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때야 특별한 거 있습니까? 놀이라 해 바야 그저 뭐 낮으로 만날 거 같으면 뭐 바닷가에 낚시하러 가고, 그 다음에 수영하러 가고, 가을 될 거 같으면, 먹을 게 없잖아요, 산머루 따러가고, 뭐 열매 따러 가고, 그 다음에 돈 10원짜리 있으면 옛날에 과자 뭡니까? 샌비과자 같은 거, 사탕 한두 개 얻어먹고……. 귀했지 뭐요. 딱지치기 하고 구슬치기하고. 그 외에는 테레비가 있습...
-
“재적등본을 떼어보면 고조부에 관한 기록은 안 나옵니다만, 증조부 이래 5대째 천부리 485번지 지번을 갖고 있어요. 고조부가 들어와 처음 정착한 곳은 전 알 수 없습니다만, 이 집은 90년이 넘어요. 1910년대에 만든 집이죠. 그때 그 집에 지금껏 살아오고 있어요. 내 아이들도 지금 육지에 나가 있지만 여기서 태어났죠. 물론 처음 고조부께서 만들었을 적에는 울릉도의 전통가옥인...
-
1950년 6월 25일 북한 공산군이 북위 38°선 이남을 침공함으로써 일어난 한국에서의 전쟁. 6·25사변이라고도 하며, 국제적으로는 한국전쟁(韓國戰爭, Korean War)[일부에서는 Korean Civil War라고 주장하기도 함]이라고들 한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되었고, 현재까지 휴전선에 의해 남분 분단 상태로 있다. 1950년 6월 25일 6·25전쟁이...
-
“내 몸에 힘 있을 때, 마지막으로 한 번은 더 갔다 와야 되는데, 일본에 한번 가봐야 되는데, 갔다와야 할 책임이 있어. 우리 막내삼촌이 총각 때 일본 들어가 살았는데, 거서 한국 사람하고 결혼해가 육남매를 낳았죠. 소식이 끊어진 지가 30년이라. 삼촌은 세상을 베렸고, 숙모도 그럴 끼고, 소식이 완전히 끊겼어. 몇 년 전에 가정족보를 하나 해놓았는데, 그 걸 전해줘야 되는데……...
-
“예식은 가마, 가마타고 구식 그대로……. 거 옛날 탕건 쓰고. 우리 할 때 그라고 난 후 몇 해 안 돼서 전부 예식장 갔지. 그때 장가는, 그때 결혼식은 그래 해야 돼. 가마 많이 했다고. 신부 측에 가서 욕 안 보이나 혼수 이만한 거 짊어지고 가가, 그것도 팔아야 되거든. 그것도 장난친다고 신부집에 우르는 기라. 돈이나 안 그러면 먹을 거……. 갔다와가 아랫손들이 한잔해야 되거...
-
“어머니한테 들었는데 김해에서 살았는데, 우리 증조부가 다 그거 했어요. 벼슬을 했는데, 우리 할아버지 때는 거 살다가……. 결혼을 해가지고, 애 둘 낳고 살았죠. 그러다 가선이 점점 기울어 고생스레 지냈답니다. 그러던 차에 그때 생각에 울릉도 가면 자기가 개간한 땅은 자기가 할 수 있다고 하기에 들어가기로 생각한 모양이에요. 전라도 나선이 삼도에서 울릉도로 다니던 그게 있었어요....
-
“어릴 적에는 직접 투막집에 살았어. 나무 걸치고 흙 바르고 우에는 너와이고, 고 다음에 방하고 밖에 하고 사이에 사람이 다닐 수 있도록 했어. 겹집이 되어가지고 겨울눈 많이 올 때는 눈이 와도 안으로 한 바퀴 돌아가……. 울릉도에 바람이 많이 불어요. 바람이 많이 부면 널찌는 돌이 있어. 다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돌 모양이 납작납작한 것은 그냥 있고, 모양이 안 좋은...
-
“고조부(이진화)께서 1821년에 경주 입실에서 태어나셨답니다. 그 분이 회갑 때 아들 용언을 데리고 들어오셨다고 합니다. 그러니 아마도 1881년경에 울릉도에 들어왔을 겁니다. 저희 고조부께서 회갑 때 울릉도에 들어오셨다고 누차 들었으니 분명 1883년 이전에 들어온 것만은 분명합니다. 흔히들 울릉도 개척을 말할 때 1883년 16호 54명에 지나치게 초점을 두고 개척사를 말합니...
-
1883년 울릉도 개척령에 의해 본토로부터 울릉도에 이주해온 사람들. 1883년(고종 20) 울릉도 개척령이 내려진 후 수토(搜討) 정책이 폐기되고, 울릉도에 개척민이 이주했으며, 일본인들은 일본 정부에 의해 소환되었다. 1883년 울릉도 개척령에 의해 울릉도에 들어와 정착과 개간을 시작한 민호와 인구 상황에 관한 자료인 『광서구년칠월 일 강원도울릉도 신입민호인구 성명연세급전토기간...
-
1883년 개척령에 의해 울릉도에 들어와 정착한 후 개간을 시작한 민호와 인구 상황에 관한 구체적 자료 “광서구년칠월 일 강원도울릉도 신입민호인구 성명연세급전토기간 수효성책(光緖九年七月 日 江原道鬱陵島 新入民戶人口 姓名年歲及田土起墾 數爻成冊)”이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도서로 남아 전한다. 그 가운데, 태하에 정착한 사람들은 장적래, 김연태, 이회영, 황수만 등이다. 그러나 이들의...
-
“울릉 개척 당시 관청이 태하에 있고, 도동은 자연항구가 되가 태풍의 피해가 없어요. 북서풍 남서풍 다 피하고. 그래가 자연항구가 좋단 말이죠. 그런데 이곳 천부는 거센 파도가 심해요. 한때 관광선 정박시킬려고 노력한 적 있어요. 관광회사에서는 정박시키고 싶어도 선장들은 여 항구 여건이 나쁘다보니 위험부담이 있어가 흐지부지되고 말았어요.”...
-
“쉰일곱에 면장에서 나와가 지금까지 장사하고 있어요. 제가 건설자재를 팔고 있어요. 울릉도가 다른 데보다 건설업 관계는 국가가 지원을 많이 하기 때문에 수입이 좋았어요. 이제 빚을 다 갚았어요. 빚이 참 많았어요.” “자재구입은 포항이 주로이고, 대구·경주·부산도 거래하고 서울도 특별한 것은 거래해요. 2년 전만 하더라도 저동이나 도동에서 물건을 직접 싣고 왔었어요. 지금은 배달이...
-
태하 2리 학포마을 남단에 산왕각으로 가기 전 해변 암벽면에 새겨진 각석문(임오명각석문)으로 문화재자료 제412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들 각석문은 고종 19년(1882) 5월 검찰사 이규원이 조정의 명을 받아 울릉도 내 경작이 가능한 지역을 답사하고, 무단으로 왕래하는 일본인들의 실태를 파악하도록 파견되어 체류하고 있을 때 새긴 것이다. 그의 '울릉도검찰일기계본초(鬱陵島...
-
서면 태하 1리 큰 황토구미에 있는 천제당은 광서명각석문에서 서쪽으로 30m 떨어져 있는 밭 가장자리에 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당집은 없고, 뽕나무 밑에 시멘트 제단이 설치되어 있는 형태이다. 이 시멘트 제단은 1974년 갑인년 2월 24일에 설치하였고, 그때의 유사는 김은우(金銀雨) 씨였음을 알리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이 제단은 강원도 평해 검찰사가 년 1회 순찰...
-
1961년 2월 1일자의 『조선일보』를 보면 1,500m의 눈이 내린 울릉도에 다시 2,100m가 더 내려 전 교통망이 두절되었다고 한다. 나리분지의 경우 이웃집과의 왕래도 끊긴 채 두 달 반이나 완전 고립되었다는 보도마저 보인다. 눈 오는 울릉도에서, 나리에서 천부초등학교로 오가는 어린이들에게까지 ‘설피’는 겨울에 꼭 준비해야 할 신발이었다. 눈에 빠지지 않도록 신 바닥에 대는...
-
“중매결혼 했는데, 결혼할 형편도 안됐는데, 그래서 살다가, 결혼은 뭐 요만치도 생각지도 안했는데, 형님하고 어머니하고 택일 해가……. 요새는 세월 좋아요. 옛날에는 하라면 하고……. 아내는 열여덟 살에 시집왔어요. 옛날에 열여덟 살이면 신랑이 어떤지도 몰라요. 신랑 오면 달러가고(달아나고) 그랬어요.”...
-
918년에서 1392년까지 고려왕조가 지속되었던 시기의 울릉도의 역사.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王建)은 후백제 견훤(甄萱)과의 사이에서 경상도의 공산(公山) 전투, 고창(古昌)[현 안동] 전투 등을 통해 한반도 주도권을 둘러싸고 치열한 공방을 벌였다. 태조 왕건은 930년 고창의 병산(屛山) 전투에서 후백제의 견훤을 물리침으로써 후삼국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이로 인해 명주(溟州...
-
행정구역상 태하리는 태하 1리와 2리로 구분되어 있지만, 세 지역의 자연촌락 즉, 큰황토구미(태하동), 작은황토구미(학포), 서달영으로 분산되어 있다. 큰황토구미는 본래 황토가 많이 나는 곳이라 해서 큰황토구미로, 소황토구미는 황토가 많이 나지만 동리가 작다고 해서 불러진 지명으로 학포라 하기도 한다. 서달영은 태하동에서 700m 정도 깊은 골짜기에 ‘서달네’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
-
김도근이 갖고 있는 고문서는 유학 김진탁이 1775(32세) 때 과거시험을 본 답안지(시권) 1, 호적단자와 준호구 14장, 김해김씨 삼현파보 등 다음과 같다. 試券 1775년 유학 金振鐸 32세(1775년) 본 김해 거경주 〈호적단자와 준호구〉 무자(1768)정월 안강현 강동면 단구리 유학 김진탁 25세 갑오(1774)정월 안강현 강동면 단구리 유학 김진탁 30세 정유...
-
“우리 고향은 경북 경산이야. 거기서 아버지가 막내로 늦둥이로 태어났어. 우리 아버지가 아홉 살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어. 그래서 영천 하양 등에서 나무장사 하셨어. 자산이 쫌 있었는데 노름으로 탕진하고 아버지가 한 50대 정도 되어서 조모님 모시고 이곳에 들어왔어. 본천부에서도 한참 더 올라가는 곳, 한 25리 정도 될 꺼야. 그 높은 산, 거서 태어나가 다섯 여섯 살 때 두 집...
-
울릉도에 거주하는 부림 홍씨의 입향조는 홍좌의 23세손인 홍병수이다. 그는 42세가 되던 1893년에 세 번째 부인인 용궁 전씨, 장남 홍진우, 장녀 홍덕실과 함께 경상도 영천 고경에서 안강과 포항을 거쳐 울릉도로 이주하였다. 당시 홍병수 일행을 실은 선박이 울릉도에 처음 정박한 곳은 현 울릉군 울릉읍 저동 부근이었으나, 동선한 사람의 건의를 따라 울릉읍 북면 천부 4리...
-
1940년 경상북도 울릉군 농민을 대상으로 행해진 일제의 곡물징수령. 1938년 일본은 중일전쟁을 일으킨 후, 1942년에 진주만을 습격함으로써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일본 제국주의는 중일전쟁을 도발한 직후 1938년 4월에 ‘국가총동원법’이라는 전시통제의 기본법을 제정·공포하여 일체의 인적·물적 자원의 총동원 체제를 구축하였다. 그 후 소작 및 식량과 관련된 다음과 같은 시행령,...
-
“울릉도가 장기적으로는 휴양, 휴식 관광, 이런 방향으로 가야되는데, 이럴려면 식생회복을 빨리해야 합니다. 어차피 우리가 팔아먹을 수 있는 것은 환경뿐이기 때문입니다. 여는 다른 것은 못 합니다. 돈을 투자해서 인위적 구조물을 만들어서는, 경쟁을 해서는 이길 방법이 없습니다. 왜냐면 원가가 워낙 높아서 같은 비용을 주고 같은 시설을 이용한다면 여 안 옵니다. 그러나 식생을 회복할려...
-
“관광도, 전에는 육지에서 관광하러 오시면 성하신당을 꼭 거쳐 갔는데……. 이제는 그런 거 없어요. 왜 그러냐면 군데군데 장사하는 사람들이 있어가지고……. 장사하면 기사들 돈 주고 삶아버리니깐. 그러니까 거기 한참 풀어 놔야 장사되지. 그래서 이런 데는 오도 안하고 많이 홍보가 덜 되었지요. 그리고 한 이삼 년은 태풍에 길이 나빠서 성하신당에 안 들어오고, 기사들이 시간 좀 딸리면...
-
태하리 465번지 내에 위치한 크기 4.2×5.0m 가량의 자연암반석에 새겨진 각석문으로 문화재자료 제41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각석문은 1893년 당시 울릉도 수토관(搜討官)을 지낸 바 있는 조종성(趙鍾成)과 전 수토관 이규원(李奎遠), 영의정 심순택(沈舜澤)[1824~1906] 등이 울릉도에 이주한 주민들의 기아와 질병을 보살핀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각석문의 원...
-
“이 동네는 거의 바닷가가 식당이라, 문화시설 같은 게 딸리고, 기독교식으로 이야기 하면은 우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면서도 벌써 100여 년이 되가는 기독교사가 있는데, 울릉도 조그마하니까, 울릉도 폐쇄적인 게 있어요. 한 치 건너서 전부 다 친척이에요, 그런 면에서 그런지 복음이 많이 확장되는 그런 게 그런 이유가 있는 거 같아요. 그런 거 같고……. 그리고 서달 같은 경우...
-
“여기가 2005년 나비태풍 때 무슨 일이 있었냐면 귀가 안 들리는 노인들이, 연세 87세 되시는, 그분들이 역사의 증인들이신데, 밤8시부터 여기 장난이 아니었어요. 다 내려앉고. 저도 영화에서는 봤거든요. 8시부터 새벽 3시 40분까지 지속되었는데, 그분들 올라오시라니깐, 나 여기서 죽겠다 해서 안 올러오는 거에요. 12시 넘어 1시쯤 되어 제 남편이 젊잖아요. 이분들 죽으면 저...
