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0004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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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萬馬關址 |
영어공식명칭 | Manmagwan Site |
이칭/별칭 | 만막관,만막산성 |
분야 | 문화유산/유형 유산,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전라북도 완주군 상관면 용암리 665 일원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강원종 |
조성|건립 시기/일시 | 1813년(순조 13) - 만마관지 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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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소재지 | 만마관지 - 전라북도 완주군 상관면 용암리 665 일원 |
성격 | 성곽 |
양식 | 관문(關門) |
[정의]
전라북도 완주군 상관면에 자리하고 있는 조선 후기의 석성 터.
[개설]
만마관지(萬馬關址)는 전라북도 남원에서 완주군으로 들어가는 호남제일관문(湖南第一關門)으로 조선 후기 순조(純祖) 때 축성된 석성의 터이다.
[건립 경위]
만마관은 옛 『완산지(完山誌)』의 ‘1811년(순조 11) 전라관찰사(全羅觀察使) 이상황(李相璜)이 부(府)의 동남(東南) 7리(里)에 만마관을 축성했고, 1813년 관찰사 박윤수(朴崙壽)가 견훤고성지(甄萱古城址)[현 남고산성(南固山城)]에 산성을 축성하고 진(鎭)을 설치했다’라는 기록과 『국조보감(國朝寶鑑)』 제79권에 ‘전주부(全州府)에 남고산성을 쌓고, 진을 설치하고 별장(別將)을 두었다. 성은 만마곡(萬馬谷)에 있는데, 남로(南路)의 요충지에 해당하고 전주의 요해처(要害處)가 되는 곳이다. 전라관찰사 이상황(李相璜)이 계획하고 쌓기 시작하였는데, 이때 이르러 완성되었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1813년(순조 13)에 완공된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1868년에 간행된 김조순(金祖淳)의 문집 『풍고집(楓皐集)』에서 만마산성 신축기(新築記)가 소개되고 있고,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고종(高宗) 10권, 1873년(고종 10)에 ‘전주부 만마관 등의 공사에 자금을 헌납한 진제필(陳濟弼)을 변경 장수에 임명하였다’라는 내용으로 보아 이때 만마관의 중축 또는 개축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위치]
만마관지는 전주-남원을 잇는 국도 17호선 상의 완주군 상관면 원용암마을에 있다. 전주시에서 남원 방면으로 가다 보면 완주군 상관면 용암리 일원에 남관초등학교 사거리가 나오는데, 남관초등학교 길 건너편에는 내아마을로 들어가는 입구가 나온다. 이 입구에는 남관진 창건비(南關鎭 創建碑)와 안내문이 있다. 만마관지는 이곳에서부터 남원 방면으로 2.5㎞ 지점에 있으며, 남쪽의 슬치를 통해 남원과 연결되는 곳이다.
[형태]
만마관은 일만 마리의 말, 곧 천군만마(千軍萬馬)라도 다 막아낼 수 있다는 뜻의 관문이다. 남원으로부터 슬치를 넘어 완주로 들어오는 협소한 길목에 자리하였던 것으로 1907년경의 사진을 통해 살펴보면, 성문의 형태는 홍예형식(虹蜺形式)[아치형]이며, 성문 주위 성벽은 다른 성벽보다 두텁게 육축(陸築)[성문을 축조하기 위해 큰 돌로 만든 석축기단]을 하고 있으며, 성문 위로는 정면 3칸의 문루(門樓)를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문 좌우의 성벽에는 여장(女墻)[성 위에 낮게 쌓은 담]과 총안(銃眼)[총구멍]이 관찰된다.
[현황]
전주-남원 간 국도변에 위치한 만마관지는 과거에 좌우로 각 70~80m의 석성이 남아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관문을 비롯하여 성벽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산자락 아래부터 정상부까지 석축의 흔적이 관찰된다. 지금은 국도가 지나고 있고 도로 주변에는 협소한 평탄지가 조성되어 있으며 일부 나무가 식재되어 있다. 산자락의 비탈면에는 성벽을 쌓았던 돌무더기들이 널려 있다.
[의의와 평가]
만마관은 전략상 중요 지점에 구축해 놓은 군사시설인 요새(要塞)를 의미하는 것으로 완주 지역을 수호하는데 절대적인 요충지였다고 할 수 있다. 남원을 거쳐 임실, 그리고 완주 지역으로 들어오는 적을 일차적으로 방어하는 곳으로 남관진장(南關鎭將)이 이를 담당하였다. 만마관지는 전라남도 구례군의 석주관(石柱關)과 함께 호남을 지켰던 전략적 군사 요충지의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