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6012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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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任那日本府-虛構-順天雲坪里古墳群 |
영어공식명칭 | Suncheon Unpyeongri Ancient Tombs which highlights Imnailbonbu's fictions |
영어음역 | Suncheon Unpyeongri Ancient Tombs which highlights Imnailbonbu's fictions |
영어공식명칭 | Suncheon Unpyeongri Ancient Tombs which highlights Imnailbonbu's fictions |
분야 | 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라남도 순천시 |
시대 | 고대/초기 국가 시대 |
집필자 | 이동희 |
[정의]
일본 연구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할 수 있는 고고학적 자료인 순천 운평리 고분군.
[전남 동부지역의 대가야문화와 순천 운평리 고분]
『일본서기(日本書紀)』 계체기(繼體紀) 6년(512) 조에 임나사현(任那四縣)[상다리, 하다리, 사타, 모루]이 언급된다. 백제가 임나국의 4현을 빼앗은 것이니, 원래는 그곳이 임나(任那), 즉 가야(加耶)의 범위에 해당한다는 표현이 그것이다. 임나사현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제시되었는데, 최근에는 전라남도 동부 지역을 임나사현으로 추정하고 있는 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임나사현은 기문(己汶)과 대사(帶沙) 지역을 공략하기 위한 일종의 교두보 역할을 하였으므로 기문, 대사와 가까운 지역이다. 기문이 백제와 대가야 사이에 공방이 치열하던 전라북도 남원시 지역이고, 대사가 경상남도 하동군 지역이라고 한다면, 임나사현도 기문, 대사와 인접해 있는 곳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섬진강 하구의 서안, 즉 전라남도 동부 지역에 해당한다. 특히 전영래는 임나사현의 구체적인 위치까지 언급한 바 있다. 즉 상다리(上哆唎)는 전라남도의 여수반도, 하다리(下哆唎)는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도, 사타(娑陀)는 전라남도 순천시, 모루는 전라남도 광양시로 추정한 바 있는데, 이 견해는 점차 인정되는 추세이다.
낙동강 하류 지역이 5세기 초 이후로 신라의 통제를 받는 상황에서 가야제국은 섬진강을 통해서 대외교역을 이루었던 듯하며 대가야가 479년(동성왕 원년)에 중국 남제(南齊)와 교역을 이룬 통로도 바로 경상남도 하동 지역을 통해서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울러 섬진강 서안의 물혜(勿慧)[전라남도 광양시]와 달이[전라남도 여수시]를 포함한 우륵 12곡에 거론된 지명들은 5세기 후엽 가실왕(嘉悉王) 때 이래 그 소국들이 대가야 중심, 후기 가야연맹의 소속국이었다고 보는 견해가 참고된다. 이러한 점에서 대가야가 전남 동부 지역으로 영향력을 미친 시기의 상한을 5세기 후엽으로 볼 수 있다.
대가야 세력이 섬진강 하구로 내려왔을 때 서안(西岸)과 동안(東岸) 양쪽으로 진출할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섬진강 서안으로 더 적극적으로 진출한 것은 상대적으로 서안의 토착 세력이 약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전라남도 동부 지역은 영산강 유역이나 경남 서남부 지역과 달리 5세기대까지 독자적으로 지역 연맹체를 형성할 만한 주체적인 역량을 갖추지 못하였기에 대가야계 세력이 쉽게 진출할 수 있었던 배경이었다고 판단된다.
