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05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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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新寧地區戰鬪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신녕면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권대웅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50년 9월 6일 - 신녕지구 전투 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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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결 시기/일시 | 1950년 9월 15일 - 신녕지구 전투 종결 |
발생|시작 장소 | 신녕지구 전투 - 경상북도 영천시 신녕 일대 |
추모비/시기 | 신년 지구 전승비 - 경상북도 영천시 신녕면 화성리 |
현충시설 | 국립영천호국원 - 경상북도 영천시 고경면 청정리 산3 |
성격 | 전투 |
관련 인물/단체 | 국군 제6사단 |
[정의]
1950년 9월 6일부터 9월 15일까지 경상북도 영천시 신녕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
[개설]
국군 제6사단이 영천 지역으로 진출하려던 북한군 제8사단의 공격을 저지시킨 방어 전투다. 이 전투는 대구 점령을 목표로 하던 북한군을 격퇴하고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 토대를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역사적 배경]
1950년 8월 초 북한군 중동부 전선 담당 제2군단은 공세의 주목표를 대구 점령으로 정하고, 4개 사단과 예하 제8사단을 대구 전선에 집중적으로 투입했다.
그러나 적 제8사단은 8월 7일 의성지구 전투에서 국군 제8사단에게 1개 대대 이상의 병력을 잃는 피해를 입어 전선의 축을 의흥~신녕으로 변경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북한군 제2군단은 다부동~효령 일대 돌파 계획이 좌절되자, 제8사단에 전차부대를 증원시켜 신녕~하양을 목표로 침투작전을 전개했다.
국군의 지상공격과 유엔군의 공중 폭격으로 상당한 피해를 입은 상황에도 북한군 제8사단은 8월 말 조림산~화산 전선까지 진출하기에 이르렀다.
[경과]
국군 제6사단은 후퇴하여 558고지~637고지~화산을 연결하는 전선에 방어 진지를 형성하고 북한군 저지 작전을 수립했다.
9월 초 북한군 제15사단의 영천 점령으로 고무된 제8사단은 영천을 돌파하기 위해 화산 일대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에 국군 제6사단의 집중 포격으로 북한군 대열을 분산시켰고, 유엔군의 공중 폭격에 힘입어 북한의 총공격은 실패하고 말았다.
국군 제6사단의 공세적인 방어 작전으로 전투력의 대부분을 상실한 북한군 제8사단은 조림산~화수동 일대로 물러나 방어 태세로 전환하였다.
[결과]
신녕 전투는 영천을 점령하고 있던 북한군 제15사단을 고립시켜 격파하는 계기를 마련했으며 낙동강 방어선에서 아군이 반격을 시작할 수 있는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의의와 평가]
신녕 전투 전공자와 전사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1958년 영천시 신녕면 화성리 성환산 공원 내에 신녕지구 전승비를 건립하였고, 2001년 국립영천호국원을 조성하여 호국정신 고취 및 안보의식 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