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6012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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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世界文化遺産-登載-山寺仙巖寺 |
영어공식명칭 | Mountain Temple on the UNESCO World Heritage list, Seonamsa Temple |
영어음역 | Mountain Temple on the UNESCO World Heritage list, Seonamsa Temple |
영어공식명칭 | Mountain Temple on the UNESCO World Heritage list, Seonamsa Temple |
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라남도 순천시 승주읍 선암사길 450[죽학리 802]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 |
집필자 | 이종수 |
[정의]
한국의 대표적 산지 승원으로서 201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조계산 순천 선암사의 가치.
[개설]
2018년 순천 선암사를 비롯하여 통도사, 부석사, 봉정사, 법주사, 마곡사, 대흥사 등 7개 사찰이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이란 이름으로 1080번째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세계문화유산이 될 수 있는 조건은 유산의 완전성과 진정성 및 탁월한 보편적 가치이다. 순천 선암사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는 의미는 문화유산으로서의 완전성과 진정성, 그리고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세계유산으로서 완전한 보존 가치]
순천 선암사는 천년이 넘는 역사를 이어오면서 여러 차례 중창되었지만, 그 본래의 기본적 모습을 변형시키지 않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대의 이질적 요소가 끼어들어 근대 이전 건축물의 원형을 파괴한 다른 사찰들과 달리 문화유산으로서 완전성을 유지하고 있다. 창건 이후 중창 기록들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순천 선암사의 창건에 관해서는 아도화상(阿道和尙) 창건설과 도선국사(道詵國師)[827~898] 창건설이 있다. 아도화상은 신라에 불교를 전한 인물로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묘사되어 있다. 그런 아도화상이 순천 선암사까지 와서 사찰을 지었다고 보기는 어렵겠지만, 19세기의 기록인 「조계산선암사사적」에서는 아도화상이 이곳에 사찰을 짓고 산 이름을 ‘청량(淸凉)’이라 하고 절의 이름을 ‘해천(海川)’이라 했다고 한다. 지금도 순천 선암사에서는 아도화상이 처음 절을 지은 곳이 비로암 터라고 믿고 있고, 순천 선암사 일주문 안쪽에는 “고청량산해천사(古淸涼山海川寺)”라는 안택희의 글씨가 선명히 남아 있다. 한편 18세기 초의 기록에서는 신라 말 풍수지리의 대가로 알려진 도선국사가 중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순천 선암사를 창건했다고 하였다. 도선국사가 중국 유학을 했다는 기록은 역사적 사실과 다르지만, 도선국사가 주로 활동했던 무대가 오늘날의 전라남도 순천시, 구례군, 광양시이므로 도선국사 창건설은 신빙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고려시대 순천 선암사와 관련한 기록은 1147년(의종 1)에 제작된 「중창건도기(重創建圖記)」를 통해 확인된다. 「중창건도기」에 따르면, “대법당 2층의 전각은 도선국사가 지은 미륵전이다. 법당 가운데는 석종이 있었던 흔적이 있고, 뜰에는 2기의 보탑이 있으며, 그 뒤에는 3기의 부도와 철불이 있으니 이것이 도선국사가 남긴 유적이다.”라고 하였다. 이 기록을 보고 1094년(선종 11)경 대각국사 의천이 머무르며 중창한 것이라고 전하지만, 당시 의천이 순천 선암사에 머물렀던 기간이 그리 길지 않았으므로 의천이 주석하면서 중창했다기보다 불사의 자금을 지원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창건도기」에서 언급한 철불은 현재 각황전에 봉안된 철조여래좌상이고, 보탑은 대웅전 앞에 있는 순천 선암사 동·서 삼층석탑[보물 제395호]이며, 부도는 순천 선암사 북 승탑[보물 제1184호]과 순천 선암사 동 승탑[보물 제1185호]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조선 전기에는 전하는 기록이 거의 없고 조선 후기의 기록을 통해 중창의 모습을 알 수 있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왜군에 의해 사찰이 크게 피해를 보았는데, 1660년(현종 1) 경잠(敬岑)·경준(敬俊)·문정(文正)이 재건했다.
