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4010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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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曺克煥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남도 영암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정윤미 |
[정의]
일제 강점기 전라남도에서 활동한 영암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노동 운동가.
[개설]
조극환(曺克煥)[1887~1966]의 본적은 전라남도 영암 송평(松平)이고, 독립운동 당시 주소는 영암 교동(校洞)이다. 현 영암군 영암읍 교동리에서 창녕 조씨(昌寧曺氏)인 아버지 조병헌과 어머니 김금옥의 5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집안은 영암의 향리 가문으로 비교적 윤택하였다. 1919년 영암 지역의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고, 이후 목포를 주요 활동 무대로 하여 노동 운동과 청년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활동 사항]
조극환은 1908년경 한성 사범 학교를 마친 뒤 영암에 내려와 영암 보통학교에서 잠시 교편을 잡았다. 1919년 3·1 운동 당시 영암읍과 구림리의 3·1 운동을 연계하여 4월 10일에 열린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일경에 체포되어 1919년 9월 17일 주동자 중에 가장 무거운 징역 2년형을 언도받았다.
조극환은 출옥한 뒤 1924년 무렵 목포로 이주하여 목포 지역의 청년 운동과 노동·농민 운동, 신간회 운동에 앞장섰다. 먼저 목포 청년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면서 1924년 9월 사회주의 성향이 강한 회원들과 함께 무산 청년회를 별도로 조직했다. 무산 청년회의 주요 멤버는 조극환·강석봉·배치문·박승억 등이었다. 또한 목포 인근 진보적 성격의 8개 단체가 연합하여 청년 운동을 결행하자는 의도로 목포·암태도·비금도·도초도·자은도·임자도·해제·지도 청년회가 함께 참여한 무목 청년 연맹(務木靑年聯盟)을 조직하였다. 조극환은 상임 집행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각종 강연·강좌·노동 야학회 등을 열었다.
1925년에는 오도근·배치문·김영식·서병인·박제민과 함께 사상 단체인 전위 동맹(前衛同盟)을 결성하였다. 전위 동맹은 당시의 청년 운동, 노동 운동, 여성 운동 등을 지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조극환은 전위 동맹을 만든 뒤 노동 운동 분야에 중점적으로 참여하여 목포 부두 노조를 결성하고 지도했으며, 일제하 전라남도 지역 최대의 파업 투쟁으로 알려진 목포 제유 노조 파업에도 개입하였다. 1926년 1월 제유 노조의 파업이 일어나자 조극환은 목포 노동 총동맹의 대표 자격으로 간여하였다.
1926년 9월 서울에서 조선 공산당이 재건되고, 전라남도 지방에서도 조선 공산당 및 고려 공산 청년회가 재건되어 조극환은 목포 지역 세포 책임자를 맡았다. 또한 1927년 2월에 신간회가 창립되자, 신간회의 각 지회를 장악한다는 조선 공산당의 정책에 따라 신간회 목포 지회에서 상무 간사를 맡기도 하였다.
조극환은 1929년 봄 조선 공산당 전남도당이 발각되면서 체포되었고, 1930년 12월 경성 지방 법원에서 치안 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수감되어 1932년 8월에 형기를 마치고 석방되었다. 1934년에는 동아 일보 진도 지국장을 맡아 그곳에서 약 5년 정도 머물렀으며, 1930년대 후반에는 다시 목포 죽교동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1940년대 초 영암군 군서면 이화정 마을로 이사하여 일제 말기를 보냈다.
광복이 된 후 조극환은 영암에서 영암 건국 준비 위원회의 조직을 주도하였고,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영암 군민들에 의해 군수로 선출되기도 하였으나 1945년 10월 27일 오전 10시를 기해 전라남도 일원에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미군정에 의해 정권 탈취의 명목으로 구속되어 약 1년간 수형 생활을 하였다. 이후 조극환은 이화정에서 은거하다가, 1966년에 세상을 떠났다.
[묘소]
조극환은 1987년 대전 국립묘지에 이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조극환의 공훈을 기려 1980년에 대통령 표창을, 1990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