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6011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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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공식명칭 | Eokmangol and Pinaeddorang(Folktale) |
영어음역 | Eokmangol and Pinaeddorang(Folktale) |
영어공식명칭 | Eokmangol and Pinaeddorang(Folktale) |
이칭/별칭 | 「혈천탄」,「피내골」,「피내도랑」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전라남도 순천시 인제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서해숙 |
수록|간행 시기/일시 | 1784년 - 「억만골과 피내또랑」 『강남악부』에 「혈천탄」으로 수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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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간행 시기/일시 | 1985년 - 「억만골과 피내또랑」 『남도문화연구』1에 「억만골과 피내또랑」으로 수록 |
채록|수집|조사 시기/일시 | 1991년 - 「억만골과 피내또랑」 강학도, 차영옥에게 채록 |
수록|간행 시기/일시 | 1992년 - 「억만골과 피내또랑」 『순천시의 문화유적』1에 「혈천탄」으로 수록 |
관련 지명 | 억만골|피내또랑 - 전라남도 순천시 인제동 |
채록지 | 「억만골과 피내또랑」 - 전라남도 순천시 인제동 |옥천동|금곡동 |
성격 | 지명유래담 |
주요 등장 인물 | 마을 사람들|순천과 인근 백성들 |
[정의]
전라남도 순천시 인제동에 있는 인제산 계곡이 억만골, 피내골, 피내또랑이라 부르게 된 것과 관련해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순천시 인제동 뒤 인제산 계곡에는 피내골, 피내또랑, 억만골이라 부르는 곳이 있는데, 임진왜란 당시 마을 사람들이 건달산으로 난을 피해 숨었으나 도륙을 당해 그 피가 개천으로 흘러 붉은 피로 물들었는데, 그 뒤로 붉은색이 변하지 않아 ‘피내골’, ‘피내또랑’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채록/수집 상황]
「억만골과 피내또랑」는 『강남악부』 98~99쪽에 「혈천탄」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고, 1985년에 최덕원이 현지조사 한 내용이 『남도문화연구』1 259쪽에 「억만골과 피내또랑」으로 실려 있다. 또한, 1992년에 발행한 『순천시의 문화유적』1 298쪽에 「혈천」으로 실려 있다. 한편, 1991년[추정연도] 순천시 거주 강학도[남, 채록 당시 83세]와 차영옥[남, 채록 당시 70세]에게 채록한 내용이 1992년에 발행한 『순천시의 문화유적』1 298쪽에 「피내골」[강학도], 「피내도랑」[차영옥]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내용]
「억만골과 피내또랑」에 관해 『강남악부』에 실린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고을 남쪽 4리쯤에 건달산이 있었는데, 산 밑에 작은 내가 흘렀다. 그 물이 역동촌 앞으로 흘러 들어갔다. 냇물 바닥에 피 같은 붉은색이 있어서 일러 ‘혈천’이라 했다. 세속에서 전하기를, 임진왜란 때 고을 사람들이 건달산으로 난을 피해 숨었으나 모두 살해당했다고 한다. 피가 흘러 개천에 들어가 흐르는 물이 모두 붉어지더니 그 후로 적색이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 말미에 저자 조현범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내가 있네, 내가 있어 이름은 ‘혈천’일세. / 내의 색이 피와 같으니 색이 가련하구나. / 하늘과 땅에 때가 불행하여, / 용사년에 왜구가 쳐들어 왔었네. / 고을 사람이 피하여 건달산에 들어갔네. / 난시에 목숨이 위험하여 보존하길 생각했지. / 어찌 알았으랴 어지러운 도적들이 죽이기를 좋아할 줄이야. / 떼죽음하니 영혼이 골짜기에 살아서, / 피가 흘러 내에 드니 냇물이 붉구나. / 붉은 흔적 사라지지 않고 지금까지 원한이 그대로 있네. / 지금은 다행히 태평성대를 만나서 / 한산 앞바다에 파도가 일지 않는구나.
1985년에 현지 조사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인제동 뒤 산골에는 억만골이라고 불리는 계곡이 있어 그 유래를 들으면 옛날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쳐들어와 순천과 인근의 백성 수십만 명을 죽여서 그 피가 흘러내려 현재 남정리 앞에 흐르는 개천을 이루었다고 하여 ‘피내또랑’이라 했다. 옛날에는 피같이 붉은 물이 흘러내렸다. 그래서인지 죽인 사람 시체를 끌고 가지 못한 일본군은 죽은 사람의 불알만 떼어 말려서 짚 섬에 넣어 수백만 섬을 일본으로 가져가 무공으로 삼았다고 한다.
[모티프 분석]
1784년에 탈고한 『강남악부』에 당시 구전되어 오던 ‘피내 전설’을 ‘혈천탄’이라는 이름으로 기록한 것으로 보이는데, 1985년에 현장조사 한 이야기와 비교하면 유사한 부분이 많다. 지금도 인제산 부근과 전라남도 순천시 옥천동·금곡동 일대에서는 피내골, 피내또랑에 대한 이야기를 쉽게 들을 수 있는데,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수많은 사람이 몰살당했음을 말하고 있다. 그 원한이 깊은 까닭에 붉은빛이 없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피내’라는 지명은 여수 돌산과 진도에도 있는데, 이 전설의 공통점은 이곳이 임진왜란 때 격전지였으며, 희생자들의 피가 내를 이루어 그곳을 ‘피내’라 부르고 있다는 점이다. 모두 당시 역사적 상황을 전하는 이야기로 보인다. 그런데 순천의 피내또랑은 그 피가 조선인들이 흘린 것이라는 점에서 여수나 진도의 전설과는 다르다. 여수와 진도의 이야기는 조선 군대가 왜군을 이겼고, 그때 왜군들이 흘린 피가 냇가를 이루었다고 한다. 이처럼 피내골, 피내또랑은 임진왜란 때 마을 사람들이 겪었던 비극적인 상황을 역사 기록을 대신해서 구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