-
“우리 애기가 울릉도 학포에 들어와 생일파티를 처음 했어요. 전교생이 4명이니깐. 다 불러라 해서 우리가 데려오고 데려주고. 보라색 입은 아이가 우리 딸인데, 하늘이라고 불러요. 본명은 예은이에요. 어느날 자기가 하늘이라고 하겠다고 해서 지금까지 애칭이 하늘이입니다. 와서는 7살 때인데 친구도 없고 해서 계속 연변에 가서 이렇게 서있고, 개 데리고 놀고, 염소와 놀고……. 얘는 작...
-
“군대는 헌병사령부 있었어요. 내가 처음 헌병사령부 갔을 때는 육해공 헌병 총사령부라고 있었어요. 총사령부에 가서도 내가 일 년 동안은 여 뭐하는데인지도 몰랐어요. 일 년 되가 알았는데, 그때 원용복 준장이 총사령관으로 있었어. 유령단체라. 이게 군편제가 없는 기라. 이박사가 만든 거라. 이게 중앙정보부처럼 보급도 없고, 예산도 없고, 그랬어요. 그래가 전부 얻어가 잘 묵고 잘 살...
-
“아~ 그 중간에 이 마을에 아주 참 못 살았어요. 일거리도 없고. 일거리 해봐야 오징어 잡는 것밖에 없는데. 오징어를 6개월 잡아가 일년 먹고 살아야 하는데. 그 생활고 하고는 말도 못하고. 봄 되면 전부 산에 올라가가 나물 해먹고. 그랬어요. 그 뒤에 우리가 젊을 때 우리가 동네를 한 번 일받아 보자 해가(일으켜 보자 해서), 다른 동네보다 한 30년 뒤떨어졌다 이랬는데. 군청...
-
“태하는 들이 넓으니 처음 군청이 여기 있었죠. 군청관사가 어디에 있었냐면 냉동공장 뒤에 보면 돌담집 있는데 올라가시다 보면은 오렌지 색깔 컨테이너박스 하나 있습니다. 거기가 군청관사인데……. 우리가 알기로는 그때 일본 사람들 있을 때 학교까지 축항한다고 준설해 낸다고 그랬다더라고요. 그래가 자연항구 만든다고…….”...
-
“요 넘어 마을에 이사와가 초등학교는 거서 다녔지. 내가 열일곱 살 때 초등학교 졸업했어. 나이 나보다 더 많은 사람도 학교 다니고 그랬지. 우리는 학교 다니면서도 집에 소도 먹이고 농사짓고 하다 보니 학교 공부는 뒷전이었어. 지게지고 소풀부터 비놓고 학교가고 학교 다녀와서는 산에 가 나무하고……. 어릴 적 형편이 말이 아니었어. 봄 때에는 나물을 뜯어가지고 옥수수랑 섞어가 죽을...
-
“어려움, 그거는 말로 다 못 합니다. 어렵게 살아와가 배 사업도 조금 하고 농사도 짓고 그랬어요. 배 사업도 잘 안 되데요. 많이 어려웠어요. 굶기도 많이 굶었고. 지금은 자식들이 잘 살고 고리고리(골고루) 흩어져 있어가 좋습니다. 그리고 우리 큰아는 한 달에 70만원씩 보내줍니다. 농사해서 일 년에 오~육백 벌어가 내 마음대로 쓰고. 빚 없이 산지가 한 10년 되나 몰라. 인자...
-
울릉도는 나무가 빼곡히 들어서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었으나, 지금은 마을 주변에 숲이 거의 없다. 개척 전후에 일본인들이 괴목(槐木)을 남벌하였고, 개척민들도 화전경작을 하거나 땔감으로 나무를 베어내었기 때문이다. 1917년 인류학자 도리이 류우조의 기록을 통해서도 이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섬에는 어떠한 수목이 있는가 하면, 느티나무, 향나무, 오엽송, 솔송나...
-
“지금 또 근래 와서 뭐가 바뀌었나 하면 참 아쉬운 게 하나 있어요. 정부 차원에서 전국적으로 섬에 사는 사람들의 편의를 제공해서 여비를 국가차원에서 지원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게 궁극적으로 봐서는 좋게 생각해야 되는데……. 울릉만의 문제가 아닐 겁니다. 전국적인 문제가 생길 겁니다. 저거를 하고 나서 울릉도에 상권이나 모든 게……. 사람이 없어요. 헐하니까 만 원만 하면 포항...
-
“여 교인이 99%라 여가 천주교까지 합치면 교회가 4개 있어요. 여가 ‘천부’라고 하늘천자에 마을부자라서 하늘의 나라라 해서 여 교회가 성해요. 옛날부터 알고 지어놨나 봐요. 여 딴 거, 유교 불교가 맥을 못 추죠. 여 기독교가 들어온 지는 100년 전에 들어왔어요.” “교회 다닌 지가 한 55년 정도 됩니다. 서른 몇 살부터 다녔어. 매주 꼭 갑니다. 막내는 목사로 있고. 교회...
-
“아까 그 사진이 어촌계장할 때인데. 뭐한다고 찍었나면. 그 김 양식할라고. 돌김 많이 나도록 만들려고 어촌계에서 시멘트를 바위(일반추바위에 발랐어요. 시멘을 전부 내가 바른 거라요. 시멘 발라두면 돌김이 상당히 잘 돋는 기라. 그때 내 토지를 수협에 잡혀두고 시멘트를 보조받아 왔다고요. 그때 요행이 물이 잔잔한 기라. 그게 조금만 쳐도 다 떠내려가 버릴 텐데. 딱 하루저녁 잘 때...
-
“우리 군이 환경상품을 판매할 수밖에 없는 그런 섬입니다. 최고의 상품은 환경입니다. 환경상품이 최고의 상품이라고 저희들이 생각하고 있는 범위 내에서는 지금 북면이 가장 좋은 상품을 가지고 있다라고 봐도 좋습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떤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는가 하면. 일단 원시적으로 남아있는 죽도, 관음도, 강원도가 보이는 태하, 그리고 독도를 바로 조망할 수 있는 석포 전망대...
-
“요즘과 같이 기계식이 아니고 그전에는 낚시 두나(2개) 달았어요, 돈보(보채낚시)라고. 사기가 요리 생겼고. 요기 줄 묶고 철사가 이리 되어있어. 그것도 사는 것도 돈이 없어가 근근이 샀다고. 낚시는 요즘 거와 비슷해. 이 줄로 가지고 밤새도록 내렸다 올렸다, 밤새도록 일하고 나면 팔이 빠지는 것 같아, 노도 저어야지, 그리 사람 잡는기라. 고기가 마 허옇게 떠 있어도. 이노무...
-
“여 들어와가 내 손으로 배 많이 지었어요. 내 기술이 일류 기술이라. 울릉도에서 배를 지어도 학술적으로 배운 내 기술을 이길 사람이 없는 기라. 천부의 아무 거시기다 하면 여 다 알아요. 내가 그때 스물두 살 때인 기라. 새파란 젊은 놈이 그러이 놀라는 기라. 내가 들어왔을 때 다른 울릉도에 배 기술자들이 있었지만, 다 초짜배기들이지. 그 사람들은 3척을 지어도 다 다른 기라....
-
“천궁은 내 제대하고 와가 내 친구 손익찬이가 처음 가져왔어요. 1972년도부터 했는데 그기 울릉도에 다 퍼졌어요. 특히 태하, 서달 쪽에 많이 했죠. 그기 10~15년 했다고. 그 이후에 자연스럽게 사라지고 미역취로 넘어갔지. 모든 작물이 오래하니 안 돼. 서달 쪽에는 되는데. 미역취 그게 본토에서 가져온 게 아니고 산에서 캐온 거 재배한 거야. 지금 고비같은 거 산나물같은 거....
-
"내가 울릉도 들어와가 왜 태하에 왔냐면. 도동에 턱 내려보니. 그때 통통배를 타고 울릉도 들어오는데 두 달 걸렸어요. 포항서 날 좋은 날 받는다고 1달 기달리고. 그 다음에 포항에서 바로 울릉도로 못 들어오고, 울릉도 가까운 데로 해가 온다고 죽변으로 올라왔다고. 죽변 와가 날씨가 안 좋아 25일 걸렸다고. 그래가 울릉도(도동)에 도착해보니. 이거는 깎아지는 절벽이 이리 올라가...
-
“지금 배 타고 가시다 보면 노란색 칠한 배가 작업하는 거 있죠. 그게 각 어촌계 잠수선인데. 앞머리는 노랗고 뒤에 흰 배가 있고 배가 전체 노란 게 있거든요. 노란 배는 어촌계에서 관리하는 배고, 흰 배는 일반 사업자가 허가를 내가지고……. 흰색이면 자망 그물배에요. 항상 있는 게 아니라. 배가 떠 있는 게 아니라 자기들이 어망 깔아놓고 고기가 많이 들어오면 올리고, 없으면 다른...
-
“우리는 전부 농사지었지. 양조장도 했고. 양조장은 큰아버지가 하시다가 돌아가시고, 우리가 인수해서 우리가 계속 했지. 우리가 나기 전에 그러니까 우리가 65세니까 한 70년. 그때부터 하다가 몇 년 전에 치웠지. 직원은 없고 우리가 다 했어. 내가 군대 제대 맞고 와가 내가 우리 집에서 제일 막내인데, 내가 스물다섯살 제대하고 와가 그 길로 양조장 술하고 내가 다 했어. 하다가...
-
“1972년에 천부에 들어와가 첨에는 오징어 장사했어요. 3년 후에 내가 여 출신이다 보니, 그 당시 이동조합이라고 있었는데, 내가 조합을 맡으며 농협을 합병해서 초대 조합장을 했어요. 그때가 1975년이었어요. 그래가 뭐 댕기며(여기저기 다니며) 쓸데없는 뭐 소방대장이다 뭐 이런 거 하다, 빚만 태산으로 지가 돈도 못 벌이고. 가리 늦게 구멍가게 해가 밥 먹고 있어요. 뭐 경력은...
-
조선 중기 대마도사정관으로 활동한 일본인. 1693년(숙종 19) 안용복 등의 40여 명의 어부가 울릉도 해역에서 돗토리현의 어부들과 시비가 벌어졌고, 안용복 등은 일본의 오오야가[大谷家] 어부들에 의해 오키시마[隱岐島]로 납치되어 갔다. 이때 안용복은 그곳에서 울릉도와 자산도(子山島)[독도]가 조선의 땅임을 들어 구금 납치의 부당성을 도주(島主)에게 따졌다. 안용복의 항의를 받게...
-
울릉도 태하리에는 유인등대가 있고, 그 아래에 ‘대풍령(待風嶺)’이라는 고개가 있다. 이 고개 밑의 바다는 수심이 깊다. 이곳은 옛날부터 배가 많이 드나들었는데, 이 배들을 매어두기 위해 이곳에 구멍을 뚫었다. 당시의 배들은 거의가 돛배이기 때문에 바람이 불어야 항해가 가능하였으므로 바람을 기다리는 곳이라고 ‘대풍령’이다. 이 언덕에는 작은 구멍뿐만 아니라 큰 굴이 있었...
-
성하신당은 본래 현 위치에서 남쪽 10m 지점의 낮은 곳에 있었다. 1934년의 대홍수 때 유실되어 그 다음 해에 중건하였다고 한다. “저 성하신당도 수해 나서 떠내려갔거든요. 이게 어디에 있었냐면 옛날에는 도랑이 일루 안 있었고 이쪽 학교 쪽에 있었다 그래요. 이 성하신당이 지금 저 올라가다 보면 큰머리 확 돌아가는 길이 있잖아요. 그쪽에 있었어요. 근데 수해 나서 떠...
-
“여는 다 늙어가 나물하러 가는 사람 별로 없어요. 그리고 여는 특히 나 많은 사람만 여 살거든요. 젊은 사람 별루 없니더.” “지금 더덕, 땅두릅, 나무두릅(참두릅) 등 하고 있습니다. 나무두릅은 모를 이천 개 해놓았는데 그거 심어놓고 내 일본 간다. 더덕은 저거는 가을에 뿌려도 되고 봄에 뿌려도 되고, 3년 4년 있다 캐고 그러지. 더 키울라면 3년 되면 옮겨 심어야 되지. 땅...
-
조선 말기 울릉도 개척을 주관하기 위해 현지 관리인을 임명하여 운영한 제도. 1882년 8월 20일 영의정 홍순목(洪淳穆)은 울릉도에 대한 개척 방안을 제시하였다. 그 과정에서 만약 개척을 담당할 현지 관리인이 없으면 잡폐를 방지하기 어려우니 근실하고 일 잘하는 사람을 검찰사에게 문의하여 도장(島長)으로 임명해서 파견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어 도장제가 실시되었다. 1882년 8월 말...
-
1915년 제주도와 울릉도를 대상으로 실시된 지방 행정 제도. 일제강점기인 1915년 5월 1일 총독부령 제44호에 의해 지방 행정 제도에 도제(島制)가 처음으로 실시되었다. 원래 섬의 행정은 군수가 관장하고 있었으나 도서 행정의 특수성을 감안하여 제주도와 울릉도, 두 섬을 대상으로 도제를 창설하였다. 도제의 대상이 된 섬에는 도사(島司)를 두어, 도사가 섬 전반의 행정 사무를 관...
-
일제강점기 일본 해군이 러시아 함대를 감시하기 위해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에 세운 망루 터. 러일전쟁 초기에 일본 해군은 서해안에서는 기선을 잡았지만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 함대에 의해 동해의 제해권을 장악하지 못하였다. 위기를 느낀 일본 해군은 모든 군함에 무선 전신을 설치하고, 러시아 함대의 동태를 감시하기 위해 울진군 죽변에 망루를 설치하였다. 이후 추가로 울릉도 동북부...
-
“옛날 동력선 하나 가지고 있으면 그 당시 부자였어요. 그때는 오징어, 고기가 엄청나게 많고. 우리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다닐 때만 해도. 여 바다에 가가 전복 많이 먹어요. 요새 아들은 전복 같은 거 구경 못 하잖아요. 내가 제대해가 와서도 바닷가에 소주만 가가면, 전복 소라는 못 먹을 정도로 따와가 먹어요. 요즘은 잠수부도 들어가도 귀하다고 그러잖아요. 그때 동력선 하나...