대가야연맹체의 성격은 좁은 의미의 대가야[경상북도 고령군의 반파국]가 맹주국이며, 각 구성국은 독립성을 유지하되 어느 정도의 상하 관계 속에 놓여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그 상하 관계의 강약은 경상북도 고령군으로부터의 지리적 원근과 각 세력의 강약에 따라 결정되었을 것이다. 경상남도 진주시의 경우 수정봉·옥봉 고분군의 하위 취락 고분군이라 할 수 있는 가좌동 고분군에는 고령양식 토기가 나오지 않아 고령과 진주의 연계는 수장층을 중심으로 한 연계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전라남도 동부 지역은 고령에서 원거리에 해당하며 대부분 거점 지역에서만 대가야 토기나 묘제가 확인되고 있기에 수장층을 중심으로 한 연맹 관계일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대가야계 토기가 출토되는 고분군은 대가야 세력이 전라남도 동부 지역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대가야와 관계를 맺은 재지 세력이 조영한 것으로 판단된다. 전라남도 동부 지역에서 대가야 토기나 관련 묘제가 출토되는 거점 가운데 임나사현의 비정지 혹은 우륵 12곡에 등장하는 대가야연맹의 소속국과 관련지어 고찰해 보면 다음과 같다.
[임나사현의 비정지와 순천의 관계]
임나사현 중 사타는 전라남도 순천시 운평리 유적을 통해 순천(順天)으로 비정할 수 있다. 운평리 유적이 사타의 중심 고분군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운평리 유적은 전라남도 동부 지역의 대표적인 대가야계 고총 고분군이다. 순천 운평리 고분군 바로 인근에는 가라골[秋洞]이 있어 주목되는데, 지명 상으로도 대가야(大加耶)와 밀접한 관련성을 가진다. 백제시대 순천 지역의 지명이 ‘사평’이었고, 최근에 조사된 순천시 왕지동·덕암동, 순천시 서면 선평리, 순천시 해룡면 성산리의 순천 검단산성 등지에서도 대가야계 석곽묘나 토기들이 빈출(頻出)[자주 나옴]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순천 일대를 임나사현의 사타와 연결하는 것은 문제가 없다고 판단된다.
순천 운평리 고분군으로 대표되는 전라남도 동부 지역의 대가야계 고분의 수가 적고 소규모인 것은 전라북도 동부나 경상남도 서북부 지역과 달리 대가야가 영향력을 끼친 기간이 상대적으로 짧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만큼 대가야가 임나사현에 대한 장악력이 약했고, 한편으로 토착 수장층의 자치권이 강했으며 토착문화가 꾸준히 지속되었음을 의미한다.
6세기 전반 대에도 대가야계 고분과 토기가 변형되고 토착화된 채 지속되는 것은 그 이전 단계에 단순한 교류 차원이 아니라 한동안 대가야 영향권 하에 있었음을 방증한다. 대표적인 예가 전라남도 순천시의 왕지동 고분군이다. 운평리 주변의 왕지동이나 선평리 일대의 토기는 대부분 대가야 토기를 모방한 것이다. 즉, 기층에까지 미친 대가야 토기 문화는 단순한 교류나 교역 차원에서 볼 수 없고, 대가야의 정치적 영향력을 의미하는 것이다.
대가야에 의한 직접 지배가 이루어진 곳은 이제까지의 재지 수장 세력이 폐절되고 새로운 곳에 갑자기 고총이 조영되는 현상이 발생한다고 한다.
순천 운평리 고분군은 동일 묘역에서 4세기대의 재지 토광묘로부터 소·대가야계 묘제를 거쳐 백제 영역화 시점까지의 묘제와 토기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이는 순천 운평리 고분군이 4세기부터 6세기에 이르기까지 토착 수장 세력의 묘역이라는 것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이는 대가야의 정치적 영향력에 의해서 새로운 곳에 고총(古塚)이 출현한 것이 아니라 토착 세력의 묘역에 대가야계 묘제와 토기 문화가 유입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순천 지역에 대한 대가야의 정치적 영향이 직접 지배가 아니라 간접 지배나 상하 연맹 관계임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는 재지 수장층의 자치를 용인되는 선에서 대가야와 토착 세력이 정치적 동맹 관계를 맺은 것을 의미한다. 요컨대, 전라남도 동부 지역은 대가야의 직접 지배라기보다는 토착 수장(首長)을 통한 간접 지배이거나 상하 연맹 관계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며, 고고학적 양상도 그에 부합하고 있다. 순천 운평리 고분군의 고총들에서 대가야계 세장방형 석곽묘와 위세품[통형기대, 이식, 마구류 등]의 출토는 고령의 대가야와 순천 사타국과 정치적 동맹 관계를 뒷받침하는 것이다.
