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4033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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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龍淵- |
영어의미역 | Yongyeon Village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용연리 용연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효원 |
[정의]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용연리에 있는 자연 마을.
[명칭유래]
폭포(소)가 있어 용연이라 이름하였다.
[형성 및 변천]
용연마을의 원래 이름은 중방(中坊)이다. 신라시대에 원효대사가 현 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 척판암(擲板庵) 혹은 천백암(千百庵)에 있다가, 중국 장안의 운제사(雲際寺)[산동성의 법운사(法雲寺)라고도 함]에서 온 천 명의 제자를 이끌고 지금의 동래 범어사 쪽에 수도처를 마련하기 위하여 원적산을 넘어왔을 때, 내원사 입구 현재 산신각이 있는 곳에 이르자 갑자기 큰 호랑이(철장을 진 신령이라고도 함)가 대사 앞에 엎드려 길을 가로막으며 몸과 꼬리로 원적산을 가리키는 것을 보고 여기에 암자를 짓고 정착했다는 전설이 있는데, 그 중 ‘중간에서 가로 막는다’라고 하여 ‘중방’ 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마을의 여러 구전을 종합해 보면, 중방에 처음으로 마을이 형성된 것은 15세기경 현 현듬계곡 제일 상류인 ‘관천동(觀天洞)’에 사람이 정착하여 산과 더불어 생계를 유지하면서부터인 듯하다. ‘관천동’에는 당시 순천김씨 후손인 김기주(金基株)라는 사람이 삼수당(三秀堂)이라는 초당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대둔사(大芚寺)가 있었으나 수몰로 폐허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는데, 현재 그 자리에는 한듬마을이 들어서 있다. 한듬마을 역시 1920년대 화재로 마을이 모두 소실되었다가 복원되기는 하였으나, 1950년대 초 빨치산의 방화로 다시 소실되어 인구가 급감했다. 바깥 용연에 처음 이주해 온 사람은 진주강씨가 먼저이고, 그 뒤에 경주최씨와 학성이씨가 들어왔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용연이라는 이름으로 작은한듬·사찰·숲골 등을 중방이라 부르고 용소(龍沼)·외평(外平)·점리(店里)를 합하여 ‘용연’ 이라 불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용소마을은 본동에서 약 2㎞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18세기 중반에 경주김씨와 달성서씨가 이주해 왔다고 전해지고 있다.
[현황]
2007년 12월 31일 현재 총 503가구에 1,494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천성산 아래 위치한 용연마을은 내원사라는 사찰을 중심으로 상권을 이루고 있다. 주요 지명은 가마바위·갈대골·안걱암·관천골·한듬마을·관천영·만수동폭포·금문바위가 있다. 금문바위는 금책골 밑에 있는 바위로 햇살이 비치면 금빛 무늬가 나타난다.
소금강은 내원사 골짜기 중간 지점으로 양쪽으로 마치 금강산을 축소하여 놓은 것처럼 바위벽과 숲이 무성했다고 한다. 용소골 만수동폭포 옆에는 만수대가 있는데, 상북면 상삼리의 만석부자인 촌은(樵隱 김교환(金敎桓)이 1936년경 축조했다고 한다. 옛날에는 불지사(佛池寺)라고 하는 암자가 있었다고 전하는 데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시설로는 하북농업협동조합 용연지소·새마을금고 용연분소·새진흥 목화아파트·저수지(용연낚시터)·프린스모텔·금호모텔 외 다수의 숙박 시설과 민박 시설이 있고, 동국제일의 선원인 내원사를 비롯하여, 익성암·노전암·금봉암·성불암 등이 있다.
국도 35호선을 따라 통도사 조금 못가서 오른편에 위치한 용연마을에는 사시사철 관광객이 찾아와 휴식을 즐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