그리고 1698년(숙종 24)~1707(숙종 33)년에 팔도도총섭을 역임한 호암당 약휴(若休)가 주석하면서 순천 선암사를 크게 중창하였다. 현존하는 전각과 불상 등이 대부분 이때 건립되거나 중수되었으며, 1707년에는 불사를 회향하면서 조계산선암사중수비를 세웠다. 채팽윤(蔡彭胤)의 「조계산선암사중수비」 음기(陰記)에 의하면 당시 순천 선암사에 상주하는 승려가 250인, 법당(法堂) 8위, 전사(殿舍) 12위, 요사채 16위이며, 산 내 암자로 13처가 있고, 부속 암자로 용안산(龍眼山) 선적암(善積庵)과 운동산(雲動山) 도선암(道詵庵)이 있다고 하였다.
그 후 1823년(순조 23) 3월 화재로 대웅전, 명부전, 정문루, 향로전 및 요사채 6동이 소실되었으나, 1824년 해붕(海鵬)·눌암(訥庵)·익종(益宗) 등이 제6차 중창 불사를 통해 전각과 요사채를 재건하였다. 해방 후 1948년 여순사건과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일부 피해를 보기는 했으나 현재의 건물은 대부분 조선시대에 건축된 것을 수리하면서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변형되지 않은 문화유산으로서의 완전성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세계유산으로서의 진정성]
순천 선암사는 문화유산으로서 건축적 완전성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찰 본연의 수행도량으로서의 진정성이 훼손되지 않은 채 전승되고 있다. 지금도 선원·강원·염불원·율원에서는 여러 승려가 전통적인 방법에 따라 공부를 하고 있다. 이로써 순천 선암사는 한국불교태고종의 총림(叢林)으로서 위상을 지니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총림이란 하나의 단일한 사찰 내에 선원·강원·염불원·율원이 있을 정도로 규모가 큰 사찰을 말한다. 현대 최초의 총림은 1947년에 성립된 백양사의 고불총림과 해인사의 가야총림이다. 그 이후 대한불교조계종에서는 6개의 총림을더 건설했고, 한국불교태조종에서는 순천 선암사만을 총림으로 운영하고 있다. 순천 선암사의 선원·강원·염불원·율원 가운데 가장 많은 기록을 남기고 있는 것은 강원에 관한 것이다.
조선 전기까지 순천 선암사의 강원에 대해서는 기록이 부족하여 확인하기 어렵지만, 조선 후기에는 여러 기록을 통해 화엄법회의 개최와 강원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 1691년(숙종 17) 백암(栢庵) 성총(性聰)[1631~1700]이 순천 선암사에서 화엄대회를 개최하였을 때 전국에서 학인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고 한다. 당시 성총은 뤄양[洛陽] 징광사(澄光寺)를 근거지로 여러 경전을 간행하고 있었는데, 강원 교육이 활발했던 순천 선암사에서 화엄대회를 개최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 1754년에 상월(霜月) 새봉(璽封)[1687~1767]이 순천 선암사에서 화엄강회를 열었을 때 1,282명이 모였다. 당시 대회록에는 전각별(殿閣別) 참여 인원이 기록되어 있다.
순천 선암사에서 천 명이 넘는 사람이 모이는 화엄대회를 개최할 수 있었던 것은 강원 전통이 면면히 이어져 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순천 선암사 강원은 북암[운수암]과 남암[대승암]이 경쟁하면서 발전하였다. 북암에서는 해붕(海鵬) 전령(展翎)[?~1826]을 비롯하여 월파, 다오, 벽파, 청호 등의 강백들이 거처하며 조선 말기까지 강맥을 이었다. 그리고 남암은 침명(枕溟) 한성(翰醒)[1801~1876]이 1829년부터 순천 선암사 대승암 강원(講院)에서 약 30년 동안 후학들을 가르침으로써 더욱 번창하였다. 침명 한성의 전강(傳講) 제자는 함명(函溟) 태선(太先)이었고, 태선은 1866년(고종 3) 가을에 경붕(景鵬) 익운(益運)[1836~1915]에게 강학을 전하였다. 또 익운은 경운대사(擎雲大師) 원기(元奇)[1852~1936]에게 강학을 전하고, 원기는 금봉(錦峰) 병연(秉演)[1869~1915]에게 전하여 대승암의 강맥이 근세까지 이어짐으로써 호남지역을 대표하는 4대 강맥으로 평가받았다.
