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500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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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歷史 |
영어공식명칭 | History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경상북도 영덕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수환 |
[정의]
경상북도 영덕 지역의 선사 시대부터 현재까지의 역사.
[선사 시대]
우리나라 구석기 시대는 약 70만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후기 구석기에 이르러서는 사실상 한반도 전역에 인류가 생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덕에서도 오십천(五十川) 유역의 지품면 오천리, 송천(松川) 유역의 창수면 삼계리 일대를 중심으로 구석기 유적이 확인된다. 이 가운데 오천리 유적은 중기 구석기 혹은 그 이전으로 편년(編年)되고 있다. 신석기 유적이 공식적으로 보고된 사례는 없으나 창수면 인천리에서 수습된 간돌화살촉[마제석촉]과 간돌검[마제석검] 등을 신석기 시대 유물로 보기도 한다.
정착생활과 농경의 발달로 사회적 분화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는 청동기 시대에 이르면, 영덕 지역에서도 어느 정도 정치권력을 가진 집단이 등장하였다. 이와 관련된 유적으로는 고인돌·돌널무덤·유물산포지 등이 있다. 지배층의 무덤 유적인 고인돌은 영덕읍 남산리·화수리, 병곡면 영리·금곡리 등지에서 확인되며, 병곡면 사천리에서는 돌널무덤이 발견되었는데, 좁은놋단검[세형동검]이 출토되었다. 그 외에도 영해면 괴시리·원구리 등의 유물산포지에서는 다수의 청동기 시대 석기가 발견되었다.
[고대]
영덕 지역에 존재했던 고대 소국(小國)의 존재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고고학적 발굴을 바탕으로 영덕읍과 지품면에 이르는 오십천 상류 유역, 송천과 영해평야가 만나는 병곡면 사천리 일대를 중심으로 초기 국가 단계의 정치체제가 후기 청동기 내지 초기 철기 시대에 등장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영덕 지역이 문헌 자료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5세기 무렵이다. 서기 400년 고구려의 광개토왕은 5만 명의 군사를 파견하여 신라를 구원하고 한반도 남부에 대한 영향력을 확장시켰다. 이때 두 개의 행정구역이 등장하였는데, 바로 고구려의 야시홀군(也尸忽郡)과 우시군(于尸郡)이다. 야시홀군은 영덕군 영덕읍을 중심으로 지품면·달산면, 청송군의 청송읍과 진보면 일대를 포괄하는 지역이다. 내륙의 요충지였던 안동·영양과 연결되며 고구려 입장에서 죽령·조령을 넘어 동해안을 활용해 신라로 향할 수 있는 요충지였다. 우시군은 지금의 영덕군 영해면과 창수면·병곡면·축산면 일대로 동해안 일대 교통로 및 경제력과 관련해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그렇기에 5세기 동안 고구려와 신라 간의 쟁탈전이 영덕 지역에서 벌어졌으며, 늦어도 481년 무렵에는 완전히 신라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이로써 영덕은 신라가 동해안 쪽으로 팽창하는 데 교두보 역할을 하였다.
신라의 삼국 통일 후에도 야시홀군과 우시군은 수륙 교통의 결절점으로 그 중요성이 지속되었다. 그런 가운데 685년(신문왕 5) 9주 5소경제가 실시되면서 두 고을은 명주(溟州)로 편제되었다. 757년(경덕왕 16)에는 지방행정 체제 개편 과정에서 각 고을의 지명을 한자식으로 개칭하였다. 이때 야시홀군은 야성군(野城郡), 우시군은 유린군(有鄰郡)이 되었다.
한편, 고대 영덕에서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불교문화가 꽃피면서 많은 사찰이 건립되었다. 대표적인 사찰로는 유금사(有金寺)가 있는데, 637년(선덕왕 6)에 자장(慈藏)이 창건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통일 신라 시대에 이르러서는 선종의 유행으로 사찰 건립도 증가하였다. 문헌에 전하는 묘장사(妙藏寺)[칠성사(七星寺)]·하운사(霞雲寺)·경수사(慶壽寺)·범흥사(梵興寺)·옥천사(玉泉寺) 등이 이 무렵 건립되었다.
