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4006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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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東設神道碑 |
이칭/별칭 | 영암 엄길리 박동열 신도비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전라남도 영암군 서호면 엄길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문혜지 |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 1564년 - 박동열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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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 1622년 - 박동열 사망 |
건립 시기/일시 | 1694년 - 박동열 신도비 건립 |
현 소재지 | 박동열 신도비 - 전라남도 영암군 서호면 엄길리 |
성격 | 신도비 |
관련 인물 | 박동열 |
크기(높이,너비,두께) | 215㎝[비신 높이]|88㎝[비신 너비]|25㎝[비신 두께] |
[정의]
전라남도 영암군 서호면 엄길리에 있는 조선 후기 신도비.
[개설]
조선 후기 문신 박동열(朴東說)[1564~1622]의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열지(悅之), 호는 남곽(南郭)과 봉촌(鳳村)이다. 박조년(朴兆年)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사간 박소(朴紹)이고, 아버지는 대사헌 박응복(朴應福)이며, 어머니는 증 좌승지 임구령(林九齡)의 딸이다. 동생이 박동량(朴東亮)이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박동열은 충주 목사가 되고 이어서 대사성이 되었다. 이듬해 정인홍(鄭仁弘)이 이황(李滉)을 문묘에 배향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소를 올리자, 이에 분격한 유생들이 정인홍을 유적(儒籍)에서 삭제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 말을 듣고 광해군이 크게 노해 유생들을 투옥시킬 때, 박동열이 이를 말리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자진해 나주 목사로 나갔다. 나주는 원래 다스리기 어려운 고장이었으나, 박동열은 유풍(儒風)으로 잘 다스렸다.
[건립 경위]
박동열 신도비(朴東設 神道碑)는 1694년(숙종 20)에 세워졌으며, 신흠(申欽)[1566~1628]이 비문을 짓고, 민유중(閔維重)[1630~1687]이 전액(篆額)을 썼으며 박태유(朴泰維)[1648~1696]가 글을 썼다. 또한 박동열 신도비는 ‘영암 엄길리 박동열 신도비’로도 불린다.
[위치]
박동열 신도비는 영암군 서호면 엄길리 산소 마을 옆 야산 반남 박씨(潘南 朴氏)의 묘역에 있다.
[형태]
비석의 규모는 비수(碑首)의 높이는 70㎝, 너비 153㎝, 두께 80㎝이고, 비신(碑身)의 높이는 215㎝, 너비 88㎝, 두께 25㎝이며, 비좌(碑座)의 높이는 70㎝, 너비 153㎝, 두께 90㎝이다.
[의의와 평가]
박동열은 선조 대에 조정에 입문하여 중앙관과 지방관을 두루 거치며 지방민들에게 선정을 베풀면서도 광해군 대에 폐모론이 일어나자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적극 반대하는 신념 있는 인물이다.
박동열 신도비는 박동열을 기리기 위해 당시 시대를 함께했던 동료이자 문신, 학자인 신흠, 민유중, 박태유가 모여 비문을 짓고, 제액과 글을 써서 세운 비석이자 박동열의 행적을 나타내는 상징물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