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401078 |
---|---|
한자 | 選擧 |
분야 |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남도 영암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송기태 |
[정의]
전라남도 영암군에서 선거권을 가진 지역민이 공직에 임용될 사람을 직접 투표를 통해 뽑는 행위.
[개설]
선거 제도는 민주 정치 과정의 중심에 위치하는 것으로 의회의 성격, 정당의 특성, 이익 집단의 형태, 정부의 안정성과 나라의 통합력을 결정짓는 중요한 변수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1948년 5월 10일 국회 의원 선거에서 선출된 198명의 국회 의원으로 제헌 국회가 구성된 이래 선거 제도는 변화를 거듭해 왔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는 16번에 걸친 대통령 선거와 17번의 국회 의원 총선거가 있었으며, 5·16 이후 중단되었던 지방 자치제가 부활하면서 1991년 이후 지방자치 단체장 및 자치 의회 선거가 실시되어 오고 있다.
[정·부통령 선거]
1. 제1대 대통령 및 제1·2대 부통령 선거
1948년 8월 15일 제헌 헌법에 의하여 성립된 제1 공화국은 간접 선거에 의한 대통령제의 정치 제도를 채택하였다. 제헌 의회를 구성하기 위한 5·10 국회 의원 선거는 좌익 세력과 김구, 김규식 계가 선거에 불참하여 우익 세력이 대거 당선되었다. 헌법 기초 의원들은 당초 내각 책임제를 기초하였던 개헌안을 이승만의 의도에 따라 대통령 중심제로 기초 완료하였다. 이후 정부 조직법에 의해 7월 20일 국회는 신익희 부의장의 사회로 초대 대통령 및 부통령의 간접 선거를 실시하였다. 재적 의원 198명 중 출석 의원 196명에 의해 무기명 비밀 투표로 행한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 의장이 절대 다수표를 얻어 당선되었다. 한편 1차 부통령 선거에서는 2차 투표에 걸쳐 총 133표를 얻은 이시영이 당선되었으며 이후 초대 부통령의 사임에 따라 제2대 부통령은 78표를 얻은 김성수가 당선되었다.
2. 제2대 대통령 및 제3대 부통령 선거
6·25 전쟁 과정에서 부정 부패·국민 방위군 사건·숱한 양민 학살 사건 등으로 정부의 정치적 무능력함이 드러나 이승만의 연임이 불가능해 보이자 이승만 계열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무력으로 통과시켰다. 그 결과 이승만은 재임에 성공하였으며 당시 영암군은 96.7%의 투표율로 전국 투표율 88.0%에 비해 월등히 높은 참여도를 보였다. 한편 제3대 부통령 선거에서는 이승만의 지지를 얻은 무소속의 함태영이 유효 투표 713만 3297표의 41.3%에 해당하는 294만 3813표로서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3. 제3대 대통령 및 제4대 부통령 선거
1955년 9월 반 이승만 계열의 국회 의원들이 중심이 되어 창당한 민주당에서는 대통령·부통령 후보에 신익희와 장면을 선출하였으며 다른 야당세력인 진보당 추진 위원회에서는 대통령·부통령 후보에 조봉암과 박기출을 내세웠다. 그러나 신익희는 선거전 종반에 급작스럽게 뇌일혈로 급서하였다. 한편 자유당은 1956년 3월 임시대의원 대회를 소집하여 대통령·부통령 후보에 각각 이승만과 이기붕을 지명하였다. 당시 영암군에서는 98.7%의 투표율로 이승만에게 3만 2493표, 조봉암에게 6,637표의 득표 수를 보였다. 한편 제4대 부통령에는 민주당의 장면이 전국 46.4%에 해당하는 401만 2654표로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4. 제4대 대통령 및 제5대 부통령 선거
자유당은 1960년 2월 3일 당시 대통령 이승만이 표명한 4선 출마 의사를 지지하고 6월 29일에는 전국 대의원 1,008명이 모여 제9차 전당 대회를 열었다. 이에 대통령 후보에 이승만, 부통령 후보에 이기붕을 지명하였다. 반면 야당은 구파의 조병옥을 대통령 후보로, 신파의 장면을 부통령 후보로 내세웠다. 그러나 선거 운동 중 조병옥이 사망하였고 이승만이 유효 투표 총수 88.7%에 해당하는 963만 3376표로 당선되었다. 영암군의 경우 투표자 수 5만 1741표 중 4만 7792표가 이승만에게 향했다. 한편 부통령 선거에서는 이기붕이 유효 투표 1052만 7445표 중 833만 7059표를 얻어 당선되었으나 유권자들의 봉기로 결국 이승만 정권은 몰락하고 이기붕은 가족과 함께 사망하였다. 따라서 제5대 부통령 선거는 4월 26일 국회의 결의에 의하여 무효가 되었으며 이후 부통령제는 제3공화국에서 폐지되었다. 그 후 의회 책임제[의원 내각제]로 개헌한 국회는 새로운 헌법에 따라 1960년 8월 12일 민주당의 윤보선을 대통령, 장면을 국무총리로 선출하였다.
