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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300792
한자 白仁傑
이칭/별칭 사위(士偉),휴암(休菴),충숙(忠肅),문경(文敬)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양주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권만용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497년연표보기 -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31년연표보기 - 생원시 합격
활동 시기/일시 1537년연표보기 - 식년문과 병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541년연표보기 - 홍문록
활동 시기/일시 1545년연표보기 - 지평, 호조 정랑, 춘추관 기주관, 헌납
활동 시기/일시 1547년연표보기 - 안변에 유배됨
활동 시기/일시 1551년연표보기 - 해배
활동 시기/일시 1565년연표보기 - 승문원 교리
활동 시기/일시 1566년연표보기 - 사도시 첨정, 선공감 부정
활동 시기/일시 1567년연표보기 - 양주목사
활동 시기/일시 1568년연표보기 - 대사간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71년연표보기 - 파주로 낙향
활동 시기/일시 1579년연표보기 - 지중추부사
몰년 시기/일시 1579년연표보기 - 사망
추모 시기/일시 1567년연표보기 - 송덕비 건립
거주|이주지 파주 - 경기도 파주시
부임|활동지 양주목사 - 경기도 양주시
유배|이배지 안변 - 함경남도 안변
묘소|단소 묘소 -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화합로 147번길[효촌리 산26]지도보기
사당|배향지 봉산서원 - 전라남도 나주시 남평면 서산리
사당|배향지 파산서원 -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늘노리
송덕비 경기도 양주시 유양동 양주관아 터지도보기
신도비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화합로 147번길[효촌리 산26]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수원
대표 관직 공조 참판

[정의]

양주목사를 지낸 조선 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수원. 자는 사위(士偉), 호는 휴암(休菴). 증조할아버지는 백효삼(白效參)이고 할아버지는 참교를 지낸 백사수(白思粹)이며, 아버지는 왕자의 스승이었던 백익견(白益堅)이다. 어머니는 단양 우씨(丹陽禹氏)로 우종은(禹從殷)의 딸이다. 첫째 부인은 평택 임씨(平澤林氏)로 아들 백유공(白惟恭)을 낳고 일찍 죽었다. 둘째 부인 순흥 안씨(順興安氏)는 안찬(安璨)의 딸로 안유(安裕)의 후손이다. 자녀는 2남 5녀를 두었다. 아들은 현령 백유항(白惟恒), 승지 백유함(白惟咸)이다. 사위는 주부 조감(趙堪), 안수기(安守基), 진사 신세영(辛世英), 의령 현감 윤조(胤祖), 현감 임색(任穡)이다.

[활동 사항]

백인걸(白仁傑)[1497~1579]은 조광조(趙光祖)의 문하생으로, 김안국(金安國)에게 학문을 배웠다. 송인수(宋麟壽), 유희춘(柳希春), 이이(李珥), 성혼(成渾) 등 사림파 성리학자들과 깊이 사귀었다. 김식(金湜)이 성균관 대사성이 되어 새로운 학풍을 일으키자 뜻을 같이하여 성리학 공부에 매진하였다. 특히 조광조를 존경하여 옆집에 살면서 가르침을 받았고, 관직에 있을 때는 수시로 조광조를 문묘에 배향할 것을 요청하였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조광조의 혁신 정치에 반발한 훈구파가 신진 사림파를 제거한 사건]가 일어나자 슬프고 분하여 금강산에 들어갔다. 다시 세상에 나와 1531년(중종 26) 생원시에 합격하고 1537년(중종 3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훈구파에 눌려 오랫동안 벼슬을 얻지 못하다가 예문관 검열이 되었다. 이때 예문관에서 이조의 인사 행정의 잘못을 기록했던 선례를 되살려 시행하였다. 예조좌랑을 거쳐 남평현감일 때는 학당을 세우고 학장(學長)을 두어 교육에 힘썼다. 그 공로로 품계가 올라갔다.