-
“저는 고향이 포항입니다. 일곱 살 때에 들어 왔습니다. 여기 초등학교 입학했다가, 다시 포항초등학교 다니다가, 다시 왔어요. 저는 지금 아버지와 같이 살고 있는데, 어르신은 포항시청에 다니셨고, 초등학교 선생질도 하셨고, 그 다음에 경찰도 하셨고……. 성격이 좀 과격하다 보니까, 정직하다고 해야 하나 바로바로 사표 써나갔는데, 나중에 동아일보 신문기자를 하면서 어르신이 울릉도를...
-
“등대, 산막 가는 길은 산책로는 지금 하거든요. 그 입구에다가. 터가 8미터인데. 죽도 들어가는 것처럼 위에 달팽이 계단식으로 해가지고 위에 삼각형이라. 그래가 그 중간까지 가서, 거서 바로 계단 만들어서 넘어가고, 넘어서면 구름다리 놓고 산에 정자, 산책로 하기로 했거든요. 지금 착공해야 돼요. 용역회사가 측량하고 그러더라고요. 개인택시를 몰고 지금 영업을 한 몇 년 하고 있거...
-
“거기는 뭐냐면, 등대에서 지금은 전기로 하지만 그때는 모두 화로를 돌렸거든요. 돌리다 보니깐, 기름이 필요하니까, 포항에서 그때 배 이름이 서성호이지 싶어요. 그 배가 포항에서 기름 실꼬 오면 양쪽 모야줄로……그기 줄걸이거든요. 거다가 배를 접안시켜 놓으면 배 선원하고 등대 사람하고 내려와서 기름을 내려가, 그것 갖다가 창고에다 드럼통에 들어 올리면 등대 직원들 짊어지고 들고 올...
-
“예전엔 전부 다 산에 가가 지게지고 나무했어요. 그러다 연탄 나오니 하러가라 해도 안 하잖아요. 그래가 숲이 무성해졌죠. 그때는 전부다 나무 했어요. 정책이라는 게 참 좋아요. 군 산림계에서 와가 단속하고 톱 뺏고, 그래도 따뜻하게 날려면(지낼려면) 다음날 또 나무하러 가요. 그때는 울릉도 나무를 다 조졌어요. 그러다 연탄 때니 하라 해도 안 해요. 요즘은 산에 가면 나무가 천지...
-
“해상공원에 물을, 해수를 넣어가 손으로 산오징어잡기도 하고 저동·도동의 어린애들이 많이 옵니다. 그리고 시원한 바람이 나오는 풍혈(風穴) 있고. 동쪽으로 나가면 삼선암, 관음도, 섬목, 해맞이 전망대 하는 두리봉 있고, 글로 가야 뭐 볼 거 있고. 면소재지에는 면사무소, 파출소, 보건소 등이 있죠. 그리고 제당이 아직 안 뜯기고 있죠.”...
-
“울릉도는 옛날에 차가 안 다녔어요. 80년도, 그 당시에 24인승 버스가 도동-저동만 운행했어요. 그때는 경운기 머리를 개조시켜서 그래가 타고 그랬는데……. 그 당시에는 울릉도 전체가 각 동네마다 순회선이라고 해가지고 아침에 배가 8, 9시 되서 도동 가면 저녁에 5시 이래 돼서 오거든요. 촌사람들 볼일 보고 그 배 타고 오고. 그러다가 술 마시고 놓치면 밤새도록 걸어오고 그랬거...
-
1976년 경상북도 울릉군의 천부항 부근에서 어선 만덕호가 침몰한 사고. 울릉도는 도로 사정이 열악하였다. 1963년 이후 울릉도 일주도로가 본격적으로 건설되기 시작했지만, 잦은 태풍과 폭설로 인해 일주도로는 1976년에 이르도록 부분적인 개통만 이루어졌을 뿐이었다. 특히 겨울철에 폭설이 내리면 도로가 불통이 되어 울릉도민들은 뱃길을 이용해야만 했다. 따라서 배는 규정에 넘는 물건...
-
조선 말기 일본 선박 만리환이 울릉도의 규목(槻木)[느티나무]을 반출한 사건. 1883년 동남제도개척사(東南諸島開拓使)로서 울릉도 개척의 선봉장이었던 김옥균은 1883년 6월 국왕의 위임장을 가지고 일본에 건너가서 국채를 모집하려 하였다. 그러나 묄렌도르프와 민비 수구파의 사주를 받은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郎]가 김옥균이 휴대한 고종의 국채위임장을 위조한 것이라고 본국...
-
고려 때 경상북도 울릉군을 관할한 상부 지방행정구역. 고려 995년(성종 14)에 지방 제도를 처음 실시하면서 전국을 10도로 나누었을 때 영동과 영서 일대를 포함한 현재의 강원도에 해당하는 지역에 삭방도(朔方道)를 설치하였다. 삭방도는 1036년(정종 2)에 동계(東界), 1046년(문종 원년)에 동북면(東北面)으로 불렸다. 1178년(명종 8)에 삭방도를 폐하고 함경도와 강릉...
-
“초등학교 4학년 때 학교 때문에 대구에 나가있다가 1984년에 귀향했어요. 81년도 포항에서 연애결혼 했죠. 저가 여 오기 전까지는 스무 몇 살까지 거기 살다보니 친구가 한둘이 아니잖아요. 놀다보니 만났죠. 제대를 하고 들어오니까 어른이 계셨는데, 마 가기 싫더라고 그러다가 주저 앉은 기 고향을 지키고 있어. 여 처음와가 다 좋아합니다, 살면 답답다 이거지. 처음에는 공기 좋고...
-
1948년과 1952년에 미국 공군 폭격대가 독도를 폭격한 사건. 해방 후 울릉도 및 강원도 어민들은 삶의 터전인 독도와 그 주변 해역에서 어로활동을 하였다. 그런데 미국은 대일 강화조약 이후 독도를 미국의 폭격 연습장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미군정은 이 사실을 주민들에게 전혀 알리지 않아, 결국 조업 중이던 한국 어민들은 미 공군의 독도 폭격 연습으로 인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
-
“4월말이면 어촌계 공동 사업이 끝이 납니다. 자원관계상 그때부턴 모든 어폐물은 잡지 않지요. 통상적으로 1월에 시작했는데 2월로 늦추었어요. 공동작업 하는 기간은 짧아지고 있고. 어촌계에서는 일찍 해가(작업을 해서) 많이 잡아도, 그 이듬해에 없을 거 아입니까. 그래서 자원관계상 덜 잡고 내년에 잡자는 취지로, 4월말 끝내고 나면 3~4일 쉬고, 바다청소를 합니다, 한 열흘간....
-
"여 전부 논농사 지었는데, 근데 바람 한 번씩 불어버리면 나락 다 떨어져 버리고, 동남풍이 불면 이 마을을 쓸어버리는 기라. 요새는 그런 농사를 안 지으니 농작물 피해는 없는데. 동남풍이 부는 시기는 3~4월, 그리고 9월초 주기적으로 불어요. 모내기 해놓고 한참 꽃 필 때 흔들어버리고, 고개 숙이고 있을때 서풍이 불어가 나락이 다 떨어져 버렸어요. 논이 많았어요. 나도 여서 벌...
-
“바닷가에는 아들 안 데려가요. 내가 수산업을 해도 바닷가에 데려다 놓으면 또 수산업을 할까봐서 전부 바다도 없는 대구에 갔다 놨어요. 애들 다섯을 다 거 델구 나갔어요. 중학교 1학년, 초등학교 졸업하고, 5학년, 1~2학년 때 데리고 나갔어요. 아들 다 대구 데리고 나가가 나무 집에 세 얻어가 사니 돈이 무진장 들어가는 기라. 대학 들어가니 이거는 배 안 했으면 공부도 못 시켰...
-
“겨울철은 모든 조건을 봐가 도동은 따시고, 남향 쪽이다 보니깐 사람이 많이 몰렸고. 여는 추우니까 북면 천부·태하·현포 이런데 춥잖아요. 사람들이 적게 살고 겨울철에 배라던가, 다니기 힘들고. 남향은 좀 낫습니다. 인구가 따시한 걸 찾다 보니깐 이쪽으로 오는 수가 적지요. 울릉군청이 겨울에 북서풍 계절풍에 못 견디고 춥고 이러다 보니깐 도동으로 넘어가 버렸거든요.”...
-
“어촌계 외의 마을 조직으로 발전협의회라고 있습니다. 제가 겸직하고 있는데, 그거는 해상공원하고 내수전·섬목·저동간 도로관계 협의체입니다. 협의회 회원은 전 주민 대상입니다. 35명(천부1리)이네요. 회의는 어업인 복지회관에서 합니다. 집중적으로는 해상공원 개발이죠. 저기라도 해놓으면 버스라도 안대주겠나 이거죠. 실제 나리동(나리분지) 갔다가 여 대면 볼 거라도 있어야 관광객들이...
-
“원산서 배 만드는 공장에서 일을 배웠어. 거서 내가 기술을 배웠는 기라. 훈련도 받고 도면치는 것도 배우고 학과 공부도 하고. 그러다 해방 되던 해에 3월에 해군에 지원을 하라 하더라고. 그래서 부모도 못 보겠다, 싶어 사장에게 간다는 말도 안 하고 울릉도로 도망 왔지. 그러다 해방 되고 포항 나가가 거서 공장 다니다가, 지금 일 하다가, 여 뭐 또 돈벌이가 좋다 해서 다시 들어...
-
“우리가 그 전에는 농토가 많았어. 배 사업하면서 그때 오징어 잡아들루면 배가 요런데도 대학교 공부시키고 먹고 살고 그랬지. 배 한 척 있는 거. 배도 타보고 오징어도 잡아보고. 잡아오기나 말기나 물에는 댕겼어요. (웃음) 범선도 가지고 있었고, 기계배도 있었고 좀 있었어. 그때 천부에 선주들이 많이 있었어요. 그때 뭐 40호 가까이. 그리고 농사는 농사대로 짓고……. 그때 배 가...
-
“우리 주민 전체 도서민들은 5천 원씩 내고 나머지는 정부에서 지원 받아서 가는데, 육지손님들은 돈이 상당히 많이 듭니다. 서해도 섬에서 섬으로 가는 건 또 혜택이 없어요. 섬에서 뭍에 가는 거만 혜택이 있고. 지금 그것도 전라도 남해 이런 데는 난리라 하대요. 난리인데 또 그래 끊어 버리면 너무 많으니까요. 섬이 너무 많잖아요. 혜택 못 주고, 일단 섬에서 뭍에 가는 것만 왔다...
-
“우리가 어릴 때는 여기서 생활필수품 같은 것은 오징어배 타고 도동 가가 구입했어요. 나무도 도동에서 땔 거 없으면 우리가 장작을 해가 싣고 가고, 전부 배로 가져가고 가져오고 했어요. 당시에 전부 나무 땠어요. 나무를 많이 베서 나무를 그땐 땔감으로 사용하고 나선으로 많이 가져가고, 일본 사람도 많이 가져가고……. 가을철 되면 겨울나무 한다고 산에 가가 좋은 나무들 베기 좋은 나...
-
“울릉도는 그 당시 항구시설이 안 돼 있었어요. 그래가 배를 전부 뭍으로 올렸어요. 저동항도 그 당시 안돼 있었어요. 처음에 올릴 때는 ‘마깨’라고 통나무에 와이어를 걸고 거기에 구멍을 2개 뚫어가 나무대를 대가, 사람들이 10여명이 돌린다고. 그게 조금 발달되어가, 동기라고, 배 기관실 옆에 도는 축을 만들어가, 뭍에는 중심축을 놓고 배에서 감으면 올라간다고. 그렇게 조금 발달되...
-
“울릉도 주민들은 배를 진수하면 꼭 이곳에 와서 진수식을 올리고 무사한 뱃길이 되기를 기원을 해요. 어떻게 말이 거론 되었는지 성하신당은 사당 자체가 울릉도 수호사당이고 어업에 대해서 울릉도로 오가는 배 선주들은 다 제사 지내거든요. 또 신주선도 그렇고 배 사는 사람도 미신 믿는 사람들 와서 돼지머리 혹은 돼지 한 마리 갖고 와서 잔치하고, 연례행사보다는 배를 하나 몰고 와서 제...
-
“해방되고 중학교가 창설되었는데, 거 학교 가고 싶어가, 집에서는 월사금 뭐 이런 거 낼 형편이 안 돼가, 몰래 가가 합격통지 받았어. 입학금이 300원, 월사금이 50원이었어요. 그것도 못해갔고 외삼촌네 갔더니 학교 월사금은 대주겠다 해가 학교 다녔는데, 죽을 먹고. 도동에서 학교 기숙사에 있었는데, 그때 집이 하도 어려워 집에 왔다 가라해가 왔는데, 형님이 아라비아에서 전염병을...
-
“67, 8년도 배 만들 당시 그때는 목선이었어요. 지금은 FRP인데, 3척을 지어가 2척은 팔고. 지금은 배 한대 가지고 있어요. 오징어잡이 하는 데도 어가도 비싸고 비용도 많이 들고 그러죠. 기름값도 계속 올라가고……. 전에 우리 배 같은 경우는 18~20명씩 타고 했는데. 내가 먼저 시도를 해가 일본서 하마데회사, 자동조산기그거로 해가, 그게 울릉도 다 퍼져가, 지금은 한 2...
-
“우리 동네는요 들어오시면, 예쁘지 않아요? 저희는 사례금도 없는 곳이에요. 돈이 나오지도 않는 곳이거든요. 처음 여기를 답사를 하고 너무 예쁜 거에요. 저희 사택의 마루에 앉아 있으면, 바다가 병풍처럼 펼쳐져 있어요. 배를 탄 듯해요. 저희도 여기 올 줄은 꿈에도 몰랐죠. 해도 떴다가 순식간에 내려가고 노을이 진짜 좋아, 노을 멋있어. 마루에서 저기 바다 한번 보세요. 얼마나 멋...
-
“어촌계에서 하는 것은 음력 3월 풍어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보름에 안 하고요. 현포에서는 보름날 풍어제 대신 보름제를 올립니다. 보름날 해신제와 동제를 같이합니다. 우리는 여 웃대 어른들 보면 동제가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올라가다보면 테니스장 옆에 거 하나 있습니다. 거가 우리 동제 지내는 자리인데. 자연스럽게 전에 굿하고 불교 다니던 사람이 주관했는데……. 지금 종교가 대부분...