5. 제5대·6대·7대 대통령 선거
1960년 5월 군사 쿠테타 이후 군정 아래 실시된 1962년 국민 투표를 통해 대통령제로 복귀하는 결정이 내려졌으며 1963년 10월 15일 박정희가 윤보선을 제치고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영암군은 총 4만 6962표 중 박정희를 3만 2223표로 지지하였다. 제6대 대통령 선거는 재집권을 겨냥한 박정희와 하나의 야당으로 결합한 윤보선 후보의 2파전으로 1967년 5월 3일 실시되었다. 그 결과 박정희가 당선되었으며, 영암군은 총 5만 2493표 중 박정희를 2만 4921표로 지지하였다. 그러나 1963년 선거에서 나타나지 않았던 영남·호남 간의 득표 차이는 박정희 정권이 추진한 특정 지역에 대한 집중 투자의 결과로서 향후 고질화되는 지역 갈등의 씨를 뿌렸다. 영암군의 경우 본군 출신인 김준연 후보의 득표율보다 표의 여야 양분 현상이 뚜렷하였다.
한편 제7대 대통령 선거는 집권 민주 공화당의 3선 개헌을 토대로 1971년 4월 27일에 실시되었는데, 신민당의 김대중과 박정희가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선거 결과 야당의 김대중 후보는 낙선했음에도 불구하고 전국에서 43.6%에 달하는 높은 득표율을 나타냈으며 영남과 호남의 지역 격차를 한층 뚜렷하게 보여 주었다. 영암군은 총 4만 5282표 중 박정희에게 1만 5485표를, 김대중에게 2만 8614표를 주며 지지했다.
6. 제8대·9대 대통령 후보 선거
1972년 11월 21일 확정된 유신 헌법에 의해 박정희는 1972년 12월 23일 통일 주체 국민 회의의 간접 선거에서 대의원 2,359명 가운데 99.9%의 지지로 제8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선거에 앞서 12월 15일 초대 통일 주체 국민 회의 대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1978년 7월 6일 장충 체육관에서 열린 제9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통일 주체 국민 회의의 99.8%의 지지로 박정희가 당선되었으나, 1979년 10·26사태로 박정희는 사망하였다.
7. 제10대·11대 대통령 후보 선거
통일 주체 국민 회의는 최규하 대통령 권한 대행을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하였으나, 6일 후 전두환 등 신군부에 의한 12·12 쿠데타가 일어났다. 정국 주도권을 장악한 신군부의 전두환 국가 보위 비상 대책 위원회 상임 위원장은 1980년 8월 통일 주체 국민 회의 투표를 통해 제11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8. 제12대·13대 대통령 후보 선거
신군부는 1980년 10월 대통령 임기 7년 단임과 간선제에 의한 대통령 선출을 골자로 하는 헌법 개정안을 공포했다. 제12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전국 77개 선거구에서 실시된 대통령 선거인단 투표 결과 전두환 후보가 90.1%의 압도적 지지를 얻어 야당 후보였던 유치송·김종철·김의택 등을 물리치고 당선되었다. 한편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과 노태우의 6·29 선언으로 5년 단임의 대통령 직선제로 헌법을 개정하였다. 여당의 노태우와 야당의 김영삼·김대중·김종필 등이 출마하여 노태우 후보가 36.7%의 지지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당시 영암군은 총 4만 6864표 중 4만 2467표를 김대중 후보에게 밀어주며 지지를 보냈다.
9. 제14대 대통령 후보 선거 이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김영삼·김대중·정주영·박찬종·백기완 등이 출마하여 여당이었던 민주 자유당의 김영삼이 42.0%로 당선되었다. 영암군은 총 4만 6518표 중 민주당의 김대중에게 3만 6839표를 보태며 지지하였다.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이회창·김대중·이인제·권영길 등이 출마하여 야당이었던 새 정치 국민 회의의 김대중 후보가 40.3%의 지지를 얻어 당선되었다. 특히 야권 후보인 김대중 후보의 승리로 50여 년 만에 선거를 통한 평화적인 정권 교체가 이룩되었다. 당시 김대중 후보는 영암 지역에서 총 4만 91표 중 3만 6455표를 얻었다.
