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000492
한자 城北里林挺芝林尙仁林應柏旌閭
영어공식명칭 Monument Gate for Im Eung-back, Im Sang-in, Im Jeong-ji in Seongbuk-ri
분야 문화유산/유형 유산,역사/근현대
유형 유적/건물
지역 전라북도 완주군 화산면 성북리 남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노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이전 시기/일시 2002년 - 성북리 임정지, 임상인, 임응백 정려 이건
현 소재지 성북리 임정지, 임상인, 임응백 정려 - 전라북도 완주군 화산면 화산로 341 동북쪽 언덕 아래지도보기
원소재지 성북리 임정지, 임상인, 임응백 정려 - 전라북도 화산면 화평리 수락동 지도보기
성격 정려
양식 개석이 있는 쌍주 안에 비석
소유자 평택임씨
관리자 평택임씨

[정의]

전라북도 완주군 화산면 성북리 남동마을에 있는 정려.

[개설]

완주군 화산면 성북리 남동마을에 있는 평택임씨 정려군이다. 이곳에는 5개의 비석이 있다. 임상인(林尙仁)[1533~1605]의 정려는 가장 왼쪽에 있다. 성북리 임상인 정려비의 형태는 개석이 있는 쌍주 안에 비석이 있다. 비석의 명문은 ‘효자학생임상인지려(孝子學生林尙仁之閭)’이다. 원래 성북리 임상인 정려비는 완주군 화산면 수락동 거사리 쪽 골짜기에 있었으나, 이곳으로 옮겨진 것이다. 비석의 크기는 높이 116㎝, 폭 45㎝, 두께 15㎝이다. 임상인의 본관은 평택, 자는 애경(愛卿)이다. 공혜공 임정(林整)의 5세손이다. 고조할아버지는 임인산(林仁山), 증조할아버지는 임득노(林得老), 할아버지는 임육(林堉), 아버지는 임치번(林致蕃)이다. 외할아버지는 은진송씨이다. 임상인은 15세 때 어머니가 숙환으로 자주 혼절해 자리에 쓰러지곤 했다. 그러자 임상인은 15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어느 명의의 처방에 따라 자신의 허벅지살을 떼어 음식물과 혼합해 바치고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어머니의 목에 넣어드리니 얼마 후에 소생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병세가 재발하자 임상인은 또다시 허박지살과 손가락 피를 전과 같이하니 다시 소생했다. 이 사실이 지방의 관가에 알려지자 지방은 다시 조정에 보고해 임상인의 극진한 효성에 감동, 명종조에 정려가 내려졌다. 진사 국함(鞠涵)[1574~1653]이 정려기를 썼다. 비석에 가정 18년 신사라고 되어 있으나, 가정 18년은 1539년으로 간지는 기해년이다. 가정연간에는 신사년이 없다. 가까운 신사년은 1521년(정덕 16년), 1581년(선조 14)이다. 임상인의 무덤은 2002년에 완주군 화산면 성북리 770-7번지 납골묘에 부인과 합장했다. 장인은 전주류씨이다. 아들은 임수전(林秀荃)이다.

임응백(林應栢)[1579~1668]의 정려는 왼쪽에서 두 번째에 있다. 형태는 개석이 있는 쌍주 안에 비석이 있다. 비석의 크기는 높이는 115㎝, 폭은 44㎝, 두께는 15㎝이다. 임응백의 본관은 평택, 자는 직재(直哉)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임치번(林致蕃), 할아버지는 임상인(林尙仁), 아버지는 임수전(林秀荃)[1566~1671]이다. 외할아버지는 운제(雲梯) 백씨(白氏)이다. 임응백은 효성이 지극해 평소에도 백세의 노모 운제 백씨를 봉양함에 자식의 직분을 다했다. 어느 날 모친의 병질이 위독해지자 온갖 정성을 다해 약을 구하여 치료했으나, 효험은 없고 끝내 기절했다. 그러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마시게 해 소생하게 했다. 당시 임응백의 나이가 80세가 넘었는데도 혼정신성(昏定晨省)[저녁에는 잠자리를 살피고, 아침에는 일찍이 문안을 드림]을 매일 거르거나 중단하지 않고 어릴 때처럼 실천했다. 임응백은 삼년상을 지내는 동안에는 한결같이 예법을 따랐고 어버이를 사모하는 마음이 너무나 간절해 술과 고기는 물론 채소와 과일도 차마 입에 대지 않았다. 증손자 임창원(林昌遠)의 간절한 상언으로 조정에서 정려를 명했다. 수직으로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에 올랐다. 1687년(숙종 13)에 정려의 은전이 있었다. 의정부좌참찬 권적(權適)이 『세효록(世孝錄)』을 지었다. 무덤은 2002년에 완주군 화산면 성북리 770-7번지 납골묘에 부인과 합장했다. 장인은 청주한씨 한석덕(韓碩德)이다. 아들은 임정욱(林挺郁), 임정연(林挺淵), 임정지(林挺芝)이다.

