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400016 |
---|---|
한자 | 伽倻琴散調-創始者金昌祖-靈巖-名律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라남도 영암군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이윤선 |
[정의]
가야금 산조 창시자 김창조와 영암의 가야금 전통.
[개설]
악성(樂聖) 김창조(金昌祖)[1856~1919]는 영암군 영암읍 회문리 세습 율객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회문리는 풍류객들이 자주 드나들던 월출산 자락의 산세 수려한 곳이어서 어려서부터 무의식적으로 음악 수업을 했다고 볼 수 있다. 7~8세 때부터 가야금을 연주하기 시작하여 천부적인 재능을 보였고 대금, 퉁소 등 모든 악기를 잘 다뤘다. 30세가 되면서 연주 겸 후학들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1890년부터 1895년 사이에 산조(散調)라는 음악 형식을 완성하게 된다. 1915년 60세를 넘기면서 전주와 광주, 심지어 대구 등지를 오가며 연주와 후학 양성에 힘을 쏟았다. 가야금 병창, 해금, 젓대, 피리, 단소 등 거의 모든 악기에 능했다. 64세 되던 1919년 다시 광주로 돌아와 광주 북문안의 어느 집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김창조 가야금 산조의 탄생과 완성]
김창조가 타계한 후에도 그의 산조는 생명력을 잃지 않고 널리 보급되어 일세를 풍미하였다. 더불어 김창조에 대한 예술적 평가도 더욱 높아졌다.
김창조의 다각적인 활동 가운데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창작 활동이다. 김창조가 남긴 가야금 산조를 통하여 우리는 뛰어난 예술성을 발견하게 된다. 1958년 북한에서 발행한 정남희, 안기옥의 『가야금 교본』에도 김창조를 가야국의 우륵 이후 가장 뛰어난 연주가이며 탁월한 작곡가로 소개하고 있다.
가야금 음악은 6세기에 우륵에 의하여 창시된 이후 계속 발전해 왔다. 가야금은 창안된 이후 민간의 대표적인 현악기로 사랑을 받아왔으며, 세기를 이어 명수들이 배출되고 그들의 창작 노력과 결실도 축적되었다.
김창조가 활동을 전개하던 19세기 중엽에는 이전 시기의 가야금 악곡들이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때 가장 널리 보급된 민간 기악곡으로는 시나위[신아오, 신아위 또는 신아우로도 부름]가 으뜸이었다. 산조가 나오기 전 기악곡의 으뜸이었던 시나위는 원래 무속 음악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었으며, 남도의 시나위는 무속 음악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에 그것이 장단에 반영되었다. 시나위의 장단은 민장단과 살풀이장단으로 구성되어 있는 바, 살풀이장단은 무속 음악에 오랫동안 쓰인 장단 형태였다.
또한 당시 봉창취도 기악 독주곡으로 널리 보급되고 있었는데, 봉창취는 20세기 초에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이 밖에 기악의 독주, 중주, 합주 등에서 누구나 으레 겸비하여 연주하던 기본 악곡은 영산회상[정악 또는 풍류라고도 한다]인데, 이는 본래 기악 합주곡이었으나 독주곡으로도 이용되었다.
이 시기에 가야금은 병창을 앞세우고 등장하였다. 이는 가장 대중적인 종목으로 당시 연주회 때마다 대성황을 이루었다. 그러나 모든 악기들이 그러하였던 것처럼 당시 가야금은 흔히 민요의 선율들을 기악화하여 가창자들의 반주나 간단한 독주용으로 연주되었다.
이에 기악 음악에 대한 미학적 욕구를 채우지 못한 민중들은 과거 악곡들의 되풀이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그들은 생활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현실적인 기악곡들을 요구하게 되었으며, 음악의 폭을 넓혀 생활에 활력을 불어넣어 줄 수 있는 문화적 욕구에 응답해 줄 것을 기대하였다. 이는 성악 분야의 판소리, 잡가, 단가, 사거리 등 많은 종목들이 민중들의 미적 기호를 충당하고 있는데 비하여 기악 분야의 진전이 미진하였기 때문에 민중들이 이 분야에 대한 더 높은 미적 요구를 제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악 음악에서의 새로운 전환, 이는 당시 기악 음악 분야에 제기된 당면 과제가 아닐 수 없었다.