1541년(중종 36) 홍문록(弘文錄)이 되었고 1545년(명종 즉위년) 지평을 거쳐 호조 정랑, 춘추관 기주관을 역임하였다. 명종 즉위 직후 외척인 윤원형(尹元衡) 일파가 문정왕후(文定王后)를 등에 업고 반대파인 윤임(尹任), 유관(柳灌) 등을 제거한 을사사화를 일으켰다. 이때 사간원 헌납이던 백인걸은 대비가 내린 밀지의 부당함을 주장하다 파직되어 옥에 갇혔으나 정순붕(鄭順朋), 최보한(崔輔漢) 등의 도움으로 풀려났다.

1547년 문정왕후의 수렴첨정과 이기(李芑) 등의 전횡을 비난하는 양재역 벽서 사건으로 윤원형 일파에 의해 안변(安邊)으로 유배되었다. 1551년 풀려나 낙향, 『태극도설(太極圖說)』과 정주학을 깊이 탐구하였다.

1565년(명종 20) 윤원형이 몰락하자 승문원 교리에 등용되어 이듬해 사도시 첨정과 선공감 부정을 지냈다. 1567년(선조 즉위년) 양주목사로 부임하여 공납(貢納)[지방의 특산물로 내는 세금]의 폐단을 없애는 등 선정을 베풀어 고을 사람들이 송덕비를 세워 주었다. 1568년(선조 1) 기대승(奇大升)의 천거로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공조 참의와 대사헌을 역임하고 병조 참판·공조 참판을 지냈다. 이때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수렴첨정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철회시켰다.

선조 재위 초 임금이 아버지 덕흥군(德興君)을 추존하려고 할 때 대부분의 관료가 극력 반대하였으나 백인걸은 임금의 처지를 두둔하여 사림의 탄핵을 받았다. 또 조정 관료들이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질 조짐이 보이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나섰다가 선비들을 해치려 한다는 의심을 샀다. 사림파의 탄핵을 받아 1571년(선조 4) 파주로 낙향하자 임금이 수시로 식량과 편지를 보내고, 대사헌과 우참찬 등의 관직을 주면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579년(선조 12) 지중추부사로 있으면서 이이(李珥)와 함께 동서로 갈라져 다투는 붕당 정치의 폐해를 논하고, 진정시킬 것을 주장하다가 사림들로부터 서인을 편든다는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이런 오해 속에서도 백인걸은 오랫동안 권세를 휘두른 훈구 세력에 맞서 사림파를 유지하는 데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을사사화 때는 자신의 안위를 생각하지 않고 윤원형의 음모에 적극적으로 대항하여 후대에 칭송을 받았다. 외적의 침입에 대비해 국방을 튼튼히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동지춘추관사로 『명종실록(明宗實錄)』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말년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청백리에 뽑혔다.

[학문과 저술]

백인걸의 여러 가지 글을 모은 『휴암집(休菴集)』이 있다.

[묘소]

무덤은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효촌리 산26번지[화합로 147번길]에 있다. 무덤 앞에는 묘비와 상석, 향로석이 놓여 있다. 상석 앞에 장대석으로 단을 쌓고 그 아래에 동자석, 문인석, 망주석 2기씩을 배치하였다. 중간에 4각의 장명등이 있다. 묘역 안 휴암교 건너편에는 수원 백씨 하마비(水原白氏下馬碑)가 있다. 백인걸 선생 묘는 1981년 7월 16일 경기도 기념물 제58호로 지정되었다.

[상훈과 추모]

인조충숙(忠肅)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나 후에 문경(文敬)으로 바뀌었다. 파주 파산서원(坡山書院)과 남평(南平) 봉산서원(蓬山書院)에 배향되었다. 신도비는 묘역 아래쪽 비각 안에 있으며 비좌와 비신, 쌍룡이 조각된 이수를 갖추었다. 송시열(宋時烈)이 글을 짓고, 송준길(宋浚吉)이 썼으며 김수항(金壽恒)이 전액을 썼다. 경기도 양주시 유양동[부흥로 1422번길] 양주 관아지에는 1567년 양주의 백성들이 세운 송덕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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