다만, 대가야 묘제와 다소 다른 속성, 예컨대 주구(周溝)가 있다든지, 지하식이 아니라 반지하식인 것은 전라남도 동부 지역이 대가야의 정치적 영향 이전에 주류를 이루었던 소가야묘제가 잔존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한편, 운평리 2호분 주석실에서는 대가야계 금제이식(金製耳飾)이 출토되었는데, 이와 관련하여 상술해 보기로 한다.
대가야형 이식의 가장 큰 특징은 사슬형 연결금구와 공구체형 중간식을 조합한 금제(金製)라는 점이다. 대가야형 이식은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 지산리의 지산동고분군, 경상남도 합천군 쌍책면 성산리의 옥전고분군, 합천군 봉산면에 있는 합천 반계제A호분, 경상남도 함양군 합양읍 백천리에 있는 함양백천리1호분, 경상남도 진주시의 진주 중안동고분군, 경상남도 고성군 고성읍 율대리에 있는 고성율대리2호분-3호석곽,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동읍에 있는 창원다호리B-15호석곽에서 출토되었다. 그 외 전라북도 장수군 봉서리, 전라남도 곡성군 석곡면 방송리 고분군 출토품이 있다. 곡성 방송리고분군 출토 금제이식도 백제이식으로 파악되어 왔으나, 함양 백천리에서 출토된 대가야산 이식과 같은 형식이고 이와 함께 대가야 양식 토기가 공반되고 있어 대가야산으로 파악된다. 장수 봉서리와 곡성 방송리의 고분군에서 출토된 대가야식 금제수식부이식은 섬진강 수계가 대가야의 위세품 체계 하에 들어갔음을 보여준다. 대가야산 이식은 5세기 후반에는 황강수계와 남강상류역·금강상류역·섬진강수계에 분포하다가, 6세기 전반에는 소가야권역의 진주, 고성 그리고 금관가야권역의 창원, 진영 분지까지 확산된다. 이처럼 대가야산 위세품의 분포와 대가야 양식 토기의 분포가 궤를 같이하는 점에서 양자는 대가야의 권역 확대와 영향력 향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요컨대, 섬진강 상류권의 장수 봉서리, 섬진강 중류권의 곡성 방송리 외에 섬진강 하류권의 순천시 서면 운평리에서의 대가야계 금제이식(金製耳飾)은 고령의 대가야와 섬진강 유역권간 정치적 연맹 관계를 웅변(雄辯)[의심할 나위 없이 명백]하는 위세품이다. 대가야계 이식은 대가야와 연계된 지방 수장급 고분에만 부장된다는 공통점이 있다.
한편 우륵 12곡에 등장하는 가야제국 가운데 달이는 여수로 비정된다. 달이는 상·하(上下)로 구분되어 상다리(上哆唎)는 여수반도, 하다리는 여수 돌산도로 추정된다.
고고학적으로 보면 하다리는 가야계 토기가 다량 출토된 돌산 죽포리 부근으로 비정할 수 있고, 상다리는 대가야 토기가 집중적으로 출토된 고락산성과 고락산성 아래의 전라남도 여수시 미평동 일대라고 보인다. 미평동 토기의 경우는 백제 토기와 대가야계 토기의 융합 현상도 보이기에 거점 지역에서의 역사적 연속성을 보여준다. 이 일대에는 백제 산성인 고락산성과 척산산성이 바로 인접하여 자리하고 있어 백제시대까지 요충지였으며 해안에서 내륙으로 통하는 길목이다. 최근에는 미평동과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죽림리 유적에서 소가야계 석곽묘·토기와 더불어 대가야계 토기가 출토된 바 있어, 여수반도에도 가야문화가 성하였음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그리고 임나사현의 하나인 모루의 중심지는 광양읍으로 비정되고 있다. 이는 광양의 백제 때 명칭이 ‘마로(馬老)’라는 점에서도 뒷받침된다. 최근에 광양읍 도월리의 분구묘와 취락유적에서 5세기 말~6세기 초의 소가야 및 대가야 토기들이 출토된 바 있다.
