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0007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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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周昇 |
영어공식명칭 | Jo Ju-seung |
이칭/별칭 | 장일(章日),벽하(碧下) |
분야 | 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덕천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
집필자 | 송만오 |
출생 시기/일시 | 1854년(철종 5) - 조주승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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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903년(고종 40) - 조주승 사망 |
출생지 | 조주승 출생지 - 전라북도 김제시 요촌동(金堤市 堯村洞) |
활동지 | 조주승 활동지 - 전주시|완주군 |
묘소 | 조주승 묘소 -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덕천리 와동 앞산 |
성격 | 서예가 |
성별 | 남자 |
본관 | 김제(金堤) |
[정의]
개항기 전라북도 완주군에서 활동한 서예가.
[개설]
조주승(趙周昇)[1854~1903]의 본관은 김제(金堤)이며, 자는 장일(章日)이고, 호는 벽하(碧下)이다. 조주승은 벽성군(碧城君) 조연벽(趙連壁)의 후손이며, 조하섭(趙夏燮)의 아들이다. 전라북도 김제읍 옥산리[현 김제시 요촌동]에서 태어났다. 벽하 조주승은 시, 서, 화 삼절(三絶)로 서, 화의 맥은 전북미술발전에 많은 공헌을 했다.
[활동 사항]
조주승은 어렸을 때부터 글씨 쓰기를 좋아했다. 진(晋), 당(唐), 송(宋)의 여러 대가들의 글씨에 심취해서 대가들의 서체를 수십 년 동안 꾸준히 정진하면서 익혔다. 그 결과 왕대령(王大令)의 낙신부(洛神賦)와 안노공(顔魯公)의 가묘비(家廟碑) 서체의 진수를 터득했다. 석정(石亭) 이정직(李定稷)의 문하에 들어가 10년동안 글씨와 그림 그리는 법을 익혔다. 조주승 글씨의 부드러운 운치는 오히려 이정직에 앞섰고, 죽(竹)을 그리는 솜씨는 자하(紫霞) 신위(申緯)를 능가한다는 평을 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조주승은 시창(詩唱)과 탄금(彈琴)에 있어서도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성품은 소탈하고 검소했으며, 세속의 영예(榮譽)나 명리(名利)에는 관심조차 없었고, 청빈(淸貧)한 생활로 오직 풍류와 예술의 세계에만 관심을 두었다. 중국 북경(北京)과 남경(南京)을 3년 동안 유람하면서 중국의 학자 및 서예가들과 교우하면서 견문을 넓혔으며, 귀중한 서화(書畵)를 수집해서 돌아와 이를 곁에 두고 감상하기도 했다. 조주승의 서체는 속리산(俗離山) 법주사 일주문(法住寺 一柱門)에 걸려 있는 ‘호서제일가람(湖西第一伽藍)’이라는 현판과 금강산(金剛山) 유점사 대웅전(楡店寺 大雄殿)의 대형 현판을 통해 알 수가 있다. 조주승의 서법은 맏아들 조기석(趙沂錫)과 사위 송헌호(宋憲浩) 등에게 전수되었다.
[저술 및 작품]
조주승의 글씨는 충청북도 속리산(俗離山) 법주사 일주문(法住寺 一柱門)의 현판 ‘호서제일가람(湖西第一伽藍)’, 전주의 ‘추천대(楸川臺)’, 남고산성(南固山城)의 ‘관성묘(關聖廟)’, 지리산 실상사의 ‘백장암’ 현액, 금강산(金剛山) 유점사 대웅전(楡店寺 大雄殿)의 현판 등이 있다. 서화작품으로는 현재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묵죽도」[도판 번호 643호]가 보존되어 있으며, 전북도립미술관 및 개인 소장의 작품이 남아 있다.
[묘소]
조주승의 묘소는 완주군 구이면 덕천리 와동 앞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