-
“예전엔 약 40호 정도 살았는데, 지금은 이곳에 다섯 집, 저 위에 일곱 집, 한 집에 한두 명, 겨우 이십 명 정도밖에 안 됩니다. 예전의 한 가정밖에 안 될 정도이죠. 예전엔 마을이 아담하고 좋았는데, 60년 중반에서 70년대 사람이 많이 살았고요. 지금 내가 나이가 제일 적은데 대부분 70 이상이죠. 한번 나가면 안 들어오니 마을에 빈 집이 생기고 외지인의 소유토지가 증가하...
-
“예선창에 내린 저희 고조부께서도 산을 거슬러 올라가 지금의 본천부에 정착하셨죠. 저희 고조부께서 경주 입실에서 농사를 줄곧 지으셨으니 울릉도에 들어오셔서 바닷가에 살 수는 없었겠죠. 그래서 산중턱에 양지바르고 바람이 잦아드는 안온한 이곳 ‘천부’에 정착해 농사를 짓게 된 거죠. 그때부터 지금까지 농업이 주로 생업이었죠. 저야 농한기일 때 간혹 목수 일을 하기도 하지만……. 후에...
-
“뭐 여는 볼거리도 없고 앉아가 놀 공간도 안 되잖아요. 내년도 해양수산부 자율지정업체 해가지고 2억 자금을 받아놓았는데, 저쪽(해상공원)에다 투자를 할 예정입니다. 우리가 저쪽에 투자하는 것은 주민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투자하는 거지. 직접적으로 어촌계에서는 도움이 안 되죠. 여름철에 관광이 활성화되고 해수욕하는 사람이 많아진다면, 뭐가 없어져도 없어지지만 동네 전체를 본다고 하면...
-
성인봉에서 북쪽 복 받고 태어난 울릉도에 천복을 받은 북면 여름은 여성같이 치마폭 펼친 바다 겨울은 남성다워 노도를 타고 한풍이 괴성을 치고 그러나 봄 편지 받으면 남자답게 떠납니다. 하늘의 보호로 천부라 부르고 추산 을 가리켜 하늘봉이라 함은 말세에 천부를 구하려고 줄걸이 구멍을 뚫어 코끼리도 살려달라 구멍을 보였네. 하늘은 하늘마을인 천부를 걱정...
-
“당시 술도가 있는 집은 부자고. 아버지가 4형제 였어. 원래 나리동 구방에 밭이 있었는데 비만 오면 물이 채서 그 땅을 팔아버렸어. 그때 돈 5만원 주고 팔아버렸어. 땅하고 산하고 임야 대지 전부 한 덩어리로……. 저기 북중학교 운동장 터, 거 원래 우리 땅인데 운동장이 비좁아서 정환이 아버지인 큰 형님이 땅을 학교에 희사했어. 학교를 저쪽 현포서 땡겨간다 했거든. 큰 형님이 ‘...
-
“울릉도 매이라고 있는데, 새순 돋아나는 것을 채취한 것을 뿔매이라 합니다. 날 때는 생긴 모양이 꼭 뿔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죠. 그라고 요새는 잎매이라 해가 잎이 핀 것을 말합니다. 오늘도 산나물 하러 갔다 왔는데요. 우리 집사람이랑 둘이서 가면 한 20만원 법니다. 매이가 좋아요. 우리도 먹으니 좋더라고. 물김치, 김치, 지 담궈가 삼겹살 먹을 때 먹고, 반찬으로도 먹고,...
-
1948년 12월 독도에 관한 최초의 본격적인 학술 논문이 실린 잡지. 조선사연구회(朝鮮史硏究會)에서는 『사해(史海)』의 창간을 통해 ‘억조조선(億兆祖先)의 정신탑(精神塔)’을 담아내고자 ‘사학계 일류 필진을 편성’하여 ‘조선사 연구 논문 발표’를 표방하였다. 1948년 8월 15일은 미군정이 끝나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던 해였기 때문에 조선사연구회는 그러한 분위기에 고무되어 『...
-
천부에 정착한 개척민들은 처음에 본천부, 혹은 나리동 등의 산중에 터를 잡았고, 점차 해안가로 내려온 것으로 개척민들의 후손들은 증언하고 있다. “나리동에 개척 당시에 180세대 정도 살았어요. 바닷가에 사는 것들은 아랫것들 하며…….(웃음) 그때 뭐 동학난이가 뭐 그라고 어떤 사람들은 여 뭐 자기가 띠지면(경작하면) 다 자기 땅이다 해가 온 사람도 있고. 우리 할아버지...
-
“어릴 적에 조부, 조모, 증조모까지 함께 이 집에서 살았죠. 할머니는 80살 정도에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제가 중학교 1학년 때 사고로 돌아가셨어요. 면사무소 다니다가 나오셔서 사설 우체국한다고 하다가 사고로 돌아가셔서 그것을 하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넘겼죠. 누나 셋, 동생 있고. 할아버지 모시고 살아야 할 처지에 삼촌들은 외지에 가 있어서……. 중학교 나와 할 만한 일이...
-
“그 옛날에 소를 집집이 다 먹였어요. 풀을 베서 철사에 묶어 아래로 내려 보냈어요. 강철로 만들었어. 몇 군데 있는데 있었어. 찻길이 없으니 일일이 지고 올 수 없어서 그렇게 한 거야.”...
-
“태하령은 지금 거기로 못 갑니다. 작년 재작년 수해 때문에. 태하동은 길이 이제 보수 다 되었는데, 내가 올라가보니까 정상까지 다 됐어요. 그 넘어 구암 내려가는 길이 안 됐다고 그러더라고요. 안 됐다 그러는데 갤로퍼나 이런 차나 산불차는 다니거든요. 일반차는 못 다니고. 산막터널 생기기 전에는 그 길로 다녔는데. 그게 구불구불해서 아리랑 고개라 이름 지어가 다녔죠....
-
“왜놈들이 와가 여 어업이 개척되었어. 오징어·상어·고등어·한치를 잡았지. 그때만 하더라도 배 하나만 하더라도 괜찮았어. 고등어는 주낙으로 많이 잡고. 정어리를 잡아가 염장을 해두었다가, 고등어 미끼로 쓰고 그랬죠. 그래 차츰차츰 가다 누에 먹이고. 울릉도 누에 많이 쳤습니다. 그 다음에 산채. 누에는 춘잠 추잠 일 년에 두 번 하는데, 누에 없어진 지가……. 박통시대 많이 했고....
-
“저 위에 서달 골짜기 안으로 가면, 와사비골이라고 하는데. 일본 사람이 고추냉이를 여서 재배를 했어요.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많았어요. 논 같이 이래가 온도가 18도 이하로 해야 산다고 하더라고. 손바닥만한 돌을 밑에 놓아두면 자연적으로 커져요.”...
-
“그 당시 서울에서는 회사 생활했어요. 미광산업이라고 미아리 삼거리에 위치한 염색 나염공장이었죠. 처음에 회사 들어가가 통장을 만들고 도장을 돌로가 뿌셨어요. 넣기만 하지 안 찾는다. 그때만 하더라고 몇 년 만에 알뜰이 모아 한 50만원 모았죠. 그랬는데 친구, 북면 석포리 부잣집 아들이 사업한다고 해서, 부잣집 아들이라고 믿고 빌려주었죠. 근데 임마가 부도를 내버렸어요. 결국은...
-
“저는 여기서 나서 여기서 삽니다. 선대는 우리 어른들은 강원도에서 오셨는데. 지금 24살 5살 때 울 아버지 돌아가셨는데. 그 어른들에 대해서는 잘 몰라요. 재적부를 들춰보면. 할아버지 이름만 있지. 강원도에서 왔다는 말은 없거든요. 산소가 바로 여기 있어요. 산소 쓴지가 70, 80년 되거든요. 족보를 한번 보니까 옛날 한문 잘 모르지만 두루마리 편지도 있고. 태하군청에 온 사...
-
천부는 풍수적으로 성인봉의 기가 뻗어 내려온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곳에 뿌리를 내린 개척민들의 자손들은 번창하고 경제적으로도 풍요로웠다고 한다. 그러나 땅의 기운에 따라 울릉도 개척은 서·북쪽에서 시작되어 동쪽으로 이동해 왔다고 한다. 오늘날 천부는 상당히 낙후되어 있는 반면, 도동이 번창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믿는다. 천부 개척민의 후손들이 도동 지역으로 많...
-
“올해는 4월17일 날 제사를 지냅니다. 그 날이 3월 초하루거든요. 한 열흘 남았네. 그러면 그날 제사 지낼 때 성하신당 제사 지내고, 해신당 지내고, 초등학교 뒤에 천제당 지내고. 이규원 사적비 뒤에 보면 있습니다. 천제당이라고 있어요. 원래는 서달영에 법화당이라고 있었어요. 우리 어릴 때까지 사당은 있었는데 관리를 안 하다보니까 풍우에 다 찢겨서 터만 남았는데, 다...
-
성하신당 에는 좌측에 ‘성하지남신위(聖霞之男神位)’, 우측에 ‘성하지여신위(聖霞之女神位)’라고 한 바와 같이 동남동녀의 신위를 모시고 있다. 성하신당 에 동남동녀를 모시게 된 연유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내려 온다. “조선 초기 태종 17년 조정에서는 안무사 김인우를 보내 울릉도 주민들을 육지로 이주시키게 하였다. 섬 사람들을 모두...
-
“요번에도 우리가 동네 안에 식구들도 자꾸 주니깐, 회관에서 모여가 공동세배로 우리가 하자고 했지만, 우선 동네가 있으니깐, 동네안의 어촌계가 나서가 하는 기 보기 안 좋다 해서 못 했지만, 해보고 싶고, 그리고 세배문화도 어릴 때지 요즘 50~60먹고 70~80 어른한테 가서 세배하는 것도 지났잖아요. 그래가 며칠 지나면 길가서 만나면 인사하고 그라죠.”...
-
조선 전기 울릉도 거주민을 본토로 이주시킨 정책. 고려 말기에서 조선 초기에는 울릉도에 주민이 거주하면 울릉도를 침입한 왜구가 이곳을 근거지로 하여 강원도 등을 침구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또한 당시에는 울릉도는 육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울릉도에 들어간 어민들로부터 조세 수취와 역역 동원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실정이었다. 조선 초기 연근해 개발이 이루어지면서 왜구 등에...
-
“내가 처음 15살 먹고 와가 이 동네에서 제일 가난한 사람 중에 속했어요. 부친은 그때 만주가고 없고. 모친하고 3남매 4명이 들어왔는데. 어디가가 일할 데가 있는교. 어리다고 일을 시켜주는교. 품도 못 팔지. 집이 있는 기도(것도), 토지가 있는 기도 아니고. 이래가 와가지고 나무 곁방에서 살고. 내가 장가 갈 때도 나무(다른 사람) 곁방에서 장가갔어요. 그래그래하다가 16살...
-
“중학교 졸업하고 난 후에는 포항에 진학했지요. 포항공고, 지금 제철고등학교죠. 거기 1학년 편입했다가 그래가지고 좀 농띠 좀 지겼어요. 조금 다니다가 학교 그만두고 그만뒀어요. 그만 두고 집에 와서 놀다가, 계속 놀다가 어업에 종사해가 조금 배우고 하다가 바로 군대 갔다가 직장 생활하다가, 그래가 계속 수산업 하다가 수산업 놓은 지가 지금 4년, 5년 됐어요. 군대생활, 3사관학...
-
삼척영장 등 조선 후기 울릉도를 수토하러 온 관리와 검찰사 등은 이곳 태하로 주로 들어왔다. 그 흔적이 각석문으로 남아 있다. 바로 태하리의 각석문과 1936년 도동항 수축공사지에서 발견된 각석을 들 수 있다. 앞의 각석문은 영조 11년(1735)에 수토관 삼척영장 구억(具億) 군관(軍官) 최린(崔燐) 왜학(倭學) 김선의(金善義)가 순찰한 기록이고, 뒤의 각석문에는 수토관인 절충장...
-
조선 후기 울릉도에 거주를 금하고 관리를 파견하여 주기적으로 순찰하도록 한 정책. 1693년(숙종 19) 울릉도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안용복(安龍福) 등 동래와 울산 어부 40명이 울릉도에 출어한 일본 어부와 충돌하였다. 그 과정에서 안용복 등은 일본 어부들에 의해 오키시마[隱岐島]으로 납치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안용복은 두 차례에 걸쳐 일본에 들어가 울릉도와 자산도(子山島)[현...
-
“어촌계 설립에 관한 자료가 없어서 정확한 설립연대를 알 수 없어요. 60년대에 들어와서 만들어진 것은 확실한데. 어촌계 족보를 만들자고 하긴 했는데, 자료가 없어 못 만들었어요.” “여기 지금 어촌계 조합원 72명, 어촌계원 50명으로 분할되어 있습니다. 왜 분할되어 있냐면, 수협 조합원이 되면 어촌계원이 될 수 있지만 출자를 하는데 어촌계원 개인별로 출자를 맞춰야 합니다. 조합...
-
“이 마을은 현재 18가구입니다. 여 동네는 연변이라고 해요. 연변 주변의 가구는 빈 집 많이 보이죠? 지금 다섯 가구가 살고 있어요. 정말 겨울에는 외롭죠. 겨울 같은 경우는 인적이 드물기 때문에 개를 키우고 있어요. 여기 사람들은 개는 식용 이상으로는 생각하지 않아 잡아먹으라고 해요. 우리는 그것이 아니라 기척 때문에 개를 키워요. 혼자 있으면 무서울 때가 있어요. 우리가 나중...
-
“육지는 뭘 사면 끼워 주고 이런 거 있잖아요. 우유도 몇 개 이렇게 여기는 어제도 애기가 우유를 먹고싶어 해서 우유 하나 샀는데 날짜가 오늘이면 오늘까지예요. ‘아, 마 사가소’ 그래요. 우리는 육지개념에서는 안 사가잖아요. 여는 사가야 돼.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애기는 먹고 싶은데. 그리고 끼워주고 하는 것 없어요. 물가가 비싸니까 기름값이 남면만 해도 24만4천원. 우리는...
-
“큰 애는 서른일곱인데 영국에서 환경심리 전공하고 있어요. 딸은 결혼해가 살고 있어요. 남매만 낳아가 키웠죠. 저는 그때 유지하고 다니다보니 돈이 없고 해서 위에 애를 수도공고 보낼려고 했어요. 그때 내가 면장이었죠. 큰 애를 포항 대동고로 보냈어요. 딸은 포항동지여상을 보냈고. 그리고 큰애가 외대를 갔는데 처음에는 떨어졌는데, 그러다가 아랍어과에 갔어. 아랍어과에서도 열심히 하면...
