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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800762
한자 政治
영어의미역 Politics
분야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경상북도 울진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동형

[정의]

경상북도 울진 지역에서 지역민을 통해 획득한 권력을 유지·행사하여 지역 발전을 도모하는 총체적 활동.

[개설]

공동생활을 영위하는 인간 사회에는 다양한 이해관계로 인하여 항상 희소 자원의 획득과 배분을 둘러싼 대립이나 분쟁이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대립이나 투쟁을 조정하여 통일적인 질서를 유지하는 주요 수단으로서 정치라는 현상이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되는 것이며, 정치는 주로 국가나 정부라는 제도적인 권력 장치를 통해 이루어지게 된다.

따라서 정치는 좁게는 국가 권력에 의해 수행되는 일련의 통치 행위이며, 넓게는 자신의 이해관계를 공적으로 관철시키기 위한 국가 권력의 획득·유지·행사를 둘러싼 제 집단 간의 투쟁이나 조정 과정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해방 이후 현재까지의 울진 지역의 정치는 주로 국가 기구에 파견할 대표자를 선출하는 선거 활동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제1공화국 : 1948~1960]

해방 이후 제1공화국 말까지 울진 지역민이 직접 참가한 선거로는 3번의 대통령 선거와 4번의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다. 대통령 선거의 경우 1952년 8월 5일 실시된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울진군의 투표율은 전국 평균 투표율인 88.1%보다 높은 94%를 기록하였다. 당시 울진군에서는 당선자인 이승만 후보가 자신의 전국 평균 득표율인 74.6%를 훨씬 상회하는 92%라는 압도적인 득표율을 기록하였다.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울진군의 투표율은 99.6%를 기록하였으며 전국 투표율은 94.4%였다. 당선자인 이승만 후보는 전국 평균 70.0%를 득표했으나 울진군에서는 96.6%를 득표하였다.

1960년 3월 15일 실시된 제4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경쟁자였던 민주당의 조병옥 후보가 선거 운동 중 사망하는 가운데 다시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울진군의 투표율은 98.7%였으며 전국 투표율은 97%였다. 그러나 이 선거는 대한민국 선거 사상 최악의 부정 선거로 이를 규탄하는 4·19혁명과 더불어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였다.

국회의원 선거의 경우 1948년 5월 10일 실시된 초대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울진군은 1명의 국회의원을 선출하였다. 모두 4명의 후보자가 입후보한 가운데 무소속으로 출마한 김광준이 당선되었다.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김광준 의원이 당선되어 재선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자유당의 공천을 받아 출마한 전만중 후보가 무소속으로 출마한 김광준 의원을 누르고 당선되었다. 전만중은 1958년 5월 2일에 실시된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자유당의 공천을 받고 출마하여 무소속의 김광준을 누르고 재선에 성공하였다.

[제2공화국 : 1960~1963]

4·19혁명 이후 출범한 제2공화국은 내각책임제를 채택하였다. 이에 따라 제2공화국 하에서는 대통령 선거는 간접 선거로, 국회의원 선거인 민의원 선거는 직접 선거로 실시되었다. 민주당 내 신·구파 간 갈등과 경쟁 속에 실시된 제5대 국회의원[민의원]선거에서 울진군에서는 초대와 2대 국회의원을 지냈던 김광준 후보가 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제3공화국 : 1963~1972]

5·16 군사쿠데타를 통해 출범한 제3공화국은 다시 대통령 중심제를 채택하였다. 따라서 대통령은 국민의 직접 선거에 의해 선출하게 되었다. 제3공화국 하에서는 각기 3번의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대통령 선거의 경우 1963년 10월 15일에 실시된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모두 5명의 후보가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의 박정희 후보와 민정당의 윤보선 후보 간의 대결 구도로 전개되었다.