[고려 시대]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는 왕조 초기 새로운 체제에 맞추어 지방 행정구역 개편을 단행하였다. 이 당시 개편은 중앙집권체제 강화와 더불어 후삼국 시대 호족(豪族)들의 판도가 반영되었다. 이에 따라 야성군은 영덕군(盈德郡), 유린군은 예주(禮州)로 개칭하였다. 또한, 1018년(현종 9)에는 예주에 방어사(防禦使)를 두고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는 한편, 우산도를 편입시켰다. 그리고 현종 연간 야성군을 예주에 예속하였다.
고려 후기 이후 정부는 감무(監務)를 설치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였다. 이에 영덕군에 감무가 설치되어 독립하였으며, 이후 현령(縣令)이 파견되었다. 예주는 고려 후기 동안 읍격 변화가 잦았다. 1259년(고종 46) 예주는 덕원소도호부(德原小都護府)로 승격하였는데, 이는 최씨 무인 정권을 타도하고 위사공신(衛社功臣)에 오른 박송비(朴松庇)의 내향(內鄕)이 예주였기 때문이다. 이어 덕원소도호부는 예주목(禮州牧)이 되었지만, 1310년(충선왕 2) 정부에서 여러 목(牧)을 정리하는 가운데 영해부(寧海府)로 개편하였다. 이러한 대목은 인적 연고에 따라 읍격 조정이 이루어지는 중세 지방행정구역 개편의 특징을 보여준다. 고려 말에는 왜구의 준동이 심화되는 가운데 영덕 지역이 큰 피해를 입었다. 이와 관련해 권근(權近)은 「영해부서문루기(寧海府西門樓記)」에서 "성과 읍이 폐허가 되고 민가는 모두 불에 타서 재가 되었다. 여러 해 버려져 적굴이 되니 관리들은 다른 고을에서 정사를 보고 범과 산돼지가 옛 마을에 뛰놀았다"라는 기록을 남겼다.
고려 시대에 광역행정구역 개편도 지속되었다. 영덕·영해 두 고을은 현종 연간 동계(東界)에 해당되었으며, 1259년에는 명주도(溟州道)로 편제되었다. 1290년(충렬왕 16) 다시 동계가 되었다가, 1314년(충숙왕 1) 경상도로 편제되어 조선 후기까지 이어졌다. 고려 시대에는 고을 하부에 특수 행정구역인 향(鄕)·소(所)·부곡(部曲)이 있었다. 이에 영덕에는 오보부곡(烏保部曲)·이이아부곡(伊已牙部曲)·지품부곡(知品部曲), 예주에는 백석부곡(白石部曲)·창숙부곡(倉稤部曲)·묘곡부곡(畝谷部曲)이 두어졌다. 이들 구역은 조선 시대 이후 중앙집권화 과정에서 자연스레 면리(面里)로 개편되었다.
고려 시대에도 영덕에는 불교문화가 발전하였다. 유금사가 여전히 번창하였으며, 장육사(莊陸寺)를 비롯해 옥천사(玉川寺)·사자갑사(獅子岬寺)·용천사(龍泉寺) 등이 새롭게 건립되었다. 특히 영해부 출신의 나옹(懶翁)[혜근(慧勤)]은 고려 말 대표적인 선승(禪僧)으로서 공민왕의 왕사(王師)를 지냈다. 영덕의 장육사도 나옹이 건립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고려 후기가 되면 유학도 함께 발전하였다. 그 배경에는 정부의 유학 장려와 더불어 영덕 지역 토성(土姓) 세력의 성장이 뒷받침되었다. 영덕의 토성은 이(李)·김(金)·조(曺), 촌성은 윤(尹)·조(趙)·정(鄭)·주(朱), 내성은 박(朴)으로 나타나며, 영해에는 토성만 박(朴)·김(金)·황(黃)·이(李)·임(林)·신(申)이 있었다. 이들은 고려 시대 동안 향직(鄕職)을 통해 지방관을 보좌하며 영덕·영해 지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런 가운데 고려 후기 동안 영덕에서는 김·정·박, 영해에서는 박·이·김씨 가문이 관인을 배출하며, 이족(吏族)에서 벗어나기 시작하였다. 이들의 성장은 곧 당시 혼인 관행인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을 매개로 타 지역 출신 성관(姓貫)의 영덕·영해 이주를 촉진하였다. 