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4012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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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天主敎 |
분야 | 종교/기독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전라남도 영암군 |
시대 | 근대/근대,현대/현대 |
집필자 | 곽승혁 |
[정의]
전라남도 영암군에서 활동하는 로마가톨릭 교회.
[개설]
천주교는 베드로를 초대 교황으로 서기 30년경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소아시아, 그리스, 로마 등지로 급속하게 확산되었다. 황제 숭배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로마 집권자들에게 300여 년간 박해를 받았으나, 313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밀라노 칙령을 공표하여 박해를 중지하였으며, 곧 이어 로마의 국교가 되었다. 이후 로마 제국 권역을 중심으로 확산되어 유럽 그리고 세계 전역에 전파되었다.
딜레의 『한국 천주교회사』에 따르면 1784년(정조 8)에 이승훈이 북경 천주교회에서 프랑스 사람 그라몽(Grammont) 신부에게 스스로 세례를 받고 돌아왔을 때부터 국내에 본격적인 신자들의 모임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조선 시대는 유교가 국가와 사회의 이념으로서 작용하였던 시대였다. 왕권 사회를 위협하고, 제사를 부정하는 불경스런 모임으로 인식된 천주교는 근 100여 년 동안 네 번에 걸친 박해를 받았고, 1886년(고종 23) 종교로 인정되기 전까지 수많은 순교자들이 생겨났다.
가톨릭(Catholic)이라는 말은 원래 그리스어로 ‘보편적’이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은 특정한 개인·인종·시대를 초월한 전체 인류를 위한 것이라는 뜻에서 이 명칭을 사용한다.
[변천]
영암군 지역의 천주교 시초는 천순임[루시아]와 그의 남편인 정종완 외 영암에 거주하고 있었던 6명의 예비 신자이다. 이들은 1954년 4월부터 9월까지 약 5개월 동안 영암에서 나주 영산동에 있는 영산포 성당까지 왕래하며 주일 미사에 참례하였다. 1954년 9월 15일에 영암읍 서남리 104번지 정종완 자택 차창고에 임시 공소를 세우고 공소 예절을 드리게 되었다. 이후 1955년 8월 2일을 기점으로 임시 영암 공소를 영산포 본당에서 관리하게 되었으며 당시 영산포 성당 신부인 신요한 신부가 오토바이로 영암을 왕래하며 미사를 집전하였다.
1957년 10월 4일에 당시 광주 교구장장이 영암을 방문하여 정식 공소로 확정하였으며, 공소 건물을 건립하게 되었다. 이때 신자 수는 80여 명에 이르렀는데 신자가 급격하게 늘어난 이유는 6.25 전쟁 이후 공소에서 전란으로 인해 가난했던 주민들에게 강냉이 가루, 분유 가루, 밀가루, 옷 등 구호물자를 지급했던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1968년 8월 15일에 이전까지 영산포 성당 관할이었던 영암 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되어 영암군에 첫 성당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때 공소 건물도 성당의 위신에 맞게 재건축되었으며, 골롬반회 소속 우 프란치스코 신부가 초대 주임 신부로 부임하였다.
[현황]
영암 공소가 성당으로 승격된 이후 영암 성당에서는 광주 대교구의 지원 아래 적극적인 포교 활동을 펼쳤다. 2012년 현재 4개의 성당[영암 성당, 독천 성당, 신북 성당, 삼호 성당]과 5개의 공소[성재 공소, 시종 공소, 영보 공소, 군서 공소, 도포 공소]가 영암 지구에 분포하고 있다. 신자 수는 영암 성당이 1,353명, 독천 본당이 624명, 신북 성당이 443명으로 총 2,420명이며, 영암군 삼호면 일대의 성당과 공소는 목포교구에서 관할하고 있다.
천주교 시설로는 까리따스 수녀원 농장이 신북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자연 농법을 이용한 거름을 만들어 3만여 평의 논과 밭에서 다양한 농작물을 재배하고 있다. 농사를 통해 거둔 각종 야채와 과일 판매 수익은 다양한 포교 사업에 투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