이후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노무현·이회창·권영길 등이 출마하여 민주당 노무현 후보가 48.9%의 지지율로 당선되었으며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총 2373만 2854명이 투표하여 투표율은 역대 대통령 선거 중 최저인 63%를 기록하였으며, 투표 결과 한나라당의 이명박 후보가 1149만 2389표를 얻어 득표율 48.7%로 당선되었다. 그리고 최근 2012년 12월 19일 이루어진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총 7명이 후보로 등록하여 1명이 중도에 사퇴하였고, 선거인수 4050만 7842명 가운데 3072만 1459명이 투표하여[투표율 75.8%] 새 누리당의 박근혜 후보가 당선되었다.
[국회 의원 선거]
1948년 5월 10일 초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 영암군에서는 김준연이 무투표 당선되었으며 1950년 5월 30일 제2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는 민국당의 김준연, 국민당의 유인곤, 국민회의 박찬직, 무소속 신용성이 출마하였는데 이 중 2만 191표를 얻은 유인곤이 당선되었다. 1954년 5월 20일에 실시된 제3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는 자유당의 유인곤, 국민회의 천수봉, 무소속의 박종우, 민국당의 김준연이 출마하여 2만 1198표를 얻은 김준연이 당선되었다. 제4대·5대·6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도 김준연이 계속하여 당선되었다. 제6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부터 영암군은 강진군과 제12대 지역구로 함께 투표를 진행하게 되었다.
제8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는 자유당의 천수봉, 민중당의 김준연, 신민당의 유수현, 민주 공화당의 윤재명이 출마한 가운데 제7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 고배를 마셨던 윤재명이 당선되었다. 제9대 국회 의원 선거는 영암군이 영암·강진·장흥·완도를 포함한 제8선거구에 속하게 되었으며 민주 공화당의 고전식과 정간용, 신민당의 황호동이 출마하여 고전식과 정간용이 각각 8만 9035표와 5만 5967표로 당선되었다. 제10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도 제8선거구에 속한 영암은 민주 공화당의 고전식과 신민당의 황호동, 민주 통일당의 오석보, 무소속의 윤재명과 이선동, 이정채, 최수영이 출마하여 고전식과 윤재명이 각각 당선되었다. 제11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 영암군은 강진, 장흥, 완도와 함께 제9선거구에 포함되었으며 김식과 유재희가 당선되었다. 당시 영암에서는 전국적 특징과 마찬가지로 민주 정의당과 민주 한국당이 동반 당선되었다.
제12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는 김식과 이영권이 당선되었으며 13대 국회 의원 선거는 국회 의원 선거법이 기존의 중선거구제에서 소선거구제로 개정됨에 따라 지역구수가 94구에서 224구로 대폭 늘어났다. 제 13대·14대 영암군의 국회 의원 선거에서는 평화민주당의 유인학이 지속적으로 당선되었다. 1996년 4월 11일 실시된 제15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 영암은 새 정치 국민 회의의 김옥두를 당선시켰다. 제16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는 다시 새 천년 민주당의 김옥두가, 제17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는 열린 우리당의 유선호가, 제18대 선거에서는 통합 민주당의 유선호가 당선되었다.
[지방 자치 단체 선거]
1. 단체장
역대 영암의 단체장에 대해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제1대 영암 군수는 이영조가, 2대 영암 군수는 이판호가, 제3대는 박종효, 제4대는 박종환, 제5대는 이병규, 제6대는 조갑동, 제7대는 임기순, 제8대는 이시형, 제9대는 백남복, 제10대는 정우철, 제11대는 박석주, 제12대는 이봉구, 제13대는 김영선, 제14대는 박남칠, 제15대는 이준호, 제16대는 김문수, 제17대는 공화현, 제18대는 김정동, 제19대는 김기회, 제20대는 김호윤, 제21대는 김연수, 제22대는 이현호, 제23대는 김근수, 제24대는 오시권, 제25대는 신채우, 제26대는 정병섭, 제27대는 안재호, 제28대는 봉석호, 제29대는 김옥현, 제30대는 윤원보, 제31대는 정병철, 제32대는 김광진, 제33대는 고경주, 제34대는 전정식, 제35대는 강박원이 재직하였다.
