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0007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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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芳幹 |
영어공식명칭 | Lee Bang-gan |
이칭/별칭 | 망우당(忘牛堂),양희(良僖) |
분야 | 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전라북도 완주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송만오 |
출생 시기/일시 | 1364년(공민왕 13) - 이방간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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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421년(세종 3) - 이방간 사망 |
묘소 | 이방간 묘소 -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 금상동 산59-1 |
성격 | 공신 |
성별 | 남자 |
본관 | 전주(全州) |
대표 경력 | 의흥삼군부좌군절제사(義興三軍府左軍節制使) |
[정의]
조선 전기 전라북도 완주군에서 거주한 태조 이성계의 아들.
[가계]
이방간(李芳幹)[1364~1421]의 호(號)는 망우당(忘牛堂),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아버지는 태조 이성계, 어머니는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韓氏)이다. 이방간에게는 세 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첫째는 판서 민선(閔璿)의 딸이고, 둘째는 판서 황형(黃亨)의 딸, 셋째는 정랑 금인배(琴仁排)의 딸이다.
[활동 사항]
이방간는 고려 말에 군기시소윤(軍器寺少尹)을 지냈다. 1392년(태조 1) 조선왕조가 개창되자 회안군(懷安君)에 봉해졌다. 그 뒤 1398년(태조 7) 회안공(懷安公)으로 개봉(改封)되면서 의흥삼군부좌군절제사(義興三軍府左軍節制使)가 되었다.
이방간은 1398년(정종 즉위년) 8월, 이른바 제1차 왕자의 난이 발생하였을 때 정안군(靖安君) 이방원(李芳遠)을 도와 정도전(鄭道傳) 일파를 제거하는 데 세웠던 공으로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으로 책록되었다. 그 뒤 개국공신(開國功臣) 1등에 추록(追錄)되었고, 1399년(정종 원년) 풍해도(豊海道)와 서북면의 병사를 분령(分領)하였다. 1400년 지중추부사 박포(朴苞)의 이간에 넘어가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지만 실패하면서 황해도 토산(兎山)으로 유배되었다. 1400년(정종 2) 2월에 삼성(三省)의 관원들은 “방간이 사사로이 군대를 일으켜 골육(骨肉)을 해치려고 하였을 때, 전하께서는 처음에도 승지를 보내시어 동병(動兵)하지 말 것을 명하였습니다. 하지만 방간이 이 말을 듣지 않고, 군대를 일으켰으니 이방간의 죄를 대법(大法)으로 다스리소서”라고 하면서 이방간의 치죄(治罪)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정종과 이방원의 관용으로 죄가 더해지지는 않았다. 다만 토산땅은 전일(前日) 이방간이 군사를 분령한 곳이요, 그래서 후일의 염려가 있다는 이유에서 안산(安山)으로 이치(移置) 되었을 뿐이었다. 전지(田地)와 식읍(食邑)도 받았으며 매년 초하룻날에는 한양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받았다. 1400년(정종 2) 9월에는 문하부(門下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익주(益州)로 이치(移置) 되었다. 그리고 1401년(태종 1)에 회안대군으로 되었다. 이방간은 태종이 즉위한 뒤에도 계속 관용을 받았다. 심지어는 태종이 보낸 의원으로부터 치료를 받기도 하였다. 1401년(태종 1) 6월에는 이방간을 서울로 소환하는 문제가 논의되었지만 성사되지 못하였다. 1402년(태종 2)에는 이방간이 뉘우침이 없으니 이방간을 제주(濟州)로 옮겨야 한다는 대간(臺諫)의 요청이 있었다. 그러나 순천(順天)으로 옮기는 것으로 그쳤다. 그 후 1404년(태종 4) 왜구로부터의 화(禍)가 우려된다는 이유에서 이방간의 유배지를 다시 익주(益州)로 바꾼다. 그러나 1410년(태종 10) 8월에 다시 완산(完山)으로 옮겼다. 1416년(태종 16)에는 형조(刑曹)의 관원과 대간(臺諫)들의 집요한 요구로 이방간과 아들 이맹중(李孟衆)이 받았던 공신녹권(功臣錄券)과 직첩(職帖)이 몰수되었다. 1417년(태종 17)에 완산에서 충청도 홍주(洪州)로 이치 되었으며, 세종 대에 이르러 여러 차례 이방간의 치죄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그러나 당시 상왕으로 있던 태종 그리고 세종의 관용으로 위기를 모면하였다. 1421년(세종 3년) 홍주(洪州)에서 사망하였다.
이방간의 이름은 오랫동안 『선원록(璿源錄)』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1605년(선조 38) 선원록교정청(璿源錄校正廳)의 계(啓)를 계기로 신설(伸雪)이 논의되었다. 그 뒤 1680년(숙종 6) 선원록이정청(璿源錄釐正廳)의 계품(啓稟)에 따라 이방간의 자손들과 함께 『선원록(璿源錄)』에 재록(載錄)되었다.
[묘소]
이방간의 묘소는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 금상동(今上洞) 산59-1에 있다.
[상훈과 추모]
이방간은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 개국공신(開國功臣) 1등, 시호(諡號)는 양희(良僖)이다. 위패는 완주군 봉동읍 구만리 봉강서원(鳳崗書院)에 배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