체포되었다. 강진원의 부하 김화삼이 먼저 붙잡혀 강진원의 소재가 탄로 났기 때문이다. 결국, 일제의 마수를 벗어날 수 없었던 강진원은 옥중에서 자결한 것으로 전한다.
[상훈과 추모]
강진원은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