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0003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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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芚山東學最後抗爭 |
영어공식명칭 | Daedunsan Mountain Donghak Resistance movement |
이칭/별칭 | 동학농민운동,대둔산 최후 항쟁,대둔산전투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전라북도 완주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박대길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894년 11월 - 대둔산 동학최후항쟁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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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결 시기/일시 | 1895년 2월 17일 - 대둔산 동학최후항쟁 종결 |
발생|시작 장소 | 대둔산 동학최후항쟁 발생 장소 - 전라북도 완주군 운주면 산북리 |
종결 장소 | 대둔산 동학최후항쟁 종결 장소 - 전라북도 완주군 운주면 산북리 |
[정의]
1895년 전라북도 완주군 운주면 대둔산에서 벌어진 동학농민군 최후의 항쟁.
[역사적 배경]
1894년 11월 공주[현 충청남도 공주시] 우금치전투와 청주성전투에서 패배한 후 전라도 진산[현 충청남도 금산군]과 고산[현 전라북도 완주군 일대] 등 인근 지역에서 활동하던 동학농민군 중 일부가 대둔산 정상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일본군에게 항쟁했다. 일본군과 관군이 연합해 1895년 2월 17일 대둔산에 총공세를 감행해 동학농민군을 진압했으며, 이 때 25명에 이르는 동학농민군 전원이 전사했다.
[경과]
1894년 11월 공주 우금치전투와 청주성전투에서 패배한 동학농민군은 일본군과 관군의 추격을 받으면서 남쪽으로 후퇴했다. 동학농민운동[일명 동학농민혁명]에 가담해 활동하던 동학농민군은 각자 혁명의 지속과 생존 방안을 강구(講究)하게 되었다. 동학농민군이 대둔산에 들어가 항쟁을 시작한 시기는 1894년 11월 중순경이었다. 처음에는 진산 접주 최공우(崔公友)과 최공우의 아들 최사문(崔士文) 등이 대둔산 정상 부근에 몇 칸 집을 짓고 병기와 양식 등을 갖추고 집단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점차 가담자가 불어나 50여 명에 이르렀다. 시기적으로 한겨울이었고, 해발 700m가 넘는 지형에 위치할 뿐만 아니라 민가와 멀리 떨어진 고립된 장소에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항쟁은 처음부터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대둔산 정상에 웅거하면서 항쟁을 멈추지 않은 것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이 너무나 컸기 때문이었다. 전주와 공주의 병사와 진산의 민보군(民堡軍)이 연합해 토벌에 나섰으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퇴각했다. 이에 동학농민군 진압에 나섰던 순무영(巡撫營) 우선봉진(右先鋒陣)과 일본군이 직접 나섰다. 순무영 우선봉진과 일본군은 동학농민군을 끝까지 토벌하려는 목적은 분명했다. 이대로 방치할 경우 인근에서 호응하는 세력과 결합해 세력을 키울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관군과 일본군은 치밀한 계획을 세운 뒤 1895년 2월 17일에 본격적인 진압에 나섰다. 동학농민군은 끝까지 저항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모두 사살(射殺)당하고 말았다. 대신 성명 미상의 어린 아이만 살려 두었는데, 그것은 전몰(戰歿)한 동학농민군의 정황(情況)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동학농민군 25~26명이 최후까지 저항했으며, 이들은 대개 접주 이상이었고, 그 이름을 일일이 알 수 없었다. 그리고 28~29세쯤 되는 임산부가 총탄에 맞아 죽었으며, 접주 김석순(金石醇)은 한살쯤 되는 여자 아이를 안고 천 길이나 되는 계곡으로 뛰어들어 암석에 부딪쳐 죽었다.
[결과]
일본군이 1895년 2월 18일 만든 보고서 「대둔산부근 전투상황(大芚山附近 戰鬪詳報)」에는 “25명을 사살하고, 50자루의 화승총, 약간의 화약, 서류를 획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대둔산부근 전투상황」에 적힌 전사한 동학농민군 소속 인물로는 “도금찰(都禁察) 최학연(崔鶴淵), 도집강(都執綱) 장지홍(張志弘) 최고금(崔高錦), 도집행(都執行) 이광의(李光儀) 이광자(李光字), 대정(大正) 이시탈(李是脫), 접사(接司) 조한봉(趙漢鳳), 접주(接主) 김재순(金在醇) 진수환(陳秀煥) 김석순(金石醇), 교수(絞授) 강태종(姜泰鍾), 봉도(奉道) 전판동(全判童)”으로 총 12명이다. 한편 소모관(召募官) 문석봉(文錫鳳)이 남긴 『의산유고(義山遺稿)』에는 “최공우, 최사문, 김공진(金公眞), 양양옥(梁良玉), 박중집(朴仲執), 이홍기(李洪基), 김치삼(金致三), 장문화(張文化), 김태경(金台景), 정옥남(鄭玉男), 고판광(高判光), 송인업(宋仁業)”으로 12명이 확인된다. 이 중 최공우와 김공진 등은 최후 항쟁 이전에 산을 내려갔고, 최공우는 후에 고산, 진산, 연산, 진잠 4개 읍의 경계에 있는 염정동(廉貞洞)에서 다시 기포했다. 김공진은 전라북도 완주군 고산 출신으로 최공우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 당시 동학농민군은 고산에 화약제조소를 두고 화약을 제조했다고 한다. 이들 다수는 최공우를 비롯해 진산 연고자들이고, 김공진과 같은 고산, 그리고 연고지가 확인되지 않는 김태경, 장문화, 김치삼 등을 볼 때, 대둔산 최후 항쟁에 참여한 인물은 진산 출신이 주축이었지만 이외 고산 등 여러 지역 연고자들도 참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대둔산 마천대 주변에 주둔했던 동학농민군을 공격한 관군은 이두황(李斗璜) 휘하의 순무영 우선봉진 별군관(別軍官) 윤지영(尹摯榮)·김광수(金光洙)와 교장(敎長) 장세복(張世福) 등 병정 30명, 일본군 특무조장(特務曹長) 다케우치 신타로[武內眞太郞]와 전직 순무영 별군관 오인경(吳仁庚)을 비롯해 일본군 30명의 연합부대였다.
[유적지]
1999년에 조사한 『대둔산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지표조사 보고서』를 보면, 동학농민군의 주거지로 보이는 집자리 네 곳, 동굴 2곳, 198㎡[60평] 규모의 방어진지가 발견되었고, 유적지의 중앙에 자리한 집자리에는 구들돌로 이용된 것으로 보이는 돌이 깔려 있었다. 대둔산 아래에서 유적지에 오를 수 있는 진입로는 세 곳 정도였다. 유적지 암벽에서 약 100m 떨어진 지점에서 불 땐 흔적을 확인할 수 있었고, 53㎜의 탄피가 발굴되었다. 유적지에서 충남도계를 넘어 10분 거리에 장군절터가 있는데, 이곳에 동학농민군이 이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우물이 남아 있었다.
[의의와 평가]
충청남도 공주시 우금치전투와 충청북도 청주성전투에서 패전하며 동학농민혁명[동학농민운동]이 좌절될 것이 예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둔산 정상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일본군과 관군에 맞서 최후까지 항전을 벌였다. 이것은 동학농민군이 염원하는 새 세상을 향한 불굴의 의지를 대내외에 알린 의로운 죽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