-
“아래채는 안영학씨가 운영중인 민박 지정집으로, 집이 깨끗해요. 일본식으로 지었어요. 벽도 흙이라요. 전부 대를 넣어가 흙으로 집을 지었어요. 한 50년 가까이 되었어요. 내가 중학교 1~2학년 때 지었으니, 49년쯤. 울릉도에서 최고 좋게 지었죠. 민박은 한 2만원씩 받아요. 방이 세 개. 손님들 뭐 이까지 옵니까? 요즘은 소개받아가 가끔씩 오기는 하지. 오는 사람들은 좋아하더라...
-
“자꾸 이 동네 사람들이 줄어들어서. 어떻게든지 인구를 유입할 수 있는 그런 게 있어야 하는데……. 그런 아마, 관광계획을 해서라도 자꾸 끌어들이는 것을 만들어야……. 위에 학교터에다가 이규원 감찰사, 그리고 사택 옆에 팬션을 짓는다는데, 모르겠어요. 너무 가파른데 어떡할려나. 요기 학교에서부터 교회 앞으로 해서 사택 넘어가면 해신당 가는 길이 있는데, 요길 아마 길을 낼 거 같고...
-
“양조장 할 때 곡식은 다 들여왔어. 울릉도야 식량 자급율이 30% 정도도 안 되니. 식량을 가마니 쌀로 들여왔어. 연락선 요즘 같으면 목선 안에 짐칸 안에 사람도 타고 24시간씩, 이래 걸려요, 포항서 울릉도 들어오는데. 겨울철 배가 오래 끊기기도 하니까 집에 식량을 많이 주문해요. 쌀을 한 백 포씩 그때는 막 배로 싣고 오면 그때는 리어커도 없었고, 전부 짊어지고 그랬지. 보통...
-
"이 교회는 술 만드는 공장이었데요. 여기 학포에는 한 100가구 이상 살았는데, 배타고 해서 돈은 많이 벌고 하니, 술은 엄청……. 그런데 선교사님이 오셔서 이것을 샀어요. 술 만드는 공장 두 칸은 구입하셔서 교회로 만들었어요. 아주 초창기에 들어오셨는데. 울릉도는 침례교회가 18개소 있습니다. 여기서 5, 6살 때부터 다녔던 권사님도 나오고 계세요. 여기는 애들의 좋은 놀이터에...
-
“처음엔 여 안 살고. 산 데가 여기서 한 3㎞정도 될 기라. 산중이라. 아들 4형제 고모가 4명 우리 아부지 형제가 8남매지 그래가 십몇 년 되니 연락선도 다니고. 내 13살 때 아부지 47살 때 그때도 저 산중에 살았었지. 삼촌이 부산에서 약국을 했는데, 비자가 들어간 탕약을 지어가 온 것을 아부지가 잡수시고 그길로 설사가 나는 기라. 그래가 이웃집의 아편을 잡수셨어. 그게 비...
-
“일곱 살 때, 울릉도에 들어와가 바로 천주교 나갔습니다. 왜 나갔냐 하면, 뭐 교나 알고 갔습니까? 살기 어려울 때니까 미국에서 원조 받아서 가져온 옷 같은 거, 사탕 같은 거, 빵 같은 거, 우유, 이런 것들을 천주교에서 선물로 많이 가져와요. 천주교에서 제일 많이 가져와요. 천주교에서 많이 노나 주는 기라요. 그거 얻으러 애들이 천주교 나간거지. 그래가 천주교 가서 세례를 받...
-
“어촌계 수익사업은 해삼, 소라, 전복, 문어 등을 하고 있어요. 수익은 보통 1억에서 1억 2천입니다. 2006년도에 1억 2천, 2005년도에 1억 5백, 2004년도에 9천8백. 통상적으로 9천에서 1억 2천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거는 작업 날짜 때문에, 보통 15일에서 20일 정도로 보면 됩니다. 그해 그해 물동량 봐가 작업이 종료됩니다. 그리고 수익이 어느 정도, 일 년...
-
“저는 논농사를 안 지어 봤지만, 울릉도에서는 여 동네가 평야가 제일 컷다고 그러더라고. 예전에는 정미소도 있고 그랬는데……. 요 올라가면 대건 냉동공장 있지요. 여 옆에 길이 하나 있고, 여 스라브집이 하나 있어요. 거기가 정미소였어요. 당시 이모작 했다고. 그때는 소로가 써리질하고 그랬는데. 울릉도는 바람이 세가 논농사가 힘들더라고. 요즘은 비료, 농약이 있지만, 그때는 뭐……...
-
선사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경상북도 울릉군의 역사. 울릉도의 경우 일제강점기인 1917년 도리이 류조[鳥居龍藏]에 의해 처음 유물의 채집이 있은 이후 후지타 료사쿠[藤田亮策] 등의 조사가 있었다. 해방 후 국립박물관에 의해 울릉도의 고고학적 조사가 실시되었다. 1947년과 1957년에 김원룡 등에 의해 체계적인 조사가 이루어졌고, 1963년에 김정기에 의해 보충 조사가 실시되어...
-
울릉도에 개척선이 와 닿은 항구를 ‘예선창’이라고 하는데, 이곳이 지금의 천부(天府)이다. 개척민들은 처음에 산중턱에 터를 잡고 농사를 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저희 고조부께서도 이곳을 통해 울릉도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섬이라서 이곳에 정착하면 되지 않겠냐고 하겠지만, 개척민들은 대부분 본토에서 농업을 했고, 또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어업을 천시하는 사회였으므로, 이곳에...
-
"울릉도, 그리고 태하에는 기독교가 일찍 들어왔어요. 교인은 서달은 100%입니다. 천부 같은 경우는 95%이고. 서달침례교회가 100년이 조금 넘었어요. 여기는 기독교문화가 빨리 정착이 되었습니다. 여기는 2대 3대 믿고 있어요. 그래서 산왕각과 같은 곳은 관심의 대상이 아니게 되었어요. 지금도 교회는 존립하지만, 잘되라고 풍어 예배를 드리고 있어요. 얼마 전에 풍어 예배를 드렸...
-
“예전에 정말 눈이 많이 왔어요, 올해는 거의 안 왔지만. 눈 많이 왔을 때 이웃집도 잘 못 갔지. 그라면 계획적으로 눈을 치고. 나리분지는 눈을 다 칠 수가 없어가 구멍을 이쪽 방에서 사랑방, 그때는 사랑채가 있었잖습니까. 사랑채까지는 구멍을 뚫어가 가고 암굴 숫굴이라 불렀지. 안방으로 가는 구멍은 암굴이고 사랑채로 가는 구멍은 숫굴이지.(웃음) 그리고 천부는 눈이 많이 와도 빨...
-
“그 옛날엔 도동항에서 출발하여 배가 포구마다 다녔어. 풍랑이 심하면 배가 자주 끊어져 고립될 수밖에 없었지. 1918년에 폭 1~2m, 연장 59km의 불완전하지만 일주도로가 구축되어 이용했지만 여러 차례의 폭풍, 폭우로 끊기고 노폭이 협소해서 1940년에 보수해 사용했었어. 그게 1959년 9월의 사라호 태풍으로 인해 해안선 도로는 형체조차 없어졌지. 산 넘어 가는 옛길이 있었...
-
“어촌계는 육지의 어촌계원이 울릉도랑 좀 차이 나는 게. 여기는 오징어가 주 생산이거든요. 전에는 꽁치라던가 명태 이런 걸 잡았을 때는 그나마 나았는데, 지금은 다른 건 다 안 되고. 그물 고기도 없고 단 오징어가 주 생산인데. 어촌계원도 원래는 만 60세 이상 물에 다녀야만 어촌계 자격을 줬거든요. 조합원하고는 다릅니다. 조합원은 수협에서 들어가면 조합원이 될 수 있지만. 지금...
-
“처음에 울릉도 오니깐, 카보나이트 그거 하루저녁 쓸 만큼 주먹덩어리 같은 덩어리씩 넣어가가, 그걸 물로 똑똑 떨어지도록 하면, 그게 녹으면서 나오는 가스에 불을 붙여가 했죠. 그기 약간 하면 깨지고 그래가 불편하고 했는데, 그래 하다가, 6·25사변이 딱 일어나가, 바다에서는 불을 못 켜잖아요. 불만 켰다하면 폭격 했부는데. 그래가 수박등 요만한 거 가져 다니면서……. 그때만 하...
-
“우리는 오징어 배가 있습니다. 오징어잡이는 시절이 자꾸 늦어지고 있습니다. 제가 초창기에 배를 할 때는 6월에 조업이 시작이 됐습니다. 지금 울릉도에서는 통상적으로는 추석 전후로 시작이 된다고 보면 됩니다. 몇 개월씩 늦어지고 있습니다. 추석 전후에서 2월 달까지 합니다.” “어민들도 가끔 이런 이야기들 하는데……. 십년 전만 하더라고 배가 소형 어선이고, 활어라는 게 없었잖아요...
-
경상북도 울릉군에 있던 고대의 해상 왕국. 우산국은 『삼국사기(三國史記)』 권3 신라본기 지증왕 13년 6월조와 같은 책 권44 열전 이사부조에 처음으로 등장하며, 이후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사료에 나오지 않다가 고려 현종조의 기록에 다시 나온다. 이와 같은 단편적인 기록만으로는 우산국 명칭의 유래를 밝힐 수 없는 실정이다. 우산국은 오래 전부터 울릉도에 토착하여 생활하던 원주민에...
-
학포의 마을 이름은 마을 뒷산이 학처럼 생겼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학의 머리 부분에 해당되는 뒷산이 무너졌기 때문에, 이 마을에는 부자가 나지 않는다고 믿는다. 광복 후 국회의원 선거가 한창일 때, 이 마을의 유권자 표를 전부 몰아 한 사람에게 던질 터이니 이 학머리를 다시 쌓아 재생시킬 수 없겠느냐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있다. 풍미녀라...
-
지금의 울릉도에 있었던 고대의 소국인 우산국과 관련하여 역사적으로 기록된 내용은 거의 없다. 246년(동천왕 20) 중국 위(魏)나라의 관구검(貫丘儉)이 고구려를 침략한 사실을 기록한 『위지(魏志)』에 “동해에 또 하나의 섬이 있으나 언어가 통하지 않는다”는 대목이 있는데 이것이 우산국을 추측할 수 있는 최초의 기록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4 신라본기 지증마립간조에 의하면,...
-
“지금은 음력으로 삼월초하루날 문화행사를 지내고 삼월삼짇날 어민들이 자기 동네에 별도로 하대요. 지금 날짜 정해진 게 올해 5해짼가 6해짼가 될 거예요, 문화제행사가. 음력으로 삼월 초하루날 지내게 되었어요. 그 전에는 동네 제사 지냈다니까. 동네제사 모실 때는 동네 돈으로 했거든요. 어촌계는 해신당하고 성하신당 두 군데를 주관하는데 제물을 댔어요. 어촌계에서는 제사 어물요. 전복...
-
1900년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에 의해 개칭된 경상북도 울릉군의 이름. 1899년 8월 울릉도에 대한 삼림 채벌권을 갖고 있었던 러시아는 일본과 대한제국에게 일본인들의 삼림 채벌에 대해 항의하였다. 그 처리 과정에서 우리 정부는 일본인들의 울릉도 침어와 삼림 채벌에 대한 항의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일본인의 철수를 요구하였다. 그 해 12월 15일 우용정(禹用鼎)을 시찰 위원에 임...
-
경상북도 울릉군에 속하는 섬. 512년(지증왕 13) 하슬라주 군주인 이사부가 우산국(宇山國)을 정벌하였다는 기사가 울릉도의 지명에 관한 최초의 언급이다. 그 후 930년(태조 13)에 우릉도(芋陵島)에서 방물을 보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후 고려 현종 때까지 우산국이란 지명 만이 보인다. 현종 때를 마지막으로 우산국이란 지명은 보이지 않고, 덕종 때 우릉성(羽陵城), 인종 때에...
-
“지금 북면에서 자랑할 수 있는 것은 내수전 옛길, 그다음에 성인봉~도동간의 옛길 걷기, 이 두 가지가 우리가 가진 가장 큰 자랑거리고……. 그다음에 볼 수 있다면, 관음도가 지금 수백 년간 잘 보존이 되어 있습니다. 섬의 부속도서가 가질 수 있는 환경이나 생태를 완벽하게 감상할 수 있는데, 접근이 안 됩니다. 그거는 아마 4~5년 내로 접근성이 갖춰질 것이고, 그러면 세계적인 어...
-
고려 때 울릉도에 대한 개척 정책의 일환으로 본토 주민의 이주를 시도한 정책. 우산국(于山國)은 930년(태조 13)에 고려에 토산물을 바쳤으나 고려 현종조 이전까지는 우산국으로 불리면서 독자적 정치 세력을 가진 국가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그후 현종 때 동북여진(東北女眞)의 침공으로 그 자립 기반이 무너짐으로써 고려 왕조의 개척 정책이 시도되고, 본토의 주민을 이주시켜 군현을 설...
-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울릉군에 설립된 어업조합. 조선을 식민지화한 일제는 조선 어업에 대해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지배를 확고히 하고자 조선해 연안 이주 어촌을 중심으로 어업 단체를 조직하여 지배 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울릉도 어업조합을 설립하였다. 울릉도 어업조합은 당시 어업 단체의 핵심 조직으로서의 구실과 기능을 담당하였다. 1911년 조선총독부는 「어업령」 공포와 더불어 어업조합과...
-
우산국 시대 울릉도에 살았던 울릉도민. 우산국(于山國)은 『삼국사기(三國史記)』권3 신라본기 지증왕 13년조와 같은 책 권44 열전 이사부조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이것은 우산국이 신라에 편입되어 멸망한 기록으로 우산국의 성립과 발전에 대해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따라서 울릉도 원주민의 출자에 대해서 알 수 없는 실정이다. 울릉도 남서동(南西洞) 고분군에서는 성혈이 새겨진 고인돌 개석...
-
“일주도로가 나기 전에는 지금 전경초소 있는 데, 바닷가로 바로 내려가도록 되어 있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백사장 같이 몽돌이 깔려 있었습니다. 거기서 수영 많이 했습니다. 추산 발전소 밑에서도 하고 그랬습니다. 저가 왔을 때 도로개설하고 옹벽을 치니깐, 이 돌이 파도에 계속 도로 쪽에 올라올 공간이 있어야 하는데. 잔돌이 다 쓸려내려가고, 요즘은 그리로 내려가는 길도 없습니다.”...
