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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400008
한자 爲國忠節-象徵-金完將軍
이칭/별칭 자구(子具),양무(襄武)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남도 영암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정윤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597년 - 김완 무과에 급제
특기 사항 시기/일시 1625년 - 김완 진무공신에 책봉, 인조로부터 영정을 하사 받음
특기 사항 시기/일시 1748년 - 김완 양무 시호를 받음
출생지 김완 장군 출생지 - 전라남도 영암군 서호면 몽해리 899지도보기
김완 고택 김완 고택 - 전라남도 영암군 서호면 화송리 159-1지도보기
사당 부조묘 - 전라남도 영암군 서호면 화송리 159-3지도보기
김완 묘소 - 전라남도 영암군 시종면 만수리 386-2지도보기
신도비 김완 장군 신도비 - 전라남도 영암군 시종면 만수리 386-2지도보기

[정의]

정유재란과 이괄의 난 평정에 공을 세운 조선 후기 영암 출신의 무신.

[개설]

김완(金完)은 1577년(선조 10) 8월 23일 영암군 서호면 몽해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자구(子具)이다. 1597년 무과에 급제한 후 무신이 되었다. 정유재란 때 활약하여 전공을 세웠으며, 1624년(인조 2)에 발생한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진무공신(振武功臣)에 올라 학성군(鶴城君)으로 책봉됨과 동시에 「금궤 철권」 및 영정을 하사받았다. 이어 훈련원 도정·황해도 병마절도사를 지낸 후, 고향에 돌아와 1635년 2월 2일 영암군 서호면 화송리 자택에서 59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사후 병조 판서가 추증되었으며, 1748년(영조 24)에 양무공(襄武公)이란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김완 장군의 가계]

시조는 가락국(駕洛國) 태조 김수로왕이며, 중조는 수로왕의 51세손 감무공(監務公) 김익경(金益卿)이다. 5대조는 성균관 생원 김연(金鍊), 고조할아버지는 배천 군수를 지낸 김응문(金應文), 증조할아버지는 통례원 좌통례로 추증된 김한성(金漢城), 할아버지는 공조 참의로 추증된 김사종(金嗣宗)이다. 이성 현감(利城縣監)을 지낸 학천군(鶴川君) 김극조(金克祧)천안 전씨(天安全氏) 사이에서 맏이로 태어났다. 김완 장군의 아버지 김극조는 1534년 5월 15일 영암 구음평리에서 태어났으며,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올라 만호·광양 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김완 장군의 맏아들은 김여수(金汝水)로 1624년 무과에 장원 급제하였고, 사헌부 감찰·제주 목사 등을 지냈다.

[장군의 탄생 설화와 몽해 마을 지명 유래]

영암군 서호면에 있는 김완 장군의 고향 마을 이름은 ‘몽해(夢海)’이다. 현재 이곳은 간척으로 지형이 변하여 들판이 되었지만 원래는 영암만의 바닷물이 인근까지 들어왔던 곳이다. ‘몽해’라는 아름다운 지명이 생겨난 것은 김완 장군의 탄생 설화와 관련이 있다. 400여 년 전 어머니 천안 전씨는 장군을 임신했을 때 “맹호가 품속으로 달려오고 영암만 바닷물이 치마폭으로 몰려드는 상서로운 꿈”을 꾸었으며, 출생할 때는 “흰 기운이 방안에 가득하였다가 하루가 지난 후에야 흩어지니 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고 한다. ‘몽해’라는 지명은 우리말로 하면 ‘꿈 바다’라는 의미이다. 이전에는 ‘구음평(九音坪)’이라 불리던 곳이었는데, 김완의 어머니가 영암만 바닷물이 치마폭에 몰려드는 꿈을 꾼 이후 마을의 지명으로 정착되었다.

[정유재란의 숨은 영웅, 조선 무신의 기개를 보여 주다]

김완은 어려서부터 영특했으며, 재주와 지략이 뛰어나고 활쏘기와 말타기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김완의 기개와 용맹함은 정유재란 시 남원 지역의 왜적들을 섬멸하는 과정에서 잘 드러난다.

