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4031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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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錦山- |
영어의미역 | Geumsan Village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경상남도 양산시 동면 금산리 금산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규봉 |
[정의]
경상남도 양산시 동면 금산리에 있는 자연 마을.
[명칭유래]
금산의 옛 이름은 금산리(琴山里)·금진(琴津)·금호(琴湖) 등이었다. 1914년 이전까지만 해도 금산리(琴山里)·금산동(琴山洞)으로 기록되어 있다. 거문고 ‘금(琴)’자가 붙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금정산 장군봉에서 뻗어 내린 산맥을 좌우로 금산리가 형성되어 있는데, 좌우에 냉정천과 고천천의 두 개울이 흐르고 있었다. 마을이 형성된 부분의 냉정천 하부에는 용추(龍湫)폭포가 있고, 고천천 하부에는 금호(琴湖)폭포가 있었다. 비가 많이 오는 날에는 폭포에서 흐르는 물소리가 마치 고요한 밤에 거문고 소리로 들린다는 뜻에서 거문고 ‘금(琴)’자가 붙게 된 것이다. 산이 많아 살기 좋은 비단 같은 곳이란 뜻으로 비단 ‘금(錦)’자가 붙게 되었다고도 한다.
[형성 및 변천]
금산마을에는 삼한시대 이전부터 사람이 산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고증이 없어 알 수는 없다. 처음 입촌한 사람은 곡부공씨(曲阜孔氏)라고 전하지만 이 또한 증명하기는 어렵다. 집중적인 성촌 시기는 1500년대로 추정되고 있다. 단종 복위 운동으로 인해 세조 때 처형당한 충의공(忠毅公) 김문기의 후손인 김녕김씨 김국기가 1590~1597년경에 금산에 입촌했다. 김녕김씨와 연안이씨가 같은 시기에 입촌하였으며, 그 후 1730년에 김녕김씨 21세손이 입향하였다.
이후 동래정씨 정방인, 밀양박씨 박치형이 각각 입촌했다고 한다. 곧이어 의성김씨가 입촌하였고, 점차 가구 수가 늘어났다. 1922년부터 시작된 메기들 개수 공사 때 외지인이 공사 현장에 유입되면서 가족을 데리고 와 가구 수가 한꺼번에 많이 늘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금산은 1877년(고종 14) 동래군에서 양산군으로 편입되면서 하동방(下東坊)으로 있다가, 1914년 행정구역 변경 때 동면에 속하게 되었다.
[자연환경]
금산마을은 동면사무소로부터 서남쪽 약 5㎞ 떨어진 금정산 서쪽에 위치한 5개 마을(계석마을·석산마을·금산마을·가산마을·호포마을) 중 중앙에 위치한 교육 문화의 선구적 역사를 가진 마을이다. 양산천을 경계로 물금읍과 마주하고 있다.
[현황]
2007년 12월 31일 현재 총 420가구에 1,162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금산마을 내에는 동산초등학교, 김녕김씨 문중의 재실인 금원재(琴元齋), 달성서씨의 선조를 모시는 대덕재(大德齋)가 있다. 1922~1927년 양산평야[메기들]가 개간되기 전에는 인근 어느 마을보다 기름진 땅이 많았다. 금산마을은 삼한시대 이전부터 사람들이 살아온 유서 깊은 마을이다.
금산마을은 양산신도시 개발 및 수질 정화 공원 건설 등으로 마을 앞 들이 모두 수용되어 현재 농토는 거의 사라지고 산답(山沓)만 남은 상태이다. 특히 길 옆 마을 전체가 양산신도시 구역에 편입·수용되는 바람에 이곳에서 생활했던 16가구가 이주하였다.
양산신도시 지구에서 제외된 지역도 택지 개발 및 공장지로 변해 옛 모습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그나마 뒷산 대부분이 개발 제한 구역에 묶여 있어 일부를 제외하고는 옛날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또한 금산훼밀리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외지인이 많아진 것도 큰 변화 중의 하나이다. 양산신도시 개발이 시작된 1996년부터 농촌의 분위기는 사라지고 점점 도시화되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