이와 더불어 대가야계 장경호 2점이 출토된 전라남도 광양시 진상면 비평리 일대가 주목된다. 광양 비평리는 광양과 하동을 잇는 길목에 자리하여 전략적 요충지이다. 비평리 일대에서는 대가야계 토기들이 더 많이 수집되었다고 전하므로 이 일대에 고분군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평리의 비촌(飛村)은 과거에 ‘비읍(飛邑)’이라고도 불려 역사적으로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데, 비촌마을은 삼한(三韓)의 성지(城址)로도 알려져 있다. 고분군에서 동북쪽으로 1㎞ 지점에 백제시대에 초축된 불암산성이 위치하며, 광양과 하동을 잇는 길목이면서 섬진강과 직선거리로 3㎞밖에 떨어지지 않으므로 이 일대가 지정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지역임을 짐작할 수 있다. 대가야 고분 관련 유적에 바로 인접하여 백제의 산성이 있는 것은 백제의 거점 지배와도 관련된다.
[순천 운평리 고분군과 임나일본부설]
순천 운평리 고분군은 전라남도 동부 지역에서 발굴 조사된 유일한 가야계 고총고분군이다. 운평리 1-3차 발굴조사에서 직경 10~20m의 봉토분 5기, 토광목곽묘 15기, 석곽묘 25기를 조사하여 4~5세기 대의 재지 토광묘와 5세기 말엽~6세기 전엽의 대가야계 석곽묘·석실묘를 확인하였다. 특히 M2·3·4호분에서 출토된 대가야계 위세품은 5세기 말~6세기 초엽의 전라남도 동부 지역과 대가야와의 연맹 관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자료이다.
이처럼 순천 운평리 고분군은 백제가 전라남도 동부권을 장악하기 직전인 기원후 500년을 전후한 시기의 순천 지역 지배층 무덤이다. 즉 전라남도 동부권에 존재하는 대가야계 고분군으로서, 대가야와 연맹체를 이루고 있던 임나사현[사타·모루·상다리·하다리]의 하나인 사타의 실체를 보여주는 자료이다. 일본 연구자들에게 있어, 임나사현 관련 기사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의 중요한 근거자료 중 하나이므로, 임나사현의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
임나일본부설은 일본의 야마토 왜가 4세기 후반에 한반도 남부 지역에 진출하여 백제·신라·가야를 지배하고, 특히 가야에는 ‘일본부’라는 기관을 두어 6세기 중엽까지 직접 지배했다는 설이다. 즉, ‘임나’라 불리는 지역이 4세기 후반부터 일본 천황의 직할지로 편입되었고 그를 유지, 관리하기 위하여 ‘일본부’라는 항구적 관리 기관을 두고 천황의 명령을 받은 관료가 그곳에 파견되어 대리 통치하였으며 이후 562년 신라가 그 지역을 장악할 때까지 200년 동안 그런 상태가 지속되었다는 주장이다. 이 임나일본부는 흔히 1910년 설치된 식민통치기관인 조선총독부를 연상케 하여 마치 그와 유사한 성격인 것처럼 지적되어 왔다. 임나의 위치는 대개 가야의 영역과 동일시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관학자들이 임나일본부설을 증명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먼저 도굴 수준의 발굴조사를 시행한 것이 가야 지역의 고분이다. 1960년대 말~1970년대 초의 대대적인 논쟁과 재검토를 거친 지금, 일본에서 역사학자로서 이러한 주장을 펴는 사람은 거의 없게 되었고, 임나일본부의 실체를 행정관청이 아닌 ‘외교사절’로 보는 것에 한·일 양국의 학계가 어느 정도의 접근을 보인다. 물론, 일본의 중등학교 일본사 교과서의 일부에는 아직도 그와 같은 해석들이 남아 있고, 최근에는 과거의 주장을 역사적 사실처럼 서술한 우익의 일본사 교과서가 일본 정부의 검인정을 통과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에 일본의 역사 왜곡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임나일본부설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고 그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날조한 식민사관의 하나인 타율성 이론의 대표적 산물이다. 