전국 동시 지방 선거 시행 이후 제36대는 박일재가 민주당 소속으로 1만 2691의 득표 수와 36.70%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제37대는 김철호가 새 정치 국민 회의당 소속으로 1만 7653표의 득표수와 51.90%의 득표율로 당선되었으며 제38대에는 새 천년 민주당 소속으로 1만 8369표의 득표수와 54.40%의 득표율로 재당선되었다. 제39대는 김일태가 열린 우리당 소속으로 1만 6691표의 득표수와 53.65%의 득표율로 당선되었으며 2013년 현재까지 이어지는 제40대 영암 군수 선거에서는 제39대 영암 군수였던 김일태가 민주당 소속으로 무투표 재당선되었다.
2. 의회 의원
영암군 의회는 1990년 12월 31일 법률 제4310호로 지방 자치법이 개정됨에 따라 1991년 3월 26일 시·군 의회 의원 선거에 의해 1991년 4월 15일 의원 정수 11명으로 개원하였다. 제1대 영암군 의회에서는 전반기 의장 김원정과 부의장 김종팔, 후반기 의장 최철환, 전종배와 부의장 김재근, 조자종이 맡아 업무를 수행했다. 제2대 영암군 의회[1995. 7. 12.]에서는 전반기 의장 김광년과 부의장 곽순영, 후반기 의장 김광년과 부의장 박영배가 의회를 이끌었으며, 제3대 영암군 의회[1998. 7. 9.]에서는 전반기 의장 김인호와 부의장 정찬헌, 후반기 의장 박영배와 부의장 이진용이, 제4대 영암군 의회[2002. 7. 5.]에서는 전반기 의장 김인호와 부의장 정찬헌, 후반기 의장 박영배와 부의장 이진용이, 제5대 영암군 의회[2006. 7. 6.]에서는 전반기 의장 신락현과 부의장 류선열, 후반기 의장 유호진과 부의장 김점중이 각각 의장과 부의장으로서 영암군 의회의 업무를 수행하였다. 2013년 현재는 제6대 영암군 의회[2010. 7. 7.]가 개원되었으며 전반기 의장 박영배와 부의장 김연일, 후반기 의장 김연일과 부의장 유호진이 각각 의장과 부의장직을 수행하고 있다. 2013년 현재 의회 의원은 총 9명으로 가 선거구[영암·덕진·금정]를 통해 선출된 박영배, 유호진과 나 선거구[신북·시종·도포]를 통해 선출된 김영봉, 김점중, 다 선거구[삼호]를 통해 선출된 김철호, 이보라미와 라 선거구[군서·서호·학산·미암]를 통해 선출된 김연일, 최병찬과 더불어 비례 대표로 선출된 유영란으로 구성되어 있다.
[영암의 선거구]
전라남도 영암군의 선거구는 2013년 현재 3개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국회 의원 선거구와 둘째 도 의원 선거구, 셋째 시·군 의원 선거구가 바로 그것이다. 첫째로 국회 의원 선거구는 장흥군·강진군·영암군 선거구로 나눌 수 있고 선거 구역은 장흥군 일원, 강진군 일원, 영암군 일원이다. 둘째 도 의원 선거구는 영암군 제1 선거구와 영암군 제2 선거구로 나눌 수 있는데, 영암군 제1 선거구는 영암읍, 덕진면, 금정면, 신북면, 시종면, 도포면이 해당되며 영암군 제2 선거구는 삼호읍, 군서면, 서호면, 학산면, 미암면이 해당된다. 셋째로 시·군 의원 선거구는 영암군 가 선거구, 영암군 나 선거구, 영암군 다 선거구, 영암군 라 선거구로 나눌 수 있다. 영암군 가 선거구는 영암읍, 덕진면, 금정면이 선거 구역이며 영암군 나 선거구는 시종면, 신북면, 도포면이 선거 구역이다. 영암군 다 선거구는 삼호읍이 선거 구역이며 영암군 라 선거구는 군서면, 서호면, 학산면, 미암면이 선거 구역이다. 이와 같은 시·군 의원 선거구에서는 각 선거구마다 2명씩을 선출 인원으로 정할 수 있으며 모든 선거구를 통틀어 비례 대표 1명을 정할 수 있다.
[평가 및 의의]
선거는 무엇보다도 시민들의 참여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선거에 대한 중요성 인식이 매우 중요하다. 선거에 임하는 모든 영암군민들의 소신 있는 판단이 선거의 결과로서 나타날 것이다. 공정하고 투명한 선거를 통해 선출된 정부나 지도자는 그만큼 신뢰와 힘을 지닐 수 있을 것이며, 그런 점에서 볼 때 영암군의 선거는 경쟁력을 지닐 수 있는 투명성을 갖춤으로서 신뢰감을 바탕으로 형성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