임정지(林挺芝)[1632~1707]의 정려는 세 번째에 있다. 형태는 개석이 있는 쌍주 안에 비석이 있다. 비석의 크기는 높이 115㎝, 폭 76㎝, 두께 15㎝이다. 임정지의 본관은 평택, 자는 자종(子鍾)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임수전(林秀荃), 할아버지는 임응백(林應栢), 아버지는 임봉성(林鳳聖)이다. 외할아버지는 진주하씨 하덕룡(河德龍)이다. 형은 임정욱(林挺郁)[1676~1745], 임정연(林挺淵)[1679~1717]이다. 임정지가 어렸을 때 온 가족이 장질부사[장티푸스]에 걸려 사경을 헤맸다. 큰형수가 먼저 죽고, 큰형마저 계속 앓았는데, 낫지 못할 지경에 이르자 칼을 뽑아 손가락을 찔러 피를 삼키게 해 조금 살아났다가 또 기절하자 다시 손가락을 찔렀는데 이와 같이 두세 번 했더니 마침내 소생했다. 이 사실이 고을과 감영에 알려지고 다시 조정에 보고되자 복호되었다. 2002년에 소강래가 글을 지었다. 임정지의 무덤은 2002년에 완주군 화산면 성북리 770-7번지 납골묘에 부인과 합장했다. 장인은 경주김씨 김흔(金欣)이다.

임취원(林就遠)[1672~1733]의 정려는 네 번째에 있다. 형태는 개석이 있는 쌍주 안에 비석이 있다. 비석의 크기는 높이 115㎝, 폭 45㎝, 두께 23㎝이다. 임취원의 본관은 평택, 자는 인수(仁壽)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임응백(林應栢), 할아버지는 임봉성(林鳳聖) 아버지는 임정지(林挺芝)이다. 외할아버지는 광주김씨 김흔(金欣)이다. 임취원은 어머니 광주김씨가 병에 걸려 위독해지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사방으로 뛰어다니면서 백약을 구했으나 효험이 없고, 자주 혼절하자 마침내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어머니께 마시게 해 얼마 뒤에 의식을 되찾았다. 그러자 온갖 식물과 보약을 마련해 극도로 쇠약해진 어머니의 기력을 돋워 더 사시게 했다. 당시의 여론은 충분히 포창을 받을 만한 데 혼란한 조정 때문에 명정의 특전을 받지 못했다. 임취원의 무덤은 2002년에 완주군 화산면 성북리 770-7번지 납골묘에 부인과 합장했다. 장인은 김해김씨 김석태(金碩泰)이다. 아들은 임종윤(林宗胤), 임종항(林宗恒)이다.

이기경(李基慶)이 지은 시가 있다.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봉산일면운제촌(鳳山一面雲梯村)[봉산[고산현]의 한쪽 운제면에]

내거행인필식문(來去行人必式門)[오고 가는 길손들이 반드시 들러보는 곳이 있다네]

임씨기구유효자(林氏箕裘惟孝字)[임씨들이 이어받은 건 오로지 효라는 글자라네]

부전기자자전손(父傳其子子傳孫)[아버지가 아들에게 잇고, 아들은 손자에게 이어 주었네.]

임제원(林悌遠)[1692~1771]의 정려는 오른쪽으로 마지막에 있다. 형태는 개석이 있는 쌍주 안에 비석이 있다. 비석의 크기는 높이 115㎝, 폭 45㎝, 두께 23㎝이다. 임제원의 본관은 평택, 자는 인중(仁仲)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임응백(林應佰), 할아버지는 임봉양(林鳳陽), 아버지는 임정주(林挺柱)이다. 외할아버지는 김해김씨이다. 임제원은 어머니가 병명을 알 수 없는 질병으로 사경을 헤매게 되자, 어머니의 환후만을 염려하고 자신을 돌보지 않으면서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마시게 하니, 얼마 뒤 어머니가 긴 잠에서 깨어나듯 소생해 기력을 점점 회복했다. 이후 10여 년 동안 정성어린 간호와 봉양으로 여생을 편안히 해 드렸다. 고을의 유림들이 이에 대해 글을 올리니, 관찰사가 듣고 가상히 여겼으나 계문[글로 임금께 아뢰는 것]하지 못해 포상되지 못했다. 이기경(李基慶)이 『세효록(世孝錄)』에 관련 내용을 기록했다. 장인은 안동권씨 감사 권달(權達)이다. 아들은 임종택(林宗澤), 임종갑(林宗甲)이다.

[위치]

성북리 임정지, 임상인, 임응백 정려완주군 화산면 성북리 남동마을 화산로 341 동북쪽 언덕 아래에 있다. 화산면사무소에서 동쪽으로 740번 국도를 타고 가면 성북리 남동마을이 있다. 마을을 지나 자연쉼터 오토캠핑장이 있는 경천저수지 쪽으로 가다 보면 좌측 즉, 동북쪽 산기슭에 있다.

[변천]

임상인 정려와 임응백 정려는 완주군 화산면 화평리 수락동 거사리 쪽 골짜기 안에 있었다. 2002년에 임정지, 임취원, 임제원의 정려를 만들면서 두 개의 정려를 화산면 성북리 남동마을로 옮겼다.

[형태]

성북리 임정지, 임상인, 임응백 정려각은 돌로 된 담장 위에 기와를 이었다. 중앙에 개석이 있는 쌍주 형태로 문을 만들었고, 담장 안에 다섯 개의 비석이 있다. 다섯 개 모두 개석이 있는 쌍주 안에 비석의 형태이다. 담장 밖 우측에 ‘평택임공효자오위분안내문(平澤林公孝子五位分案內文)’이 있다. 정려각의 좌측에 평택임씨 승지공파 납골당이 있고, 그 좌측에는 임득노(林得老)의 묘소가 있다.

[현황]

성북리 임정지, 임상인, 임응백 정려각은 2002년도에 설립해 관리가 잘 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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