선거 결과 박정희 후보가 총 유효 투표수의 46.6%를 얻어 당선되었다. 당시 전국 평균 투표율은 85.0%였으며 울진군은 86.2%를 기록하였다. 울진군에서는 박정희 후보가 57.9%를 득표하여 1위를 차지하였다. 제6대 대통령 선거 역시 민주공화당의 박정희 후보와 신민당의 윤보선 후보 간 양자 대결로 전개되었다. 이 선거의 전국 평균 투표율은 83.6%였으며 울진군은 88.5%였다. 선거 결과 박정희 후보가 51.4%를 획득해 당선되었으며 울진군에서는 58.2%를 획득하였다.

1971년 4월 27일 실시된 제7대 대통령 선거는 민주공화당의 박정희 후보와 신민당의 김대중 후보 간의 대결 구도로 압축되었다. 이 선거의 전국 평균 투표율은 79.8%였으며 울진군은 90.9%였다. 선거 결과 박정희 후보가 53.2%를 획득하여 45.3%를 획득한 김대중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두 후보는 울진군에서도 각각 71.8%와 26.9%를 얻어 1, 2위를 차지하였다.

국회의원 선거의 경우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울진군은 개정된 선거법에 의해 영양군과 통합되어 경북 제13선거구로 획정되었다. 모두 6명이 입후보하여 경쟁한 이 선거 결과 민정당의 진기배 후보가 강력한 경쟁자였던 민주공화당의 김광준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1967년에 실시된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울진군은 영양군과 함께 경북 제13선거구로 획정되었다. 10명의 후보자가 난립한 이 선거에서는 민주공화당의 오준석 후보가 65.8%를 획득하여 당시 현역 의원이자 주요 경쟁자였던 신민당의 진기배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울진 지역에서 오준석 후보는 65.4%를 득표하였다. 오준석 후보는 1971년 5월 25일 실시된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도 이 선거구의 주요 경쟁자였던 신민당의 박종길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어 재선에 성공하였다.

[제4공화국 : 1972~1981]

1972년 유신헌법의 제정과 더불어 출범한 제4공화국 하에 대통령은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간접 선거로 선출하게 되었다. 국회의원은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간접 선거로 73명을, 그리고 중선거구제에 의한 직접 선거로 1지역구당 2명씩 146명을 선출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는 제8, 9대 대통령으로 박정희를 선출하였다. 또한 1979년의 10·26사건 이후에는 최규하 후보를 제10대 대통령으로, 최규하의 하야 이후에는 전두환을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국회의원 선거의 경우 1973년 2월 27일 실시된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울진군은 영덕군 및 청송군과 함께 경북 제9선거구로 획정되었으며 투표율은 전국 평균 72.9%를 훨씬 상회하는 80.2%를 기록하였다. 선거 결과 복수 공천을 받은 민주공화당의 문태준·오준석 후보가 신민당의 황병우 후보 및 2명의 무소속 출마자와 경쟁하여 각각 33.2%와 26.1%를 차지하며 동반 당선되었다.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울진군이 소속된 선거구는 전국 평균 77.1%를 상회하는 81.8%의 높은 투표율을 기록했다. 민주공화당의 문태준, 신민당 황병우, 그리고 5인의 무소속 후보가 경합한 이 선거에서는 문태준과 황병우 후보가 25.7%와 24.9%의 지지를 받아 당선되었다.

[제5공화국 : 1981~1988]

제5공화국 하에서는 대통령선거인단에 의한 간접 선거와 대통령 직선제 개헌에 의한 직접 선거를 합쳐 모두 2번의 대통령 선거와 중선거구제에 의한 2번의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1981년 2월 11일의 대통령선거인단 선출 선거에 이은 같은 월 25일 대통령선거인단에 의한 간접 선거로 실시된 제12대 대통령선거에서는 모두 4명의 후보가 나선 가운데 90.23%를 얻은 민정당의 전두환 후보가 당선되었다.

