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4004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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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鐵器時代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남도 영암군 |
시대 | 선사/철기 |
집필자 | 장대훈 |
[정의]
전라남도 영암군에서 철로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던 시대의 역사와 문화.
[개설]
철기 시대는 영암군에서 처음으로 철로 만들어진 도구를 사용한 시기를 말한다. 영암군을 포함한 우리나라의 철기 시대는 이 시기에 철기가 처음 등장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철기가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이 시기에도 청동기 시대의 청동기와 석기들을 제작하는 전통이 유지되면서 점차 철기의 사용이 증가했다고 볼 수 있다.
[유물]
영암 지역에서 출토된 철기 유물은 고분에서 부장 유물로 출토된 사례가 대부분이다. 주로 무덤 부장품으로 활용되면서 덩이쇠[鐵鋌], 쇠도끼[鐵斧], 쇠낫[鐵鎌], 쇠화살촉[鐵金族], 쇠손칼[鐵刀子], 쇠칼 등 다양한 형태의 도구들이 매납되었다. 이러한 철기들은 옹관 고분을 중심으로 각종 토기들과 함께 매납되었는데, 영암 금계리 고분군, 영암 내동리 고분군, 내동리 초분골 고분군, 만수리 고분군, 선황리 고분군, 월송리 유물 산포지, 수산리 조감 유물 산포지, 옥야리 고분 등에서 확인되었다.
[유적]
영암군의 철기 시대 유적은 고분, 주거지 등이 있다. 고분을 살펴보면, 영암 금계리 유적의 발굴 조사에서는 철기 시대의 2~3세기 대 무덤들이 조사되었다. 이 시기에는 주구 움무덤[토광묘(土壙墓)], 움무덤, 독무덤[옹관묘(甕棺墓)] 등이 혼재되어 있는데 이들 유구의 시간적인 서열을 보면 주구 움무덤→추가묘[옹관, 토광] 순서가 된다. 이와 같이 다장 장법으로 조성된 분묘들이 집중적으로 조성된 예는 함평 순천, 함평 만가촌, 나주 용호, 영광 군동 유적 등이 있는데 영암 금계리 유적도 동일한 양상을 띠고 있다. 그러나 출토 유물에서 이들 유적은 토기, 철기, 옥이라는 유물 조합상을 이루는 데 반해, 금계리 유적에서는 철기의 부장이 1점도 확인되지 않는 차이가 있다.
금계리 유적의 바로 맞은편으로 바라다 보이는 구릉사면에는 선황리 유적이 위치한다. 이 유적을 조사한 결과 주거지, 지상 건물지 등이 확인되었다. 금계리 유적이 분묘 공간으로 사용되었다면, 이와는 반대로 선황리 유적은 생활[주거] 공간으로 이용되었다는 점을 주목할 수 있다. 이러한 발굴 조사는 영암 망월천을 중심으로 형성된 기원후 3세기 대 분묘 형태와 주거 형태를 동시에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철기 시대에서 삼국 시대로 이어지는 유적에는 생활 유적인 주거지와 영산강 유역 특징적 묘제라 할 수 있는 고분 등이 있다. 주거지는 신연리 9호분과 남해신사지, 선황리 유적에서 확인되었다.
신연리 주거지는 분구 안에 위치하는데 4세기 대의 고분이 조영되기 이전에 조성된 것으로서 모두 철기 시대 주거지 4기가 있다. 평면 형태는 모두 방형이다. 내부에는 벽에 도랑을 돌리고 있으며 4주식의 기둥자리가 확인되는 주거지도 있다. 바닥은 다져서 편평하며, 한쪽에 치우친 화덕 자리[爐址]를 가지는 등 철기 시대 주거지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남해신사지에서는 1기의 주거지가 조사되었는데, 평면 형태는 방형이며, 내부에 벽구(壁溝)와 주공(柱孔) 시설을 갖추고 있다. 또한 선황리에서는 35기의 주거지가 조사되었는데, 구릉의 경사면을 이용해 축조하여 일부가 유실되었다. 평면 형태는 대부분 방형과 장방형으로 추정된다. 내부에는 무시설형의 화덕 자리와 벽구를 갖추고 있다. 기둥은 4주식과 무주식이 조사되었는데 선후 관계는 4주식이 무주식보다 빠른 경향을 보이고 있다. 유물은 바리 모양 토기[발형 토기(鉢形土器)], 항아리 모양 토기[호형 토기(壺形 土器)], 계란 모양 토기[장란형 토기(長卵形土器)], 주전자 모양 토기[주구 토기(注口土器)], 시루 등의 토기류와 방추차, 옥류 등이 출토되었다. 이를 통해 영암 지역의 주거 유적에 대한 성격을 밝힐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