그런 가운데 고려 후기에는 대흥백씨(大興白氏)가 영해로 이주하여 백문보(白文寶)를 배출하였다. 이곡(李穀)도 영해로 처가입향하였는데, 이곡의 아들이 고려 말 성리학 보급에 앞장섰던 이색(李穡)이다. 이렇게 영덕·영해 지역을 거점으로 성장한 세력들은 고려 말 신흥 사대부(士大夫)로 좌정하며 유학 발전을 이끌었으며, 조선 시대에는 명문 사족 가문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조선시대]
조선 왕조는 개국 초 문물 정비와 함께 중앙집권체제 강화를 위한 행정 구역 개편도 진행하였다. 고려 후기 현령이 파견되던 영덕현은 1415년(태종 15) 지현사(知縣事)를 두었으나, 얼마 후 환원되었다. 영해는 군사적으로 중요한 위치였으므로 1406년 진(鎭)을 두고, 병마사(兵馬使)가 부사(府使)를 겸임하게 했으며, 1413년 도호부사(都護府使)가 파견되는 영해도호부로 개편하였다. 이렇게 형성된 영덕군·영해도호부 체제는 1895년 행정구역 개편까지 이어졌다. 다만 영해도호부의 영현(領縣)이었던 영양현(英陽縣)은 지역민들의 요청에 따라 1683년(숙종 9) 분리되었다.
조선 시대 지역 사회를 주도했던 세력은 재지사족(在地士族)이다. 고려 후기 이후 이족(吏族)에서 벗어나 재지사족의 길을 걸은 토성 가문들은 타관 출신 재지사족의 영덕 세거를 견인하였다. 그런 가운데 조선 후기에 이르면 대흥백씨(大興白氏)·무안박씨(務安朴氏)·선산김씨(善山金氏)·수안김씨(遂安金氏)·안동권씨(安東權氏)·야성김씨(野城金氏)·야성정씨(野城鄭氏)·영양남씨(英陽南氏)·영천이씨(永川李氏)·영해박씨(寧海朴氏)·재령이씨(載寧李氏)·진성이씨(眞城李氏)·파평윤씨(坡平尹氏)·평산신씨(平山申氏)·함양박씨(咸陽朴氏) 등의 토성과 타관 출신의 가문이 영덕·영해 지역 재지사족 가문으로 자리매김하며 현재까지도 세거지를 형성해 오고 있다.
재지사족은 향촌에서 성리학을 체득함과 동시에 사회적 지위를 바탕으로 향촌사회를 영도해 나갔다. 특히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영덕 지역의 여러 재지사족들은 백성들을 규합하여 국가와 고장을 방어하기 위해 힘썼다. 전란 초기 영덕 지역은 일본군의 진격로에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백성을 안집(安集)할 수 있었고, 재지사족이 의병을 일으킬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5월 한양을 점령한 일본군의 일부가 동해안을 따라 경상도를 침입하였다. 이에 일본군은 평해 백암을 지나 영해의 서쪽 지역인 오늘의 창수면 삼계리와 수리 쪽으로 진격해 왔다. 그 결과 한동안 영해가 일본군에 점령되었다. 영덕·영해 지역에서 일본군과 싸운 지휘관으로는 영해도호부사 한효순(韓孝純)과 영덕현령 안진(安璡), 축산포만호 오사청(吳士淸)이었다. 그 외에도 백인국(白仁國)·신규년(申虬年)·배태원(裵泰元) 등 많은 지역 의병들이 참전하였다. 이들은 관군과 함께 창수면 위정골에 매복하여 일본군을 습격하였지만, 뒤이어 내려온 적군에 포위되어 신규년을 비롯한 다수의 의병들이 전사하였다.
전쟁이 지속되는 가운데 관군 및 의병으로 참전하여 일본군과 맞선 영덕·영해 지역 출신 인사들도 많았다. 관군으로 활동한 인사로는 영덕현 출신의 장희식(張希栻)·김난서(金鸞瑞) 등이 있으며, 영해도호부 출신으로는 박의장(朴毅長)·박홍장(朴弘長)·남의록(南義祿)·정담(鄭湛) 등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의병을 일으킨 인사로는 조현(趙玹)·이함(李涵)·백현룡(白見龍) 등이 있다.