-
“여기가 원래는 울릉도의 제2 도시였어요. 경제력……, 인물도 많이 배출되었어요. 북면이 서면이나 읍 쪽보다 먼저 개척되었어요. 서당도 먼저 생기고. 천부서당은 어디 있었는지 모르지만, 우리 마을(석포)에는 서당등대라고 마을이름이 있습니다. 거기 나온 사람이 교사도 하고 기관장도 하고…….”...
-
1963년 정부에서 수립한 울릉도 개발을 위한 계획. 1962년 10월 11일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이 해군 함정 편으로 울릉도에 도착하여 다음날 울릉군청에서 군수로부터 현황 브리핑을 들었다. 이때 박정희는 울릉도민들의 섬 개발을 위한 창의성 있는 노력을 치하하고, 섬 개발을 위해 더 노력해줄 것을 당부하면서 중앙에서도 적극 도와주겠다고 약속하였다. 이로 인해 울릉도 자체 내...
-
태하1리 큰 황토구미의 산신당은 태하초등학교 서쪽 뒤편 10m 지점의 산속에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당집은 산비탈에 단칸(2.5×2.1m) 규모에 시멘트 블록조로 지은 맞배집이다. 당집 주변으로는 낮은 돌담을 둘러쌓았다. 내부에 ‘단기사이육사년임신십이월이십삼일 미시 입주상량(檀紀四二六四年壬申十二月二十三日 未時 立柱上樑)’이라는 상량문이 있어 1931년에 건립된 것을 알...
-
1883년(고종 20) 이규원이 저술한 울릉도 검찰일기. 1881년(고종 18) 울릉도 수토관(搜討官)은 일본인들이 울릉도의 규목을 몰래 베어 가는 등 울릉도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고 강원감사에게 보고하였고, 강원감사는 이 사실을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에 보고하였다. 조정에서는 일본 정부에 항의 공문을 발송하게 하는 동시에 대책 마련을 위해 부호군 이규원(李奎遠)을 울릉도검찰사로...
-
“어촌계 산하 어촌계 부녀회가 2000년에 조직되어 있습니다. 태풍이나 파도가 치고 할 때는 배를 선거하는데(배를 들어올림), 어민들 비 맞고 작업하는데 추울 때 따뜻한 커피라도 끓여줄 사람이 없었어요. 그래서 전에 돌아가신 수협장에게 요청해서 어민들에게 따뜻한 물이라도 마시도록 지원해 달라 해서 100만원 자금을 지원받아서 만들었어요. 부족한 것은 우리가 지원하고. 부녀회는 우리...
-
“울릉도에 살아보니 좋으네요. 불편한 점이라는 것은 다 아시다시피 대중문화, 의료시설, 학교, 그런 게 제일 불편하죠. 의료시설. 학교는 요즘 그래도 우수한 선생들이 들어오고 하니깐……. 요즘 뭐 문화 쪽은 대중매체가 원체 발달이 되었지 않습니까. 텔레비, 신문 많이 보지요. 바로바로 접할 수 있는데, 가장 어려운 게 의료시설. 사실 뭐 시각을 다투는데, 5분 10분 늦어서 1시간...
-
울릉군 서면 태하 1리, 큰 황토구미에 있는 성하신당은 태하초등학교 아래의 마을 한가운데 서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목조 맞배집이며, 주변으로는 담장을 둘러쌓았고, 숲이 조성되어 있다. ‘세재갑자사월이십일일 오시상량(歲在甲子四月二十一日 午時上樑)’이라는 상량문은, 1984년경에 신당을 이곳에 옮겨 증·개축하였음을 알려준다. 현판에는 ‘성하...
-
“내가 이 마을에 온 게 60년 되었어요. 태생지는 북면 송곳산 물 솟아오르는 곳에 할아버지께서 사셨고, 거서 나가, 5살 먹어가 울산 나갔다가… 울산서 15살 먹고 울릉도 들어와가 정착해가 살고 있는데……. 여가 원래 울릉군 소재지라요. 그리고 각석문……. 처음에는 고려시대 때 사람이 살다가, 그러다가 이조시대 때 왜놈들이 하도 난잡하게 해가 공도정책을 써가 섬을 비웠다가, 고종...
-
고려시대 경상북도 울릉군을 관할한 동계 소속의 지방행정구역. 고려의 군현제에서 수령이 파견된 군현은 주현(主縣)이라 하고 수령이 파견되지 않은 군현은 속현(屬縣)이라고 한다. 속현은 주현의 간접적인 지배를 받았다. 울진현은 주현으로서 울릉도를 관할하였다. 울진은 원래 고구려의 우진야현(于珍也縣)이었다가 신라에 편입되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757년(경덕왕 16)에 울진군으로 명칭이...
-
“이곳에 들어온 지는 100년이 조금 지났습니다.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께서 경주 산내에서 천부로 들어오셨어요. 웃대 할아버지 자손들이 여서 컸는 기라. 우리가 토박이지. 증조할아버지 때부터. 요위에 산소도 있습니다. 증조할아버지, 고 다음에 할아버지, 큰아버지 산소도 있고……. 정착은 본천부. 본천부는 잘 살았어요. 나리분지도 약 70호 가까이 살았다구. 해적들 오기 때문에 무서...
-
태하에는 현재 유인등대가 있다. 이 등대 아래 ‘대풍령’이라는 고개가 있다. 이 고개 밑에는 시퍼런 바다가 출렁이고 있다. 이곳에는 옛날부터 배가 많이 드나들었는데, 배를 메어두기 위해 이곳에 구멍을 뚫었다고 하며, 돛단배들이 이곳에 정박하면서 출항할 바람을 기다린다고 해서 ‘대풍령’이라고 불렀다. 이 고개에는 작은 구멍뿐만이 아니고 큰 굴이 있었는데, 이 굴이 옛날에는...
-
(1882년 4월) 27일 평해읍(平海邑)에서 10리쯤 떨어진 구산포(邱山浦)에서 바람을 기다리다가 29일에 순풍(順風)을 만나 중추원도사(中樞院都事) 심의완(沈宜琬)과 군관출신(軍官出身) 서상학(徐相鶴), 전수문장(前守門將) 고종팔(高宗八), 차비대령화원(差備待令畵員) 유연호(劉淵祜)와 사공, 격군 등 82명, 포수(砲手) 20명을 3선(船)에 나누어 싣고 당일 오전 8시쯤에 배...
-
개척령 전에 들어왔던 사람들의 후손을 만나고 싶었지만, 그들의 후손이라고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2006년 가을 관광계장 김기백의 안내로 현포에서 목수 일을 하고 있는 이춘태를 만났다. 그의 고조부 이진화가 환갑 되는 해인 1881년경에 일곱 살 난 아들 이용언을 데리고 울릉도에 들어와 천부에 정착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천부면사무소에 들러 재적부등본을 떼어보았지만...
-
“그물망이 삼중망 있고 사중망 있고 일망 있고요. 삼망 삼중망은 그물이 좀 촘촘해. 한 코에 세 개씩 이래 되어 있어요. 그거는 물에 깔아 놓으면 고기 새끼들, 종자 말려버리거든요. 그거를 못하도록 건의를 많이 했는데 인자 올해부터인가 금어제가 되어가지고 언제부터 언제까지는 그물망 뿌리지 말고 그 이상 되면 뿌리고. 고기 씨가 없어. 낚시를 하면 고기가 없어 고기를 못 잡는다, 이...
-
태하 1리 큰 황토구미 해신당은 서석태 씨 댁에서 우측으로 30m 지점의 언덕 화성암반 위에 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당집은 따로 없고, 진입로와 제단 및 담이 설치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때 일인들이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본래는 바닷가에 단을 쌓아서 제를 올렸는데, 일제강점기 때 혹은 해방 이후 현재의 자리에 계단을 만들고 단을 조성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도동에...
-
“옛날 제대하고 왔을 때는 친구들 참 많았어요. 그러다 울산, 현대 조선소 생기다보니 다 나가고 없어요. 예전에는 여 초등학교에 한 학년에 60~70명 되었는데, 요즘은 올해 입학생도 없다고 하더라고. 도동에서 분교인데. 심산소학교라고, 도동 일년 후에 생겼어요. 천부나 남양에는 초등학교가 하나도 없었는데, 도동 일 년 후에 생긴 거로 역사가 참 깊어요. 100년 넘었어요. 일제강...
-
1910년에서 1945년까지 일본에 의한 식민 통치가 지속되었던 시기의 울릉도 역사. 1910년 일본의 식민지가 된 우리나라에는 조선총독부가 설치되고, 헌병경찰제도가 처음으로 실시되었다. 울릉도의 경우 일본인 나카가와[中川]가 울도군주사로 와서 도민을 다스렸다. 1913년 4월 1일에 울릉도의 하부 행정 단위로 3개면[남면·서면·북면] 9개동[저동·도동·사동·남양동·남서동·태하동·...
-
“태하도 조건이 안 좋은 게 일주도로를 낼 때 천태종(삼도사) 이쪽으로 해서 학포를 거쳐가, 글로(그곳으로) 넘어가도록 설계하기로 했는데……. 거 뭐 또 군의원 7명도 마음이 안 맞았고, 그 당시 관군수가 하다 보니깐 굳이 신경 써서 옳게 안 했고, 요새처럼 지방자치단체장이 되면 자기 표를 의식해서 하는데, 그 당시에는 관군수가 막 눌러버린다고요. 그래 그 위에 길을 내는 거를 우...
-
“주민들이 교회 안 다녀도 어떤분 아들이 전화가 왔는데, 우리 아버님이 교회는 안 다녀도 사모님과 많이 친하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럴 수밖에 없어요. 아주 친해요. 어쩌면 자식보다 제가 더 잘 하죠, 제일 젊은 사람들이 우리들이니까. 우리가 그분들의 손발이 되어드리는 거죠. 요즘은 나물철이라서, 거의 나물 택배해달라고. 택배 많을 때는 1시간도 더 기다린다고. 어느 날 연변에 가서...
-
“어촌계에서 수심 15미터부터 해안 쪽으로는 어촌계가 허가권을 취득해가 작업합니다. 저녁 여섯 시 반에 나가가 새벽 여섯 시에 들어오죠. 그리고 하루 투입인원은 6명입니다. 잠수 1명에 선원 5명입니다. 실제 작업인원은 잠수원 1명, 선원 1명이고, 나머지 4명은 어장을 지키기 위해 나간다. 그래서 어장 지키기 위해 소비되는 비용만도 한 해에 3천만 원이다. 작업하는 배 한 대,...
-
“전에는 우리들이 행상틀을 만들어놓고 전부 나와가 행상을 미구(매고) 했는데, 인제는 차를 이용해가 화장하러 갑니다. 도동에 화장장이 있습니다. 봉고나 차에 관 넣어가 상주 따로 뒤에 따라가고. 울릉군이 정식으로 화장 인가 낸지는 5년 쯤 될 거고……. 그 전에는 화장하고 싶으면 산 밑에 가가 허가도 없이 해뿌는 거지. 행정에 가가는 매장신고해서 사망신고하고 뭐 그랬지. 한군데 하...
-
“현재 성하신당이 소문이 어찌 났던지 전국적으로 무속인들이 많이 붐벼요. 처음에 온 그 사람은 한 3년 전에 돼지 3마리 가져와서 제사 지내고 경로당 주고 동네 주고 그 익년에 돼지 한 마리 보냈더라고요. 먹으라고. 그 사람은 서울에서 왔다고 하더라고요. 여하튼 무속인들이 작년에도 전국 무속인들이 다 왔다 갔어요. 백몇십 명이 되더라고요. 그냥 자기 날 맞춰서 우예(어떻게) 알고...
-
“오징어가 다른 데보다는 건조법이 좋아요. 왜냐면 바람이 세서 오징어를 잘 말릴 수 있는 조건이 되죠. 그런 것에 대조적으로는 울릉군청이 겨울에 북서풍 계절풍에 못 견디고 춥고 이러다 보니깐 도동으로 넘어가 버렸거든요. 그게 우리가 생각하기로 오징어 건조와 바꾼 격인 거라요. 근데 오징어는 전국적으로 태하가 제일 알아주거든요.”...
-
“아, 그거는 제가 어촌계장할 때 판을 만들어 붙였는데 치패사업을 하다보니까 아무나 들어가지 말라고……. 따고 그러면, 정부에서 지원 받아가 한 게 안 되잖아요. 지금은 유효기간이 지나가 버려가, 떼도 되는데 그냥 놔뒀어요. 군에서 각 어촌계마다 돌아가면서 보조가 1,500만 원 나오거든요. 어촌계에서 삼분의 일 더해가 2,000만원 3,000만원씩 해서 방류시켜 놓았다가, 전복...
-
태하 1리에서 일주도로를 타고 학포마을로 진입하는 지하도로 내려가기 전 200m 지점의 왼편 계곡 옆에 위치하고 있다. 당집은 계곡 가파른 산비탈에 2단으로 석축을 쌓아 평탄지를 조성한 다음 상단에 단칸(2.9×2.7m) 규모의 목조집을 서향으로 앉혔다. 석축의 상·하단 중앙에는 돌계단을 만들어 오르내리기 쉽도록 하였다. 벽체는 네모기둥에 판자로 마감하였는데, 정면을 제...
-
“1937년생이고, 울릉도 석포에서 출생했어요. 석포초등학교 댕겼어요. 그 당시 석포가 100호 정도 살았어요. 당시 6학급이 다 있었어요. 제가 2회인데 졸업생이 24명이나 되었어요. 지금은 없어졌뿌고. 그 당시 석포가 와다리 분교를 가지고 있었고, 천부 여기 국민학교가 학생수 많았어요. 근데 지금은 이렇게……. 북면에는 중학교가 없고 고등공민학교라고 있었는데 현재 북...
-
“음력으로 전에는 동네에 제사 지내는 날짜를 바꾸기 전에는 음력으로 정월보름날하고 삼월삼짇날 새벽에 제사 지냈어요. 정월보름은 동제를 모셔요. 태하동 같은 경우에는 저위에 이규원 사적비(광서명각석문) 있는데 그곳에 천제당이 있고, 초등학교 뒤에 산신당 있어요. 거기는 동네 제사를 정월보름날 지내고, 성하신당하고 여 해신당이라고 있어요. 거기는 삼월삼짇날 어민들이 지내는데 지금은 인...
