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4034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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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晩燾 |
영어음역 | Yi Mando |
이칭/별칭 | 관필(觀必),향산(響山)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남도 양산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현라 |
[정의]
조선 말기 양산군수를 역임한 문신.
[가계]
본관은 진성(眞城). 자는 관필(觀必), 호는 향산(響山). 이황의 11세손이다. 아버지는 대사성 이휘준(李彙濬)이며, 이휘철(李彙澈)에게 입양되었다.
[활동사항]
1866년(고종 3) 정시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성균관전적·병조좌랑·사간원정언을 지냈다. 이후 홍문관부수찬·장령·지평·병조정랑·교리·응교·사간·집의 등을 역임했다. 1876년 강화도조약을 체결할 때 최익현(崔益鉉)이 반대 상소를 올려 사헌부와 사간원의 합동 공박을 받았는데, 그때 집의로서 탄핵문의 문구가 부당하다고 말소했다가 대사헌의 미움을 받아 파직되었다.
다시 복직되어 사성·응교·장악정(掌樂正) 등을 지낸 후, 그해 가을 양산군수(梁山郡守)가 되었다. 이때 흉년을 당하자 구휼미를 방출하고 조세를 감면했으며, 관찰사의 가렴주구에 항의하여 군민들의 칭송을 받았다. 1878년 다시 집의에 임명된 이래, 홍문관·사헌부·사간원의 요직을 역임했다. 1882년 공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사임했고, 이어 동부승지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 뒤 백동(栢洞)에 작은 서재를 지어 경학을 연구하다가,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예안에서 의병을 일으켜 활약했으나 관군에게 패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을사오적을 공박하는 상소를 올렸다. 1907년 순종이 즉위한 뒤 가선대부에, 1910년 자헌대부에 올랐다. 1910년 8월 한일합병이 단행되자 유서를 쓰고 단식에 들어가 24일 만에 순국했다.
[저술 및 작품]
단식을 시작한 날에서 목숨을 거둔 날까지 24일간의 일기인 「청구일기(靑丘日記)」가 있다. 죽어간 장소가 청구리였기에 붙인 이름이다. 탈초·번역문이 『향산전서(響山全書)』에 실려 있다.
[묘소]
묘소는 경상북도 안동시 안막리 향산고택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