지금도 순천 선암사 강원에서는 전통적인 방법에 따라 강학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전통적 강학은 사미과(沙彌科)-사집과(四集科)-사교과(四敎科)-대교과(大敎科)로 이어지는 과정을 말한다. 조선 전기까지 불교의 강학은 종파에 따른 차이가 있었지만 16세기 말 불교 종파가 해체된 이후 전국의 강학은 동일한 과정을 공부했다. 사미과에서는 『반야심경(般若心經)』·『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을 비롯하여 『사미율의(沙彌律儀)』와 『치문경훈(緇門經訓)』 등을 배운다. 사집과에서는 『도서(都序)』·『서장(書狀)』·『절요(節要)』·『선요(禪要)』를, 사교과에서는 『수능엄경(首楞嚴經)』·『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금감반야경(金剛般若經)』·『원각경(圓覺經)』을 배우고, 대교과에서는 『화엄경(華嚴經)』·『선문염송(禪門拈頌)』·『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을 공부한다.
이 외에도 선원·염불원·율원이 있지만, 문헌에는 별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수백 년의 세월을 거치며 운영되어 자연스러운 일상이었기 때문에 기록을 남길 필요가 없었던 것 같다. 다만 역사적으로 그 설립과 운영을 추정해볼 수 있다.
순천 선암사는 대각국사 의천에 의해 중창되었으므로 고려시대에는 화엄종 혹은 천태종 소속 사찰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이르러 불교 종파가 통폐합되고 조선 후기에는 종파마저 그 명맥이 사라진 이후 선교일치(禪敎一致)의 전통이 세워지면서 전국의 말사(末寺)를 거느린 본사(本寺)들은 사찰 내에 선원과 강원을 함께 설치하였다. 이때 순천 선암사 역시 선원과 강원을 운영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순천 선암사 선원 전통은 조선 시대에 세워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염불원은 17세기 이후 전국에서 염불 수행에 대한 인식이 깊어지면서 선·교·염불을 함께 수행하는 삼문수학(三門修學)이 보편화되었는데, 18세기 말에 이르러 전국 사찰에는 염불원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순천 선암사 염불원 역시 그러한 시대적 흐름에 따라 세워졌을 것이다.
율원의 경우는 19세기 대은(大隱) 낭오(郞旿)[1780~1841]가 지리산 칠불암에서 기도하다가 꿈속에서 부처님에게 구족계를 받는 서상수계(瑞祥受戒) 이후, 낭오→금담(金潭) 보명(普明)[1765~1848]→초의(草衣) 의순(意詢)[1786~1866]→범해(梵海) 각안(覺岸)[1820~1896]으로 이어지는 율맥이 형성되었다. 그 이후 범해 각안→제산(霽山)[생몰년 미상]→호은(虎隱) 문성(文性)[1850~1918]→금해(錦海) 관영(瓘英)[1856~1926]→만암(曼庵) 종헌(宗憲)[1876~1946]→묵담(默潭) 성우(聲祐)[1896~1981]로 이어지는 율맥과 범해 각안→선곡(禪谷)[생몰년 미상]→용성(龍城) 진종(震鐘)[1864~1940]으로 이어지는 율맥이 형성되었다. 20세기 계율 교육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백양사와 해인사 총림이 설립될 때 율원이 성립되었고,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총림을 건설할 때 선원·강원·염불원과 더불어 율원을 세우게 되었다.
이상에서 보듯이 순천 선암사의 수행전통은 한국불교 역사의 흐름과 그 맥을 같이하고 있으며, 지금까지도 수행전통을 면면히 이어오고 있다. 그러므로 변형되지 않은 문화유산으로서의 진정성을 지니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유산으로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
순천 선암사는 외형적 완전성과 내면적 진정성을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문화유산으로서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순천 선암사의 탁월한 보편성이란 한국불교 산지 사찰의 보편성을 순천 선암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산지 사찰의 보편성은 승가 공동체를 통해 실현되며, 승가 공동체는 신앙 의례와 사찰경영에 직접 참여함으로써 사찰을 유지 보존하고 있다.