1597년 정유년에는 왜적들이 조선을 다시 침범해 왔고, 이로 인한 피해가 각처에서 속출하는 상황이었다. 당시 김완은 경상도 방어사 고언백(高彦伯)의 막하에 있다가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사방이 왜적들로 막혀서 낭패를 겪게 되었다. 이때 김완은 남원 지역의 진사 조경남(趙慶南)·정사달(鄭士達) 등과 의기투합하여 일대의 왜적들과 싸울 것을 결의하였다. 당시 전력은 겨우 20여 명에 불과하였고, 활을 가진 자는 김완을 비롯하여 겨우 네 사람뿐이었다. 김완 등은 왜적을 궁장현[현 전라북도 남원시 주천면 호기리]으로 추격하였고, 그 일대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조경남과 함께 용맹을 발휘하여 한 발의 실수도 없이 활을 쏴서 왜적을 공격하였다. 전투 과정에서 팔이 부러지는 큰 부상을 당하였는데, 이를 본 왜적이 김완을 죽이기 위해 추격해 왔다. 이때 조경남이 한 발의 화살로 김완을 추격하는 왜적을 쓰러뜨려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팔이 부러진 김완은 박언양·박필남과 함께 몽둥이를 들고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아침부터 오후까지 치열한 접전을 펼쳐 20명의 왜적을 참살하였고, 적에게 붙잡혀 있던 고한부 등의 포로를 구출하였다.

이후 곡성에 주둔해 있던 왜적들이 요천(蓼川) 지역에 침범하자 출전하여 수많은 적의 머리를 베었고, 구례 산동 지역에 왜적들이 진을 쳐서 피해가 많다는 제보를 듣고 조경남과 함께 군사 10여 명을 이끌고 적진을 습격할 것을 계획하였다. 이때 양덕해와 고민덕이 2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합류하였다. 세 갈래로 나누어서 왜적을 습격하니, 적들은 혼란에 빠졌다. 이 전투에서 왜적 50여 명의 머리를 베었고, 나머지 잔병들은 모두 도망쳤다.

이후 조경남과 작별하고 원래의 목적지였던 영암으로 향하다가 남원 황산(荒山) 장치(獐峙)에서 다시 왜적을 만나 홀로 수십 명의 머리를 베었다. 이때 흘러내린 왜적의 피가 바위를 물들여 사람들이 바위 이름을 ‘혈암(血巖)’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김완은 이때의 공으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이괄의 난’으로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다]

이괄(李适)은 조선 후기의 무신으로, 인조반정 때 공을 세운 후 후금과의 국경 분쟁을 막기 위해 부원수 직책으로 변방의 수비를 맡고 있었다. 그러다가 공신들의 횡포에 적개심을 품게 되었고, 집권층과 갈등을 겪게 되자 난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괄의 부대는 승승장구하며 단숨에 서울까지 입성하였다. 우리 역사상 지방에서 난을 일으켜 수도를 점령한 사례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에 인조 임금을 비롯한 대신들은 서울을 떠나 충청도 공주로 피난을 떠났다.

그러나 결국 시간이 흐르면서 도원수 장만(張晩)을 중심으로 한 관군에 의해 이괄의 난은 진압되었는데, 당시 난을 진압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이 김완 장군이었다. 이괄이 난을 일으킨 이후 관군은 전력의 열세로 인해 뾰족한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김완이 휘하의 군사를 이끌고 장만 도원수와 합류하면서 전세는 역전되었다. 장만이괄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김완이 내세운 계책을 받아들이고, 김완을 좌선봉장으로 삼았다. 한때 장만은 간사한 자들의 말을 믿어 김완을 사지(死地)로 몰아세운 적이 있던 인물이었다. 장만은 “내가 한때 공을 죽이려 한 적이 있었는데, 이제 그대가 나를 살리니 만일 당시 공을 죽였다면 참으로 천고의 죄인이 될 뻔하였다.”라고 하며 전장에서 다시 만난 김완을 각별히 반겨주었다. 김완은 과거의 개인적인 악연에 연연하지 않고 오직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는 데만 힘을 모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괄의 부대가 수가 많으니, 전면전을 하는 것보다는 어쩔 수 없이 반란군에 합류한 병사들을 회유하는 계책을 마련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그 결과 반란군에서 관군으로 투항해 오는 군사들이 줄을 이었다.