1987년 12월 16일 16년 만에 직접 선거로 실시된 제13대 대통령 선거는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후보,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후보, 평화민주당의 김대중 후보, 신민주공화당의 김종필 후보 간의 4강 구도로 전개되었다. 이 선거에서 울진군은 전국 평균인 89.2%보다 약간 낮은 87.6%의 투표율을 기록하였으며 당선자인 노태후 후보의 울진군 득표율은 69.8%를 기록하였다. 이에 비해 김영삼 후보는 24.6%를, 김대중 후보는 3.0%를 득표하였다.

국회의원 선거의 경우 1981년 3월 25일 실시된 제11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울진군은 영덕군 및 청송군과 함께 경북 제11선거구로 획정되었으며 전국 평균인 78.4%를 훨씬 상회하는 83.4%의 투표율을 기록하였다. 모두 6명의 후보자가 경합한 이 선거에서는 민주정의당의 김중권 후보와 민주한국당의 김찬우 후보가 각각 41.1%와 25.2%의 지지를 얻어 동반 당선되었다.

1985년 2월 12일 실시된 제12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울진군은 영덕군 및 청송군과 함께 경북 제8선거구로 획정되었으며 전국 평균인 84.6%보다 약간 낮은 82.6%의 투표율을 기록하였다. 모두 5명의 후보가 경합한 이 선거에서는 민주정의당의 김중권 후보와 민주한국당의 황병후 후보가 각각 42.9%와 23.0%를 득표하여 당선되었다. 김중권은 제11대에 이어 연임에 성공하였다.

[제6공화국 : 1988~1993]

제6공화국의 노태우 정부 하에서는 직접 선거에 의한 1번의 대통령 선거와 소선거구제에 의한 2번의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1988년 4월 26일 실시된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울진군에서는 모두 5명의 후보가 경합하여 민주정의당의 김중권 54.8%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김중권은 제11·12대에 이어 내리 3선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1992년 3월 24일 실시된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울진군은 전국 평균인 71.9%를 훨씬 상회하는 78.2%의 높은 투표율을 기록하였다. 모두 5명이 경합한 이 선거에서는 통일국민당의 이학원 후보가 3선 경력의 강력한 경쟁자였던 민주자유당의 김중권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한편 제14대 대통령 선거는 해방 이후부터 줄곧 권위주의 정권으로 이어져온 한국 현대정치사의 질곡을 청산하는 출발점이었다. 1992년 12월 28일 실시된 이 선거에서는 모두 7명의 후보가 경합하였으며 선거 결과 민주자유당의 김영삼 후보가 42.0%를 획득하여 강력한 경쟁자였던 민주당의 김대중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되었다. 당시 울진군은 김영삼 후보에게 69.2%라는 절대적인 지지를 보냈다.

[문민정부 : 1993~1998]

김영삼 정부 하에서는 직선제에 의한 대통령 선거와 소선거구제에 의한 국회의원 선거가 각각 1번씩 실시되었다. 1996년 4월 11일 소선거구제로 실시된 제15대 국회의원 선거는 전국 평균 63.9%라는 역대 국회의원 총선거 사상 가장 낮은 투표율을 기록했으나 울진군의 경우 75.9%의 높은 투표율을 기록하였다.

이 선거에서 울진군은 영양군 및 봉화군과 함께 하나의 선거구로 통합되었다. 모두 11명의 후보가 경합하였으나 신한국당의 김광원 후보가 21,615표[27.7%]를 획득하여 당선되었다. 울진군에서 김광원 후보는 44.3%를 득표하였다.

한편 IMF 관리 체제라는 초유의 경제 위기 속에 치러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가 40.3%의 지지를 획득하여 38.7%에 그친 신한국당 이회창 후보를 제치고 당선되었다. 이 선거에서 울진군은 전국 평균 80.7%보다 약간 낮은 78.1%의 투표율을 기록하였다. 울진군에서 이회창 후보는 53.1%, 이인제 후보는 27.0%, 김대중 후보는 15.6%의 지지율을 각각 기록하였다.