신앙 의례의 보편성은 새벽·사시·저녁의 세 번에 걸친 예불이 대표적이다. 일반적으로 산지 사찰은 새벽 3시에 기상하여 법당에서 예불을 한다. 새벽예불은 도량을 청정하게 하기 위한 도량석(道場釋)으로부터 시작하여 사물[범종·목어·운판·법고]을 울린 후에 큰 법당에 모여 부처님을 찬양하며 예를 올린다. 큰 법당에서 의례를 올린 후 여러 승려가 나뉘어 작은 전각으로 가서 의례를 올린다. 그리고 사시 예불은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의식이다. 부처님은 정오가 되기 전에 하루 한 끼의 식사를 하였기 때문에 사시 예불은 정오 전에 모든 절차를 마쳐야 한다. 일반적으로 사시(巳時)[9~11시]에 행하기 때문에 사시 예불이라고 부른다. 마지막으로 저녁예불은 하루의 일과를 마무리하면서 부처님께 인사를 고하는 의례이다. 그러므로 대체로 저녁 식사를 마치고 오후 6시 혹은 7시경에 예불을 시작한다. 순천 선암사는 오후 6시에 종각에서 사물을 울리고 대웅전에서부터 저녁예불을 시작한다. 이처럼 순천 선암사의 일과는 예불로 시작해서 예불로 끝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신앙 의례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불교에서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위한 의례 등이 있다. 사찰에서 생자(生者)와 망자(亡者)와 고혼(孤魂)의 왕생극락을 기원한다. 죽음을 준비하는 생자는 죽음 이후 극락에 왕생할 수 있기를 스스로 기도하고, 죽음을 맞이한 망자는 살아 있는 가족이나 지인으로부터 극락왕생의 기도를 대신 받으며, 죽음 이후 극락에 왕생하지 못하고 윤회의 고통에서 헤매는 고혼들은 살아 있는 사람들로부터 극락왕생의 기도를 받는다. 생자를 위해서는 예수재(豫修齋), 망자를 위해서는 사십구재(四十九齋), 고혼을 위해서는 수륙재(水陸齋)를 설행(設行)한다. 순천 선암사에서도 수시로 이러한 의례가 설행되고 있다. 이 외에도 부처님오신날과 열반일 및 지장재일 등에 행하는 정기적인 의례 등이 수백 년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사찰경영의 보편성은 사찰의 자급자족으로 설명할 수 있다. 사찰에 거주하는 승려들은 각자 소임을 가지고 생활한다. 승려의 소임은 노동의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 승려의 노동은 조선 전기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고려시대까지 사찰 운영을 위한 노동은 수원승도(隨院僧徒)와 사원노비(寺院奴婢)가 담당하였다. 대체로 수원승도는 사원전(寺院田)을 경영하였으며 사원노비는 사찰의 잡다한 일들을 담당하였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이르러 수원승도는 해체되고 사원노비는 국가에 귀속되거나 양민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에 사찰 운영에 필요한 노동력을 승려 스스로 담당해야 했다. 이러한 승려의 노동 참여는 조선 후기 대동법과 균역법의 시행으로 더욱 확대되었다. 이로써 사찰에는 소임을 맡은 승려들의 역할이 확대되었다.
오늘날 승려의 노동은 행정 노동과 육체노동으로 분리할 수 있다. 행정 노동은 종무소에서 각종 서류 업무를 담당하고, 육체노동은 사찰 소유의 토지를 경작하는 업무이다. 순천 선암사의 경우에도 총무와 재정 등의 업무를 담당한 행정 승려와 직접 농사에 참여하는 승려들로 구성되어 있다. 농사에 참여하는 승려들은 대체로 선원·강원·염불원·율원의 승려들이 동원된다. 좌선(坐禪)하고 강경(講經)하는 여가에 철에 따라 농사일에 동원되기도 한다. 순천 선암사의 농사는 음식 재료 재배를 위한 밭농사도 있지만, 차밭이 유명하다. 순천 선암사 뒤편 산등성이 넓은 지역에 차나무가 심어져 있는데, 찻잎을 따는 시기가 되면 선원·강원·염불원·율원의 승려들이 총동원되어 농사일을 함께 한다.
이처럼 순천 선암사의 승가 공동체는 한국불교의 보편적 생활행위로서의 신앙 의례와 사찰경영에 참여한다. 그러므로 변형되지 않은 문화유산으로서의 탁월한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