이는 한·일 양국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이기도 하거니와, 독도 영유권 문제와 함께 한·일 관계 복원에 최대의 걸림돌로 작용한다. 즉, 학술적인 연구를 떠나서 일본 교과서의 왜곡된 기술이나 한·일 양국의 정치적 문제로 비화되어 오늘날까지 자국의 입장에서 서로 다른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일본서기』의 6세기 초 기록에는 임나사현을 백제에 할양했다는 기사가 나오지만, 이는 일본의 왜곡된 사관(史觀)이 반영된 것으로, 일반적으로 백제가 가야 영역을 영역화했다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임나사현에 대해 한국 고대사학계에서는 섬진강 서안의 전라남도 동부권[전라남도 순천시·광양시·여수시]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며, 이를 고고학적으로 확인한 것이 순천 운평리 고분군 발굴조사의 가장 큰 성과이다. 반면, 일본에서는 일제강점기 관학자들로부터 최근까지 임나사현을 영산강 유역에 비정하는 견해가 대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임나’ 즉 가야의 영역을 영산강 유역까지 확대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더구나 영산강 유역에는 일본 고분 시대의 전방후원형(前方後圓形) 고분이 존재하고 있어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아직도 일본의 국수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임나일본부설을 인정하는 분위기가 있다.
하지만 일본학계에서도 ‘임나’를 ‘가야’와 동일시하고 있듯이 임나사현 영역 내에서는 가야와 관련된 유적과 유물이 확인되어야만 한다. 그런데 호남 지역에서 가야와 관련된 유적·유물은 호남 동부권에 한해서 출토되고 있을 뿐, 호남 서부권의 영산강 유역은 가야와 무관한 옹관묘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다. 아울러 『일본서기』에서 ‘임나사현’ 기사가 나오는 6세기 초엽에 하나의 현(縣) 단위가 오늘날의 시군단위를 넘어서지 않으므로 임나사현을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호남 지역까지 확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구나 임나사현 가운데 모루와 사타는 백제시대 당시에 광양과 순천의 지명인 ‘마로’ 및 ‘사평(沙平)’과 음이 유사하여 연결된다. 예로부터 임나사현으로 비정되는 전라남도 순천시·광양시·여수시는 광양만권으로 같은 생활문화권을 이루어왔다. 이처럼 섬진강 서안의 전남 동부권에서 대가야계 문물이 집중적으로 출토되는 순천 운평리 고분군이야말로 임나사현의 하나인 사타의 지배층 고분임이 확실하며, 가야계 고분과 관련 유물이 다수 출토되는 여수, 광양 지역까지 포함하여 임나사현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요컨대, 일본의 관학자들을 중심으로 임나일본부를 주장하였지만, 임나사현의 하나인 순천 사타국의 지배층 무덤에서는 왜계 유물이 아니라 대가야계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따라서 임나사현은 전라남도 순천시·광양시·여수시 등의 전남 동남부권에 비정되며, 5세기 말~6세기 초엽 후기 가야의 맹주국인 고령의 대가야와 연맹 관계를 맺고 있던 가야[임나]의 4개 고을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