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4006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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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月出山祭祀遺跡址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터 |
지역 |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회문리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고려/고려,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고용규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94년 7월 12일 - 월출산 제사 유적 터, 목포 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 조사 시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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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94년 7월 26일 - 월출산 제사 유적 터, 목포 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 조사 완료 |
소재지 | 월출산 제사 유적 터 -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회문리 월출산 천황봉 정상 |
출토 유물 소장처 | 목포 대학교 박물관 - 전라남도 무안군 청계면 청계면 도림리 61 |
성격 | 터|제사 유적 터 |
[정의]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회문리 월출산 천황봉에 있는 제사 유적 터.
[개설]
월출산은 영암의 진산(鎭山)으로 통일 신라 때부터 사용된 영암군이란 고을 이름도 월출산 구정봉 아래의 동석(動石)에서 유래하였다. 신라 때는 월내산[月奈岳]이라 불렸는데, 영암의 백제 때 고을 이름이 월내군(月奈郡)이었다는 점을 상기하면 이로부터 유래한 이름이었을 가능성이 점쳐진다. 고려 시대 때는 월생산(月生山)이라 불렸으며, 『고려사(高麗史)』에서도 월생산 신사(月生山神祠)에 벼락이 쳤다는 기록이 두 번에 걸쳐 나오고 있다. 조선 초기에 오늘날과 같은 월출산(月出山)이란 명칭으로 불렸던 사실이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실려 있다. 이 밖에도 속설에 외화개산(外華蓋山), 소금강(小金剛), 조계산(曹溪山)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던 사실을 밝히고 있다. 이에 따라 신사의 이름도 ‘월출산 신사(月出山神祠)’ 또는 ‘월출산 단(月出山壇)’으로 고쳐져, 영암 군수의 주관 아래 제사를 치렀다.
[변천]
월출산 제사 유적 터는 통일 신라 때부터 고려 시대까지는 국가의 주도의 제사인 소사(小祀)를 지냈으며, 조선 시대에는 영암 군수가 주관하여 제사를 지냈던 곳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월출산의 당시 이름인 월내악에서 소사를 지냈던 것으로 전하고 있다. 고려 시대에는 구체적인 기록이 나타나지 않으나, 1120년(예종 15) 7월 정축일과 1123년(인종 원년) 7월 을사일 등 두 차례에 걸쳐 월출산의 고려 시대 이름인 월생산의 월생산 신사에 대한 『고려사』의 기록이 있다. 출토 유물을 통해 고려 말까지 월생산 신사에서 제사를 지냈던 것으로 밝혀졌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는 국가의 사전 체계에 들지 못함에 따라 영암군의 월출산 신사(月出山神祠) 또는 월출산 단(月出山壇)에서 영암 군수의 주관으로 제사를 치렀던 기록이 『동국여지승람』과 『동국여지지』에 전하고 있다. 그 이후에는 관련 기록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 점과 출토 유물을 볼 때, 월출산 제사 유적은 조선 전기까지만 운영되었고 그 이후에는 폐지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위치]
영암군 영암읍 회문리 월출산 천황봉 정상[해발 809m]에 있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월출산 제사 유적 터는 천황봉 정상에서 유물이 계속해서 수습됨에 따라 영암군의 요청으로 1994년 7월 12일부터 7월 26일까지 목포 대학교 박물관의 시굴 조사로 밝혀진 제사 유적이다. 조사를 통해 9세기 대의 향로 뚜껑과 토기 조각을 비롯하여, 11~12세기 대의 잔과 탁잔 등 각종 청자류, 철제와 토제 말, 조선 시대 분청자기와 백자 조각 등 다양한 유물이 대량으로 출토되었다. 특히 철제 및 토제 말은 의도적으로 훼손된 채로 출토되었다. 이 유물들을 통해 통일 신라 시대부터 조선 전기까지 이곳에서 제사를 지냈던 사실이 확인되었다.
[현황]
의례 행위는 기와 조각 등의 유물과 고려 시대 월생산 신사와 조선 시대 월출산 신사 또는 월출산 단의 기록으로 보아 별도의 제사용 건물에서 행해졌음이 분명히 드러나지만, 조선 전기 이후 폐기된 이래 오랜 시간이 경과하였고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장소이다 보니 이미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 출토된 유물은 목포 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월출산 제사 유적은 조사 결과 문헌 기록과 일치하는 제사 터였음이 최초로 확인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 전라남도 지역에서 신안 흑산도 상라산, 광양 마로 산성 등지에서 제사 유적이 발견되는 단초를 제공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