기악 음악 분야에 제기된 이러한 민중들의 요구는 당대의 사회적 상황과도 깊은 관계가 있었다. 조선 말엽인 19세기 중엽은 1862년(철종 13)의 진주 민란, 1866년(고종 3)의 병인양요, 1871년의 신미양요, 1876년의 병자수호조약, 1894년 동학 혁명 이후 일본과 청나라의 세력 다툼, 1905년의 을사늑약, 1910년의 한·일 합방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들과 연관하여 정치적 부패와 경제적 몰락 및 이에 따르는 사회적 혼란과 외세의 침입, 그리고 농민들의 항거 등이 줄을 잇는 불안한 시기였다.
산조는 이처럼 조선 봉건 사회가 마지막 붕괴 과정에 들어서던 때, 특히 농민 혁명의 시기로 일컫는 1890년대를 역사적 배경으로 하여 완성되었다. 이 당시 농민들은 봉건적 사회 체제에 대한 증오가 극도에 달했으며 이에 대한 항거 정신이 적극화·행동화되고 있었다. 당시 민중들의 정신세계에는 깊은 사유와 적극적인 움직임이 깃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산조의 예술적 형상화의 바탕에는 당시 사회의 역사적 현실이 깊이 연관되어 있었다. 산조의 형상화 면에서의 뛰어난 특징은 표현의 섬세함과 적극성, 넓은 폭과 정서성에 있으며 총체적으로는 사람의 심정을 크게 감동시킬 수 있는 다양한 극적 대조에 있었다. 김창조는 가야금 산조를 창작함으로써 존망의 위기에 처한 조국의 현실에 응답하였고, 민중들의 항쟁 사상과 정서 생활에 서정적인 예술의 혼을 심어 주었던 것이다.
[김창조의 뒤를 이은 영암의 가야금 명인들]
영암은 이와 같은 가야금 산조의 전통을 창조하고 그 맥을 이은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김창조의 뒤를 이은 수많은 명인들의 출현이 그것을 말해 준다.
안기옥(安基玉)은 나주군 남평면 대교리에서 세습적인 기악 연구가 안영길의 장남으로 태어났는데, 김창조에게 10여 년을 사사한 수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비록 나주 출신이긴 하지만 영산강 권역에서 보면 영암과 문화적으로 분리될 수 없는 지역이다.
한성기(韓成基)는 영암군 군서면 모정리에서 출생하였는데, 김창조의 대표적인 제자 중 한 사람이다. 부모가 일찍 세상을 떠난 관계로 군서면 모정리 태생지에서 결혼할 때까지 맏형 한만기와 함께 살면서 김창조에게 가야금 산조를 사사하였다고 한다. 이후 한성기는 목포, 장흥, 대구 등지에 거주하면서 여러 사람에게 가야금 산조를 전파하였다. 특히 김창조에게 전수받은 가야금 산조를 김죽파(金竹坡)에게 전수하여 김죽파류 가야금 산조의 근간이 되게 하렸다.
그러나 한성기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으며, 김죽파 생존 시 회고담에 의해 선율과 일화가 전한다. 문재숙(文在淑)이 집필한 『김죽파 가야금 산조 연구』에 따르면, 한성기는 1921년 김죽파가 11세 되던 해부터 목포에 살고 있던 김죽파의 양아버지 양기환의 집에서 3년간 기거하면서 김죽파에게 가야금 산조를 가르쳤다고 한다. 이때 한성기는 김죽파에게 풍류, 산조, 병창 등을 가르쳤다.