-
“우리 아버지가 선대 여 앞에 양조장 및 어업을 했어요. 하다가 막걸리도 잘 안되고 해서 치우고, 어업을 했어요. 유지인데, 아버지가 성격이 와일드해가 내가 군대 있을 때, 오징어잡이 2년 해가 돈을 다 띠어 버렸다니깐. 10원도 못 받고, 그래가 가정형편이 어려워 졌어요. 1년 사업해가 모아뒀다가 써야 되는데 그것을 한 푼도 못 받았으니, 그게 엄청났어요. 집이 어려워져서 어쩔...
-
1392년에서 1910년까지 조선왕조가 지속되었던 시기의 울릉도 역사. 울릉도는 고려 말 왜구 때문에 무인도가 되었으나, 조선 초 이래 육지의 백성들이 계속 건너가 살았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강원도 울진현(蔚珍縣)에 소속되었지만, 이곳이 왜구의 거점이 된다고 하여 조선 전기에는 쇄환정책(刷還政策), 조선 후기에는 수토정책(搜討政策)을 시행하였다. 그리하여 본토로부터 울릉도에 들어간...
-
1917년 울릉도를 조사한 도리이 류우조는 ‘조선인이 사는 곳은 주로 골짜기의 상류, 혹은 산의 매우 높은 곳이며, 나무를 불태워 없애고 화전농사를 짓고 있다. 어업이라는 일은 최근에 하기 시작하였으며, 주민의 생업은 주로 농업이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반해 ‘일본인의 경우 농업을 하는 일본인은 적으며 그들은 해안에 집이 있으며, 오징어잡이를 하고 있다.’고 하였다....
-
1696년 일본 어민이 죽도(竹島)[울릉도]로 출어하는 것을 금지한 일본 막부의 명령. 임진왜란 이후 울릉도에 대한 조선 정부의 정기적인 순심 정책이 이루어지지 못한 틈을 타서, 조선의 본토로부터 삶의 터전을 찾아 울릉도에 들어가는 사람이 늘어나고 일본인들의 불법적 울릉도 출어도 늘어나게 되었다. 그 와중에 일본의 오오야[大谷], 무라카와[村川] 두 가문은 일본 막부로부터 1617...
-
1618년 일본 도쿠가와 막부가 오오야·무라카와 두 가문에게 발급한 울릉도 조업 허가서. 임진왜란 직후 요나고항을 거점으로 동해 연안의 교역을 행하고 있던 오오야 진키치[大谷甚吉]는 대풍으로 조난을 당해 울릉도에 표착하게 되었다. 그는 천혜의 보고인 울릉도에서 고기잡이를 하고자 하였다. 울릉도는 조선의 영토이므로 울릉도에 가서 고기잡이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막부의 허가가 필요하였다...
-
1881년(고종 18) 기타자와 미사나리가 저술한 독도 기록이 있는 일본 문헌. 1876년(고종 13) 조선의 개항을 전후한 시기부터 일본인들이 울릉도에 불법 입도하여 삼림 재목을 도벌해가면서 불법을 저지르자 조선 정부는 1881년(고종 18) 5월 일본 외무성에 항의 문서를 보내어 일본인들의 울릉도에의 도항과 불법 입도의 금지 조치를 요구하였다. 일본 외무성은 이에 대한 대답을...
-
“저는 결혼은 스물여덟에 했습니다. 일찍 한 편이고, 집사람이 그 당시에 스무 살 때 시집왔습니다. 중매 반, 연애 반 했습니다. 고모가 중매를 서고 만나 연애해서 그래 결혼했습니다. 집사람은 선대부터 울릉도에 살았어요. 저 뭐 연애할 적에 바닷가에 잠시 만나서 데이트 정도지, 뭐 갈 때도 없고 그저 만나면 도동항 가가 자장면 한 그릇 먹고 걸어오는 게 전부였습니다. 도...
-
“어른들은 농사짓고 어업하고 했지만, 나는 안 그랬어요. 나는 학교 졸업이후 열일곱 살 먹어가 3월25일 천부초등학교 나왔는기라. 열일곱 살 묵은 넘이 3월 졸업해가 4월에 도망갔지. 왜놈시대에 일제초등학교 나와가 그길로 아버지 지갑에 돈 5원을 훔치가 저마 도망을 갔부맀다. 이북으로 갔지. 삼척 저 내려가. 그때는 모르는 기라. 학교 댕길 적에 지도책이 있거든. 5학년에 지리를...
-
예선창은 천부리의 중심이다. ‘예(옛날)부터 선창’이라 하여 이렇게 불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왜선들이 들어와 이곳에서 배를 만들고 고기를 잡고 귀목(느티나무)을 도벌하여 갔기 때문에 왜선창이라도 불렀다. 이규원 일기에는 ‘왜선창’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후 동명을 한자식으로 바꿀 때, ‘천부’라고 이름하였다. 시절이 하 수상하여 바다 건너 살 곳 찾아 예선...
-
원래 이곳에는 황토가 많이 났다고 한다. 지금도 현포 쪽 바닷가 산에 황토를 파낸 자취가 아직 남아 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조선조 때는 이곳의 황토를 나라에 진상했다고 하며, 또 조정에서는 3년에 한 번씩 삼척영장을 이 섬에 순찰 보내어 그 순찰 여부를 알기 위해서 이곳의 황토와 향나무를 바치게 했다고도 한다. 개척 때 사람들이 이곳에 와 보니 바닷가 산에 황토를 파낸 구석이...
-
“우리가 할아버지가 총각 때 오셨어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가 한 20년 되었습니다. 90살에 돌아가셨으니깐 110년 전, 총각 때니깐 100여 년, 경주 모량면에서 들어왔어요. 그 윗대는 울진군 평해, 거기 있다가……. 그 전에 우리 할아버지가 남자 형제가 4형제였어. 우리 할아버지가 막내였어. 아버지가 1921년 울릉도 생이니깐. 1910년에 한일합방하고. 큰할아버지가 울릉도...
-
“대전에서 들어왔어요. 처음에는 우리가 여기 왔을 때는 겨울이었어요. 대전에서 오는데 쌀은 쉽게 구할 수 있는 줄 알고 아무것도 안 가져오고 짐만 잔뜩 가져왔어요. 그런데 태풍 불어서 짐은 먼저 오고 우리는 인사하고 울릉도 가겠다고 나왔는데 배가 안 떴어요. 그것을 네 번은 그랬죠. 12일 만에 왔는데, 쌀이 없는 거예요. 그때 눈이 왔는데, 눈 사이에 배추가 있더라고요. 그것을...
-
경상북도 울릉군 북면 천부1리에 있는 폭포. 개척민들이 입도하여 처음 나리분지에 있는 이 폭포를 보니 맑은 물이 낭떠러지에 떨어지는 것이 퍽 시원해 보였고, 또 이곳에서 목욕을 하면 천 년까지 장수한다는 이야기가 있어 폭포 이름을 천년포라고 불렀다 한다. 1882년 울릉도 검찰사로 울릉도를 검찰한 이규원의 『검찰일기(檢察日記)』와 1917년 「조선지형도」에서는 한자로 ‘천년포(千年...
-
울릉도의 관문인 도동항에서 섬 일주도로를 따라 한 시간 남짓 버스를 타고 가면 북면의 천부마을에 도착한다. 천부마을은 섬목에서 내수전까지 완공되지 않은 4.4km 구간의 미완성 울릉도 일주도로 때문에 가장 오지로 인식되고 있다. 또 천부마을은 최고 관광지인 나리분지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으나, 택시나 관광버스 위주의 관광 관행으로 인해 관광객들이 천부마을을 스쳐지나가...
-
“저가 해방되던 해가 내 나이가 8~9세였나 그랬죠. 일본 사람 봤죠. 석포에 놀기 삼아 가보시면 알겠지만, 부대가 들어와 있는데. 거기에 일본 부대가 들어와 있었죠. 그래서 봤죠. 그리고 일반인들이 사는 것은 못 봤어. 읍 쪽에는 살았다고 합디다. 제가 나이가 어중간해서 저보다 나 더 묵은 사람이 알고…….”...
-
“지금과 달리 이곳에서 학교 다닐 때만 하더라도 학생들이 많았습니다. 그때 학년별로 1~2학급이 있었는데 학급당 60~65명 있었는데 지금 전교생이 50여명이니깐 전에 비하면 한 반도 안 되죠. 그때 애들이랑 겨울에는 눈이 많이 오니까 대스키, 대나무 스키 타고 했습니다. 여기 포장 안 되었을 때는 비포장이었다. 면사무소 올라가는 길 경사로 등 경사노면에서는 전부 스키 탔습니다....
-
“여기서 바라보며 하는 이야기가, 여러 명한테 들었는데, 아 여기 카프리섬보다 좋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왜 카프리섬과 비교하는지 알아보니, 요 주변의 분위기가 비슷하대요. 얼마 전에, 성악가 엄정행 씨, 그 양반이 하는 얘기가 ‘내가 세계여행을 다 해 봤는데, 여기만큼 좋은 자리는 없었다.’ 자기 동료들한테 너무너무 보여주고 싶다. 그래서 자기 동료를 데리고 들어오겠다,...
-
“할아버지가 울산에서 들어왔는데, 울산가면, 박상진 의사 알지요. 그 양반이 우리하고 촌수가 안 멀어요. 한 10몇 촌 되는데. 그 양반이 일본 순사한테 붙들려가 고초를 당하고 사형당한 후에 집안이 풍비박산이 된 기라. 우리 할아버지가 거 있어보니 일본 놈 때문에 도저히 못 살겠는 기라. 그러이, 집안에, 울산에 송촌병원 하던 그 양반 병원하고 우리 집안하고 몇 년간만 울산을 비웠...
-
“농사지어 놓으면 감자 강냉이가 주식인데, 콩은 전부 공출해갔어. 그리고 식량 대두박이 있어요. 콩기름 짜고 남은 찌꺼기인데, 그게 콩이라서 괜찮은 것 같았는데, 안 그렇데요. 그걸 묵었는데, 그걸 이틀이나 사흘 먹었는데……. 학교 가기 전에 항상 풀 비러 갔는데, 그때 풀 비 놓고 쉰다는 게 자버렸어요. 학교 갈 때, 아가(아들이) 안 오니 엄마가 와가 깨워보니 (영양실조로) 완...
-
태하(台霞) 근처에 형제봉이 있고, 그 형제봉에는 미륵굴이 있다. 하루는 태하동의 농부가 이 미륵굴 근처의 밭에서 김을 매고 있는데, 거기서 큰 미르(용)가 나왔다 들어갔다 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미륵굴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말이 전한다. 또 어떤 사람은 이 굴에서 큰 지네가 들락날락거리는 것을 보았다는 이야기가 전하기도 한다. 이 미륵굴에 빠지는 날이면 여간해서는 살...
-
“제가 지금 태하에서 택시를 해요. 그런데 택시가 지금 많이 불경기라요. 지금 개인택시가 울릉도에 35대, 법인 19대인데, 법인도 하루 지입금이 7만5천원 이래 되니까. 기름값 하고 한 3만원. 하루 10만원 이래 되니까 기사가 없어요. 개인택시도 5~6만원 벌어도 기름값 빼면 없어요. 육지 손님 오셔가지고 아다리 되면은 몇 만원 벌어지는데 단체로 와서 하니까. 그래 저는 집에서...
-
“등대 저거 지을 때요. 동네사람들이 4~500명이 4~5일 일을 했는데. 전부 부인들은 세숫대야에서 자갈 모래를 이고 갈 만큼 담고. 남자들은 괘짝에다가 지게 지고 올렸어요. 그래가 등대 만들었어요.”...
-
“미군은 있었어요. 우리가 초등학교, 중학교……. 한 5~6년 근무 해 있었어요. 미국 사람들 합판이 참 좋더라고요. 울릉도 뭐 그런 게 있었습니까. 없었는데, 합판가지고 막사 지어가, 뭐 때문에 있었는지 몰라도 여하튼 미군이 한참 있었고……. 아마 이북 때문에 왔지 싶어요. 태하등대에서 바로 북쪽이 제일 가찹꺼든요. 여 위에 레이더 있는데. 직통 바로 동해 여기 다 걸려 버려요....
-
서면 태하리 330(산막) 일대, 태하 2리 산막에 독가로 있는 김영호 씨 집 옆에 고분 1기가 위치한다. 고분 양편에는 험준한 능선이 바다 쪽으로 이어지며, 이들 능선 사이로 비교적 완만한 능선이 서쪽으로 뻗어 나와 있다. 이 능선의 말단부인 해발 165m에 고분이 위치하고 있다. 고분의 축조방식을 보면, 경사가 급한 앞면과 계곡 쪽인 우측면에는 7~8단 정도로 들여쌓...
-
서면 태하리 507번지 일대, 태하초등학교 뒤편 산비탈에 있는 서석태씨 밭에서부터 동편으로 250m 지점에 있는 태하리 천제당 부근까지의 밭과 산비탈에 위치해 있다. 1882년 이규원의 '울릉도 검찰일기(鬱陵島 檢察日記)'에 따르면 대황토구미(지금의 태하리)에서 여러 기의 고분을 보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현재 서석태 씨 밭에는 고분 1기가 남아 있다. 고분은 1998년...
-
서면 태하리 398(학포) 일대, 태하2리 369-1번지 손모익 씨 가옥 앞쪽과 일주도로 위쪽 밭 일대부터 학포동으로 내려가는 길가의 유종수 씨 가옥 뒤편 일대에 위치한다. 이곳은 바다 쪽으로 뻗은 해발 120~160m에 이르는 비교적 가파른 산비탈로 현재 밭으로 개간된 상태이며, 전방으로는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온다. 고분은 태하리 손모익, 우한수 씨 공가 앞쪽 약 60...
-
서면 태하리 401-1(학포) 일대, 고분군Ⅱ에서 북쪽 100m 지점에 위치한 해발 180~230m의 산비탈 및 밭 일대에 위치한다. 이곳은 비교적 경사가 급한 지대를 개간하여 만든 밭으로 지금은 경작하지 않은 지 오래된 듯 풀과 잡목이 우거져 있다. 고분군 앞쪽으로는 계곡과 바다가 한 눈에 잘 조망된다. 범위는 양쪽 계곡을 사이에 두고 남북간 약 250~300m, 동서...
