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3006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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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紺岳山 碑 |
이칭/별칭 | 빗돌대왕비,설인귀 비,몰자비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남면 황방리 산122임 |
시대 | 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이도남 |
현 소재지 | 감악산 비 - 경기도 양주시 남면 황방리 산122임 N37° 56′ 27.9666″, E126° 58′ 11.34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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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비석 |
재질 | 화강암 |
크기(높이, 너비, 두께) | 162㎝[높이]|75㎝[너비]|20㎝[두께] |
[정의]
경기도 양주시 남면 황방리 감악산 정상에 있는 비석.
[개설]
비스듬히 서 있어 ‘삣뚤대왕비’라고 불렸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빗돌대왕비’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설인귀(薛仁貴)를 기리기 위한 사적비라고도 한다. 또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비라고도 하나 이는 와전인 듯하다. 글자가 잘 보이지 않으므로 몰자비(沒字碑)라고도 한다.
비가 감악산 정상에 서게 된 이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빗돌대왕비는 원래 양주시 남면 황방리 북쪽의 눌목리(訥木里)[일부 지도에는 ‘눌욕리’로 표기되어 있음]에 있었다. 근방의 농민들이 어느 날 같은 꿈을 꾸었는데, 한 노인이 나타나 막무가내로 소를 빌려 달라고 하였다. 이튿날 일어나 보니, 꿈속에서 빌려 주겠다고 한 농민들의 소는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고, 거절한 농민의 소들은 모두 죽어 있었다. 그런데 평상시 산모퉁이에 있던 비석이 어느새 감악산 꼭대기로 옮겨져 있었다는 것이었다. 소문이 퍼지면서 감악산 신령의 행동이라 여기고 치성을 드리는 사람들이 줄을 잇게 되었다고 한다.
[건립 경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원래 감악산 비(紺岳山碑)가 자리한 곳에는 감악사(紺嶽祠)라는 사당이 있었다’고 한다.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는 ‘고려 시대부터 내려온 3척(尺)[90.91㎝] 높이의 석단(石壇)과 오래된 비석, 그리고 설인귀사(薛仁貴祠)가 있다’고 하였고, 『적성현지(積城縣誌)』[1871]에서는 ‘1년에 세 차례 제사를 올리는데, 향(香)·축(祝)·폐(幣)는 영문(營門)에서 받아온다’고 하였다. 이를 종합해 볼 때 감악산 비의 건립 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고려 시대 이전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감악산 비의 존재는 19세기 중반의 문헌에서도 확인된다. 『양주목읍지(楊州牧邑誌)』[1842]에서는 ‘감악산[675m]의 사당 옆에 속칭 설인귀 사적비(薛仁貴史蹟碑)가 있으나 세월이 오래되고 글자가 함몰되어 고증할 수 없다’고 하였다. 『조선지지략(朝鮮地誌略)』[1888],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1908], 『조선지리(朝鮮地理)』[1918]에도 유사한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위치]
파주시와 양주시의 경계를 이루는 감악산 정상부인 양주시 남면 황방리 산122번지에 위치한다.
[형태]
원형으로 쌓은 높이 160㎝가량의 2단 석축 위에 비석 받침·비석·옥개석을 갖추고 있으며, 재질은 모두 백색의 화강암이다. 비석 받침은 네모꼴로 4단의 층을 마련하여 상부로 갈수록 좁아지는 형태인데, 마치 탑의 옥개석 받침을 거꾸로 뒤집어 놓은 듯한 모습이다. 비석은 얇은 판석으로, 오랜 기간 비바람에 의해 마모되어 글자를 알아볼 수 없다. 옥개석은 소형의 맞배지붕 형태이다.
옥개석과 비석 받침의 형태로 보아 감악산 비는 고려 시대 이전의 비석으로 추정되지만 언제 세워졌는지는 알 수 없다. 규모는 비석 받침이 높이 28㎝, 너비 190㎝, 두께 142㎝이고, 비석이 높이 162㎝, 너비 75㎝, 두께 20㎝이며, 옥개석이 높이 27㎝, 너비 93㎝, 두께 38㎝이다.
[금석문]
글자가 마모되어 내용은 알 수 없다.
[현황]
지금도 감악산 자락에는 많은 굿당이 위치하고 있으며, 전국에서 가장 영험한 기운을 내뿜는다는 충청남도의 계룡산에 이어 두 번째로 음기(陰氣)가 강한 산이라고 한다. 일설에는 빗돌대왕비의 비석 갓이 본래 있던 것이 아니라고 한다. 본래의 비석 갓은 감악산 절에 있던 문씨 삼 형제가 팔아버렸다고 한다. 그 후 문씨 삼 형제 중 첫째와 둘째는 벼락을 맞아 죽었고, 셋째는 절에 있던 금부처를 팔아먹고 도망쳤다고 한다. 현재 비석 갓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