1624년 2월 9일 장만이 작전을 위해 장수들을 소집하자 김완은 여러 장수들과 파주(坡州) 노상(路上)에서 토벌책을 논의한 후, 말을 타고 출정하여 안현(鞍峴)을 점거하고 고개의 서쪽 수비를 전담하였다. 11일 새벽 적의 한 부대가 김완의 진영을 공격해 오자 전력을 다해 막아내어 적들을 물리쳤다. 이날 밤 이괄은 수백 명의 패잔병을 이끌고 수구문(水口門)을 빠져나와 광주(廣州)로 달아났다. 관군의 추격으로 이괄군은 뿔뿔이 흩어졌고, 이괄은 2월 15일 밤 이천의 묵방리(墨坊里)에 이르러 부하 장수들의 배반으로 참살당했다. 이로써 이괄의 난은 평정되었고, 인조는 22일 환도하였다. 김완이괄의 난을 평정하는 데 세운 공로를 인정받아 삼등훈에 책록되면서 학성군(鶴城君)에 봉해졌고, 1748년 영조로부터 양무(襄武)라는 시호를 받았다.

[장군의 묘역에 말무덤을 함께 만들다]

한평생 나라를 지키는 무신으로 살았던 김완 장군은 1635년 59세의 나이에 고향인 영암에서 서거하였다. 김완의 묘소는 원래 1653년 4월 30일 해남현 동북 선산에 예장하였다가 83년 후인 1718년 현재 위치인 영암군 시종면(始終面) 만수리 386-2번지로 옮겨졌다. 특이하게도 장군 묘소의 하단에는 준마총이라 불리는 작은 묘가 함께 조성되어 있다. 이 묘는 김완 장군이 아끼던 애마의 묘이다. 장군이 세상을 떠나자 장군의 애마 역시 하늘을 우러러 오랫동안 큰 소리로 울다가 쓰러져 죽었다고 한다. 자신이 섬기는 장수가 운명을 달리하자, 전장을 누비던 장군의 애마도 숨이 다하게 된 것이다. 이런 연유로 장군의 묘역 아래에 준마총이 조성되었고, 장군의 애마는 지금도 김완 장군의 옆을 지키고 있다.

[영암에 남아 있는 김완의 문화 유산]

김완은 나라가 위기에 빠질 때마다 홀연히 일어나 목숨을 바쳐 싸운 조선의 무신이다. 고향인 영암에는 김완 장군의 위국충절의 정신을 기리기 위한 관련 유적이 다양하게 남아 있다. 가장 대표적인 유산은 김완 장군의 생존 시 모습을 그린 「김완 초상」인데, 보물 제1305호로 지정되었으며 서호면 화송리에 진영을 모신 사우가 건립되어 보존되고 있다. 같은 장소에 김완 장군의 신주를 봉안하여 대대로 후손들이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국가에서 허락한 부조묘(不祧廟)가 있으며, 부조묘 바로 옆에는 김완 장군이 살다가 서거하였던 고택이 남아 있다. 이 외에도 서호면 몽해리 899번지에 탄생지 기념비가 세워져 있으며, 시종면 만수리에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묘역 인근에는 김완 장군 신도비도 세워져 있다.

이렇듯 영암의 대표적인 역사 인물인 김완 장군과 관련된 여러 가지 유적들이 영암 지역에 잘 보존되어 있어, 김완 장군을 참배하기 위한 많은 이들의 방문이 이어지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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