-
서면 태하리 531-1 일대, 태하 1리 초입에 있는 성하신당 맞은편으로 태하천을 건너면 삼도사(三道寺)가 있다. 이 절은 천태종 사찰로 현재 콘크리트로 지은 원통보전과 요사채 각 1동씩이 지어져 있다. 현지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지금 사찰이 들어선 자리에 터파기를 할 때 고분과 관련된 유물이 상당량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곳은 바다와 인접한 천변의 곡간평지에 해당된다....
-
“각석문은 옛날 울릉도에서 이쪽(방파제 방향) 저쪽(황토구미 쪽)에 양쪽에 발파를 해가 없애버렸지만, 음각을 해가 수없이 있었어요. 이쪽저쪽 참 많이 있었는데, 발파를 해가 다 없애버렸어요. 이쪽(방파제 쪽) 한군데는 남아 있더라고. 저쪽은 다 도동항구 만든다고 발파를 해가, 한 20년 되었어요. 예전에는 자연스럽게 경사져 있었어요, 지금은 단애가 되어 있지만.”(제보자: 안영학)...
-
태하마을, 옛날에는 황토구미라고 불렀던 곳이다. 조선 태종~세종조 우산무릉등처 안무사 김인우를 시작으로, 조선후기의 삼척 영장, 월송 만호 등의 수토관, 그리고 1882년 이규원 검찰사가 울릉도에 첫발을 내디딘 곳이 태하마을이었다. 그들이 울릉도를 다녀간 흔적들이 바위에 새겨져 남아 있다. 태하마을은 울릉도 수호신을 모시는 성하신당이 위치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
-
“배 사업 하면서 하두 신경 쓰느라고 96년도에 위가 빵구 나버렸어. 늘 위에 신경성인지. 커피 한 잔 먹다가 쓰러졌는데, 천공이 되어 버렸어. 그래가, 부산 고신의료원 거 가니, 아 이거는 암이다. 천공이 되어버리니. 암 진단 조직검사하기 전에 수술을 먼저 해야 되니, 이건 암이다 이래가 다 짤라 내버리고 조금 붙여놓았어요. 그러니 밥을 먹을 수 있는교. 조금만 먹으면 올리고 했...
-
“학포동이 굉장히 고립된 지역이에요. 터널과 터널사이에 있거든요. 그리고 제가 보니깐 길도 제일 마지막으로 났더라구요, 여기가. 여기 있는 사람들이 고립된 지역의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면 폐쇄적이잖아요. 남에게 배타적이고 자기를 알아주기를 원하고, 이해받기 원하고, 자기만 사랑받기 원하는 거예요. 그런 것들이 저변에 쫙 깔려 있어요. 아까 말한 거. 이쪽은 전부들 혈족이에요. 그러니...
-
고려 태조 때 울릉도의 수장. 『고려사(高麗史)』에는 “930년(태조 13)에 우릉도(芋陵島)에서 백길(白吉)과 토두(土豆)를 보내어 방물(方物)을 바쳤으므로 백길은 정위(正位), 토두는 정조(正朝)로 각각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와 거의 동일한 기록이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도 있다. 『고려사』와의 차이는 우산국에서 ‘사자(使者)’를 파견하여 방물을 바쳤고, 토두(土豆)가...
-
“풍선이 한강의 돛단배처럼 바람을 이용해가 움직이는 배야. 이기 어디가면 만들어놨냐면, 독도박물관 가면 거 만들어놨다고. 그리고 이 [풍]이거 아무나 못 만든다고, 보통은 광목 2폭을 붙이고, 그 다음에 그 반을 잘라가 이걸 돌려 줄로 묶어 바람을 받도록 만들었어요. 풍 이거는 전부 부인들이 만드는 기라. 집어가지고 주름잡는 거는 우리가 잡고……. 그때는 오징어 잡아오면 현재처럼...
-
“저도 배를 처음에 3명 타는 0.5톤 되는 하나 하다가, 그 다음에 5톤 되는 배를 하다가, 그것도 해보니 한이 안 차가 그 다음에 30톤짜리를 지었다고. 작업을 해보니 울릉도에는 정박할 때가 없는 거라. 지금은 항구가 잘 되어 있지만, 그때는 드갈 자리가 없는 기라. 그래가 그 배를 타고 포항가가 작업을 하다가. 30톤 그거 가지고도 울릉도 왔다갔다 하다 보니, 파도에 막……....
-
“울릉도는 기독교인이 많아요. 교회가 현재 서달교회, 장로교회, 침례교회 세 군데 있고, 그리고 저 밑에 가면 천주교 공소가 있어요. 천부에 천주교 있다보니까. 날씨 나빠서 못 가면 여서하고. 안 그러면, 거 다 가거든요. 불교는 천태종은 여뿐인데. 인구가, 신도나 성도들을 보면 60%가 기독교인이고, 20%는 무교, 20%는 절에 다니고 그렇죠. 이곳이 섬이다보니 풍어...
-
“저는 신학을 좀 늦게 했어요. 36에 신학원 들어가서 대학원 3년 하고 2005년 졸업하면서 바로 들어 왔죠. 선교에 대한 마인드가 있어서 갈려고 하다가. 미국유학 갈려는 길도 있었는데 뭐가 좀 안 열려서 농어촌 쪽으로 뜻을 두고, 총회 홈페이지에 가니 딱 뜨더라고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어서 원래 신앙생활 어려서부터 했어요. 5학년 때부터. 그러다가 소위 말하는 소명이라고 하...
-
“나 먹은 사람들이 많으니 경로당이 문화생활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천부 주민의 95%가 교회 다니고, 그 다음으로 성당, 불교사원 다니니 일주일은 교회에 매달리고, 일년은 농한기 때 나들이 꿈에 산다. 시간나면 경로당 가서 고스톱도 치고, 밥하면 밥도 얻어먹고, 윷도 놀고, 뭐, 그러죠. 저는 성당 다닙니다. 사람 별루 없습니다. 나 묵은 사람이 많다보니 운영이 안 되요. 그래...
-
신라시대 경상북도 울릉군을 관할한 지방행정구역. 삼국시대 신라의 지방 행정구역의 하나인 주(州)는 505년(지증왕 6) 삼척 지역에 실직주(悉直州)를 둔 것이 처음이다. 주는 통일 이전과 이후의 성격이 크게 달라진다. 통일 이전의 주는 실직주·사벌주(沙伐州)[현 상주]·비자벌주(比子伐州)[현 창녕]·남천주(南川州)[현 이천] 등 지명을 붙인 경우와 상주(上州)·하주(下州)·신주(新...
-
“관광은 농한기에 갑니다. 농사 없을 때 갔다 오죠. 전국 관광은 다섯 여섯 번 다녀왔어요. 할머니와는 같이 다니기도 하고 따로 다니고. 그리고 같이는 하와이 효도관광 다녀왔는데 갈 곳이 못 되더라고. 거 안내원이 말하데요 '섬 사람이 여 섬에 와 왔어요?' 하더라고요. 실지로 가보니 아무 것도 아니데요. 자연도 뭐 볼 거 뭐 있어요? 좋다고 갔지. (웃음) 그런데 가는 데 8시간...
-
“저는 여기를 떠났을 때를 생각해 봐요. 근데 내 고향은 도시라 애착감이 없어요. 대전 토박이거든요. 하지만, 여기는 정말 마음의 고향이 될 거 같애. 처음 부임지고 항상 떠올라요. 내가 다음에 나이 먹고 밖에 나가서 학포를 생각하면 그리워질 거 같애. 지금도 내가 모르죠. 늦게 까지 어떤 사역을 하고 싶은데, 나중에는 들어 와서 노후를 보내도 괜찮을 것 같다, 그런 생각이 들어요...
-
“여름에는 네 시 요즘은 다섯 시에 일라가 회관에 올라가 운동해요. 여섯시 반쯤에 집에 오면 그 길로부터 뭐 가게 보다가 요즘은 저녁 여섯시 반 또는 일곱시에 가게 닫죠. 2년 전만 하더라도 저동이나 도동에서 물건을 직접 싣고 왔죠. 지금은 배달. 도동 가는 건, 저는 한 달에 한 번 안치죠. 군에 보면 울릉군지 발간위원 몇 가지 저를 그래놨습니다. 할 수 없이 수 채울라고 나가기...
-
울릉의 관문인 도동에서 천부로 가려면 버스를 타고 일주도로를 약 1시간 남짓 달려야 한다. 도동에서 출발하여 천부에 이르는 길은 제법 멀다. 도동발~사동(5.6㎞)~통구미(8.7㎞)~남양(10.9㎞)~구암(14㎞)~학포(18.9㎞)~태하(21.9㎞)~현포(24.8㎞)~평리(29.0㎞)~추산(30.4㎞)~천부(32.4㎞) 버스 요금은 4,500원이다. 하루 일곱...
-
“저희는 사역을 믿어라 믿어라 이렇게 안 해요. 그냥 몸으로 보여주고 섬겨주고 늦어도 나중에 우리가 없을 때라도 예수 믿으면 고맙고 감사하고. 우리 교회 집사님 한 분은 78세인데, 할머니인데 한글을 저한테 배우다가 지쳐서 다시는 한글 안 배운다고 날 좀 살려 달라고 하더라고요. 처음에는 열심히 공책 갖고 다녔는데……. 사실은 우리 어머니가 글을 몰랐어요. 마흔 셋에 저를 낳았는데...
-
“여가 해군 망루가 있었고, 보루산 하는 데, 보루산이라는 보루가 일본말이거든요. 보루라는 말이 그때 생긴 것은 아니고 러일전쟁 때 거 망루가 있었는데 그것을 보루보루 해가(보루보루라 불러) 저 산 이름이 보루산이 되었어요. 그리고 독도에도 보루가 있었어요. 군 제대하고 오니까, 내가 발파공 그걸 내가 했는데, 그래가 독도 배대는 곳, 천장굴 거 비석굴이 있는데. 러일전쟁 때 망루...
-
“여서는 왜놈들하고 한이 맺힌 사람이 별로 없었어요. 못 가게 하고 복수한다던지 하는 거는 없었습니다. 근데 저건 모르겠어요. 무기, 그건 방공호에 다 묻었을 거예요. 그리고 그들은 다 잘살았어요. 일본인은 일등국민이고, 우리는 이등국민이고, 만주는 3등국민이고……. 왜놈들이 여 와가 약탈하고 하지는 않았어요. 그래가 깨끗하게 다 보내줬어요.”...
-
서면 태하 2리(학포, 작은 황토구미)의 산왕각은 태하리 임오명각석문에서 남쪽으로 약 80m 지점의 계곡 옆 암반 사이에 정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당집은 단칸(2.5×2.7m) 규모로 뒷벽은 바위에 의지하고 나머지 삼면은 돌로 벽체를 쌓아 올렸다. 당집 주변은 시멘트로 바닥을 정리하고 벤치를 놓아 마을쉼터로 조성하였다. 출입문은 계곡 쪽으로 쌍여닫이 판자문으로 달았고,...
-
“왜놈들이 와가지고 향나무, 괴목나무 등을 네모로 따버리고 가져가던 그때인데, 산에 가면 나무를 쌓아놓고 위에 비뿌고 필요한 부분만 따가 가가 버렸거든요. 왜놈들이 전부 해갔어요. 우리 여, 백십 년 더 되었나. 그때 본천부 쪽에 배를 대가 왜놈들이 나무하러 왔는 모양이라. 그들이 더웠는 모양이지. 웃통을 벗었나 보지. 그런 넘이 뭐 주는데, 꼭 떡 같은데 집에 가와가 먹어보니 못...
-
고려시대 경상북도 울릉군 지역에 존재했던 특수행정구역. 향(鄕)과 부곡(部曲)은 삼국시대부터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향과 부곡 외에 소(所)·장(莊)·처(處)가 있었다. 당시 경(京)·목(牧)·도호부(都護府)·군(郡)·현(縣) 등의 집단을 총칭하여 군현제(郡縣制)라 하고, 향·부곡·소·장·처 등을 흔히 부곡제(部曲制)라고 하였다. 고려시대 군현 조직은 군현제와 부곡제 영역으로 구성되...
-
1945년 8월 15일 이후 현재까지의 울릉도의 역사. 1945년 8월 15일 해방 당시 울릉도의 도사(島司)는 오타케 사쿠지로[大竹作次郞]였고 도청에는 내무와 산업 2개 과가 있었다. 미군정 하에서 울릉도청에는 초대 도사로 당시 남면장으로 재직 중이던 서이환(徐二煥)을 12월 13일자로 임명하여 도내 일반 행정과 치안 행정을 수행하게 하였다. 일본인 관리들과 민간인들은 소형 선박...
-
조선 말기부터 1968년 화전정리법이 공포되기 전까지 경상북도 울릉군에서 행해진 농경 방식. 화전은 처녀지나 휴경지(休耕地)를 새로이 경작할 때 불을 놓아 야초와 잡목을 태워버리고 농경에 이용하던 땅이다. 화전 농업은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농경 방식으로 인정되고 있다. 중국의 화경(火耕)이나 일본의 야키바타[燒畑]도 화전과 같은 농경 방식이다. 화전을 개척하면 그 동안에 쌓였던 부...
-
태하동(台霞洞)에서 등대가 있는 곳으로 올라가는 길가에 황토흙이 많이 나오는 구덩이가 있다. 여기에 황토흙이 많이 나는 까닭을 전하는 옛날이야기가 있다. 향나무재[嶺]에 사는 어떤 사람이 황소를 몰고 향나무재로 올라가다가 소가 헛디디는 바람에 사람과 함께 황소가 굴러 떨어졌다. 그때 피가 흘러서 붉게 되어 황토 구덩이가 되었다고 한다.(울릉문화 제2호, 1997)...
-
삼척의 어느 사또가 관기를 데리고 뱃놀이를 나갔다가 급작스러운 돌풍을 만나 표류하던 중 이곳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 당시 이 섬에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았다. 식량이 있을 리 없는 이곳에서 모두가 굶주림에 허덕이게 되었다. 이리저리 먹을 것을 구하려 헤매었으나 먹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모두가 허기에 지쳐 있었는데, 그 중 누가 황토를 발견하고 ‘이 흙이라도’ 하고...
-
“저 위 학포분교 터에 히말라야시다라는 나무인데, 여기 울릉도에 이거밖에 없어요. 거기에 이만한 열매가 열리는데. 저희가 즙을 담갔어요, 즙이요. 기가 막혀요, 향이. 물과 희석해서 먹어요. 솔잎보다 훨씬 좋은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