[국민의 정부 : 1998~2003]

김대중 정부 하에서도 직선제에 의한 대통령 선거와 소선거구제에 의한 국회의원 선거가 각각 1번씩 실시되었다. 제16대 국회의원 선거는 전국 평균 57.2%라는 저조한 투표율을 기록하여 국민의 정치에 대한 관심이 지속적으로 낮아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울진군의 투표율은 76.0%를 기록해 이전의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보다 오히려 0.1%가 높았다.

봉화군과 함께 하나의 선거구로 치러진 이 선거에서는 한나라당의 김광원 후보와 민주당의 김중권 후보의 치열한 경합 속에 전개되어 김광원 후보가 김중권 후보를 19표차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그러나 울진군의 경우 김중권 후보가 50.9%를 얻어 49.1%를 득표한 김광원 후보보다 오히려 높은 지지율을 기록하였다.

한편 2002년 12월 19일 실시된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와 민주당의 노무현 후보를 포함한 7명의 후보가 출마하였으나 이회창 후보와 노무현 후보 간의 양자 대결 구도로 압축되었다. 이 선거에서 울진군은 전국 평균인 70.8%를 약간 상회하는 72.5%의 투표율을 기록하였으며 노무현 후보는 48.9%를 득표하여 46.6%를 득표한 이회창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울진군에서는 이회창 후보가 67.9%를, 노무현 후보가 28.5%를 각각 기록하였다.

[참여정부 : 2003~2008]

노무현 정부 하에서도 직선제에 의한 대통령 선거와 소선거구제에 의한 국회의원 선거가 각각 1번씩 실시되었다. 2004년 4월 15일 실시된 제17대 국회의원 선거는 전국 평균 60.6%의 투표율을 기록하였으며 영덕군·영양군·봉화군과 같은 선거구를 이룬 울진군의 투표율은 66.2%였다. 모두 5명의 후보가 경합한 이 선거에서 한나라당의 김광원 후보는 46.2%의 득표율로 당선되어 내리 3선에 성공하였다. 울진군에서도 김광원 후보는 45.7%의 지지를 획득하여 32.0%의 지지를 획득한 김중권 후보를 제치고 1위를 차지하였다.

한편 2007년 12월 19일 실시된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한나라당의 이명박 후보와 대통합민주신당의 정동영 후보를 포함한 12명의 후보가 경합하였다. 이 선거에서 울진군의 투표율은 전국 평균인 63.0%를 훨씬 상회하는 69.3%를 기록하였다. 선거결과 이명박 후보가 48.7%를 획득하여 26.1%를 획득한 여당 후보인 정동영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울진군의 경우 경북 포항 출신인 이명박 후보에게 73.4%라는 압도적인 지지를 보낸 반면 정동영 후보에게는 9.1%만 지지하였다.

[이명박 정부 : 2008~ ]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에는 2008년 현재까지 소선거구제에 의한 1번의 국회의원 선거만 실시되었다. 2008년 4월 9일 실시된 제18대 국회의원선거는 전국 평균 46.1%라는 낮은 투표율을 기록하였으며 울진군의 경우 이보다 훨씬 높은 61.7%의 투표율을 기록하였다. 울진군이 포함된 영덕군·봉화군·영양군·울진군 선거구에서는 모두 5명의 후보가 경합하여 한나라당의 강석호 후보가 50.4%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울진군에서는 무소속의 김중권 후보가 55.7%를 득표하여 37%를 득표한 강석호 후보를 제치고 1위를 차지하였다.

[참고문헌]
  • 『울진군지』(울진군지편찬위원회, 2001)
  • 중앙선거관리위원회(http://www.nec.go.kr)
이용자 의견
N** 2020년에 맞게 수정해주세요.
  • 답변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기하신 의견은 수정증보 사업을 통해 반영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2020.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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