김죽파는 영암군 덕진면 영보리에서 아버지 김낙권과 어머니 오씨 사이에서 장녀로 출생한 김창조의 손녀이다. 김창조에게 가야금을 배워 수많은 후예들을 길러 낸 가야금 유파 창시자이기도 하다. 8세 때 할아버지로부터 가야금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할아버지가 죽은 뒤 11세부터 13세까지 한성기로부터 산조와 풍류, 그리고 가야금 병창을 배웠다. 또한 협률사(協律社)에 참가하여 전라도를 중심으로 활약하였다. 1926년 16세에 상경하여 조선 권번에 적을 두고 여류 가야금 연주자로 최고의 명성을 떨쳤다. 김죽파는 가야금 이외에도 김봉이(金鳳伊)·임방울(林芳蔚)·김정문(金正文)에게서 판소리를, 한성준(韓成俊)에게서 승무를, 그리고 오태석(吳太石)·심상건(沈相健)·박동준(朴東俊)에게서 병창을 배웠다. 1932년 22세에 혼인한 다음해부터 모든 연주 활동을 중단하였다. 6·25 전쟁이 끝나고 사회가 안정되기 시작한 1955년경부터 일반인들에게 가야금을 가르치면서 음악 활동을 다시 시작하였다. 할아버지 김창조와 한성기로부터 배운 산조에 176장단과 무장단의 세산조시를 작곡하여, 진양조·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휘모리·세산조시로 이어지는 ‘김죽파류 가야금 산조’의 틀을 완성하였다.
김병호(金炳昊)는 영암군 시종면에서 아버지 김기봉과 어머니 박연례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한학을 배우던 1915년 무렵 김창조에게 입문하여 가야금을 배웠고, 독자적인 유파를 창시한 대표적 명인이 되었다. 김병호는 김창조와 고향이 같아 음악의 인연을 맺을 수 있었으며, 타고난 음악성과 총명함으로 스승의 가락을 이어받았다. 훗날 자신의 예술적 감성을 더하여 독특한 엇모리 가락까지 짜 넣음으로써 현재 전하고 있는 ‘김병호류 가야금 산조’를 완성하였다. 가야금 산조는 물론 판소리, 아쟁, 가야금 병창에도 능했던 김병호는 1936년 조선 성악 연구회 직속 창극좌의 단원으로 활동하였고, 1937년부터 1939년까지 근대 최고 판소리 명창이었던 임방울 창극단의 일원으로 활약하였다. 1952년경 부산 동래 권번의 가야금 교사로 재직하였고, 1954년에는 임춘앵이 이끄는 여성 국극 동지회 악사로도 활동하였다. 김병호는 1959년부터 인천 여자 고등학교에서 전통 음악 강사로 재직하다가 1961년 이후 국립 국악원, 서울 대학교, 국악사 양성소 등에서 연주 및 후진 양성에 전력하였다. 1968년 8월에 췌장암으로 58세의 길지 않은 생애를 마쳤다.
최옥삼(崔玉三)은 장흥읍 건산리에서 가난한 소작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김창조의 수제자 한성기와 정운룡에게 가야금을 배워 유파를 창조하였다.
이처럼 김창조의 맥을 이은 산조는 남북으로 갈라져 전승 발전하게 된다. 남한의 가야금 산조 변천 과정을 보면, 가야금 산조의 창시자 김창조 이후 강태홍류, 김병호류, 심상건류, 성금련류, 김윤덕류, 최옥삼류[함동정월], 김죽파류, 서공철류, 정남희제 황병기류 등이 있다. 그중 김죽파는 김창조, 한성기의 가락에 심상건의 영향을 가미한 독자적인 가락을 넣어 현재 전하는 55분 분량의 산조를 완성하였다. 북한의 산조는 35분 분량의 김창조류 원형을 유지하고 있으며, 안기옥이 따로 작곡한 30분 분량의 산조가 있다. 즉, 북한에는 김창조류, 안기옥류, 최옥삼류, 김광준류, 정운룡류, 류동혁류 등이 전하며 율조는 남한과 공통점이 많다. 그리고 남한 가야금 산조는 우조, 평조, 계면조 등으로 짜인 가운데 계면조의 경향이 두드러진 반면에 북한은 우조, 평조, 계면조 등으로 짜여 있으면서도 평조 성향이 강하다.
이 외에도 김창조를 잇는 수많은 대가들이 출현하였지만, 영암 출신이 아니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어쨌든 영암은 김창조를 중심으로 여러 명인들이 출생하고 성장한 전통 음악의 옥토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