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4003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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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頌德不忘碑 |
영어의미역 | Memorial Stone for Eulogy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경상남도 양산시 주진동 63-1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송봉구 |
성격 | 송덕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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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시기/일시 | 1735년|1915년 |
관련인물 | 양유하|정기호|엄주원 |
재질 | 석비 |
높이 | 180㎝[양유하비]|86㎝[정기호비]|107㎝[엄주원비] |
너비 | 60㎝[양유하비]|34㎝[정기호비]|36㎝[엄주원비] |
소재지 주소 | 경상남도 양산시 주진동 63-1 |
[정의]
경상남도 양산시 주진동에 있는 조선시대 및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불망비.
[개설]
1731(영조 7)과 1732년에 대가뭄으로 양산 지방에 흉년이 들자 조정의 예산 부족으로 백성들을 진휼하지 못하자 서울에 사는 양유하(梁有夏)가 자신의 재산으로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였고, 승려를 모아 굶어 죽은 시신을 묻어주고 혼백을 불러 제사를 지내주었다 한다. 이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비석이 세워졌다.
또한 정기호는 인심이 후하여 소작농들에게 흉년에는 소작료를 받지 않았다 한다. 이에 소작인들이 뜻을 모아 불망비가 세워졌다. 엄주원은 면민들에게 경제적 시혜를 베풀자 이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면민들이 비를 세웠다.
[위치]
양유하의 비는 양산시와 부산시의 경계인 지경고개에 있고, 정기호의 비는 양산시 웅상도서관 아래에 있다. 엄주원의 비는 양산시 북정동 이원수공원 안에 있다.
[형태]
양유하의 비의 높이는 180㎝, 너비는 60㎝이고, 정기호의 비는 높이가 86㎝, 너비가 34㎝이다, 엄주원의 비는 높이가 107㎝, 너비가 36㎝이다.
[금석문]
양유하 비의 금석문은 ‘서울에 사는 가선대부 양유하의 은혜를 잊지 못해 세운 비로서, 이어진 기근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서 이미 제사를 지내고, 사람들이 굶주림에 양공이 많은 재산을 내어 구휼하니 누가 사적으로 할 수 있겠는가? 양공은 이때 의를 일으켜 곡식을 날라서 굶주림을 건지고, 재산을 나누어주어 은혜를 베풀고, 승려들을 모아서 뼈를 묻어주고, 제사를 지내서 혼을 위로해 주니 영혼도 감격하여 오랫동안 떠나지 않으니 아름다운 이름을 돌에 새겨 후세 사람들에게 보여주노라. 옹정 13년에 세웠다(京居 嘉善大夫 梁公有夏 胎夏不忘碑 銘曰 荐歲大殺 辛壬墍祭 餓菜顚連 萊梁倍蓰 官賑旣䛵 私賙孰試 公夲積德 維時奮義 輦穀濟飢 散財施惠 募僧瘞骨 招魂以祭 感檄幽明 息延揭厲 紀石頌美 來示來世 雍正十三年 月日立)’라고 되어 있다.
정기호 비의 금석문은 앞면에 ‘정기호혜렴불망비(鄭基鎬惠廉不忘碑)’라 되어 있고, 이어 ‘정기호가 자기 땅을 남에게 빌려주어 농사를 지음에 가을에 익은 곡식을 주인에게 세를 바칠 때 정기호는 적게 받았다. 그래서 농사를 지은 사람이나 세금을 받는 사람 모두 좋았는데 이것은 모두 정기호가 가난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푼 것이다. 세금 받은 것도 먼저 나라에 바치는 세금을 계산하고 나머지는 농사 지은 사람들에게 돌려주었으니 그 은혜는 비석과 더불어 함께 오래갈 것이다(私田借人 秋熟相分 自取極廉 兩美倂光 唯貧是惠 先計國稅 耕者利厚 石與同久)’라고 되어 있다. 뒷면에는 1916년 11월에 경작인들이 비를 세웠다고 쓰여 있다.
엄주원의 비에는 ‘사인엄주원시혜불망비(士人嚴柱元施惠不忘碑)’라 되어 있고, 이어 ‘읍내 마을이 어려움에 재물과 곡식을 나누어주니 그 은혜가 빛나고, 자비로운 행동이 더욱 넘쳐서 긴 세월 동안 효자와 열녀가 더욱 나오니,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 보더라(軫邑諟岡 財穀猶輕 以農以爨 精彩迺煥 慈善有餘 一片千秋 孝烈益燦 九洞仰鑽)’라고 쓰여 있고, 뒷면에 ‘1914년 9월에 읍내 사람들이 세웠다’라고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