전란 이후 향촌복구를 주도했던 세력도 재지사족이다. 이들은 전란을 통해 절의(節義) 정신을 몸소 실천하였다. 이때 높아진 사회적 위상과 성리학을 바탕으로 향촌질서를 정비해 나갔다. 그런 가운데 영덕·영해 지역에서는 퇴계학파(退溪學派)의 발전이 두드러졌다. 그 중심에 선 인물은 영해도호부 출신의 이현일(李玄逸)[1627~1704]이다. 이현일은 ‘퇴계 이황-김성일(金誠一)-장흥효(張興孝)’로 이어지는 퇴계학파 계보의 중심에 있던 인물이며, 그 문하에서 많은 문인을 배출되었다. 아울러 정치적으로는 남인의 산림(山林)으로서 당쟁에 깊숙이 개입되었다.
[개항기]
1876년(고종 13) 개항 이후 조선을 둘러싼 국내외 정세는 급변하였다. 내부적으로 중세 봉건체제의 모순이 증폭되었으며, 대외적으로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이 시작되었다. 그런 가운데 조선 정부는 1894년 갑오개혁을 통해 국가 체제를 근대식으로 변모시켜 나갔다. 이에 1895년에는 제2차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대대적인 지방행정구역 개편이 이루어졌다. 그 골자는 8도제를 23부제(二十三府制)로 개편하고, 부·대도호부·목·도호부·군·현으로 구분되어 있던 기존의 행정구역을 부(府)와 군(郡)으로 이원화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영덕현은 영덕군, 영해도호부는 영해군(寧海郡)으로 개칭되어 안동부(安東府)에 편제되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23부제 실시는 행정상의 혼란을 초래하였다. 이에 1896년 23부제를 13도제로 개편하였고, 이때 두 고을은 경상북도로 편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개항기 영덕 지역은 봉건체제의 모순에 따른 갈등과 제국주의 열강에 대한 저항이 동시에 일어났다. 1871년 이필제(李弼濟)는 동학(東學) 교도를 규합하여 영해에서 농민항쟁을 일으켰다. 이들은 관아를 점령하고 영해 도호부사 이정(李炡)를 처단하였으나, 이후 이필제가 체포됨으로써 영덕 지역 동학 세력은 거의 괴멸하였다. 1881년에는 정부가 미국과의 통상 조약을 추진하자 영남 지역 유림들은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를 올리며, 통상을 반대하는 척사(斥邪) 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영덕 지역에서는 2명의 유림이 참여하였다.
개항 이후 영덕 지역을 직접적으로 침탈한 외세는 일본이었다. 일본은 동해안 지역에 어업기지를 확보하고 경제적 이권을 침탈해 나갔다. 나아가 우리나라를 강제로 병합하려는 야욕을 조금씩 드러내었다. 이에 국권 수호를 위한 여러 운동이 전개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의병운동이다.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과 단발령(斷髮令)이 일어나자 전국의 보수 유림들이 의병을 일으켰다. 영덕에서는 1896년 영덕의진(盈德義陣)과 영해의진(寧海義陣)이 결성되어 일제에 저항하였는데, 영덕군 우곡리의 남천쑤[남천 숲]에서는 김하락(金河洛)의 이천의진(利川義陣)이 합세한 가운데 큰 전투가 벌어졌다. 1905년 을사늑약과 1907년 군대해산으로 의병운동은 더욱 격렬하게 일어났다. 그런 가운데 1906년 3월 평민 출신의 신돌석(申乭石)이 이끄는 영릉의진(寧陵義陣)이 동해안과 태백산맥을 거점으로 맹활약하였다.
근대 교육을 통해 독립국가의 인재를 양성하려는 신교육구국운동이 전국에서 진행되었다. 이에 영덕에서는 동명학원(東明學院)·융덕학원(隆德學院)·협창학교(協昌學校)·영신학교(盈新學校)와 같은 근대식 사립학교가 설립되어 인재 양성에 앞장섰다.
[일제 강점기]
1910년 조선을 식민지화한 일제는 식민지 정책에 적합한 지방 행정구역을 구축하기 위하여 1914년 4월 1일부로 부·군·면 통폐합을 단행하였다. 이에 영덕군과 영해군을 영덕군으로 통폐합하였고, 9개 면 116개 동리로 재편되었다. 이때 기존 영덕군의 읍내면과 동면은 영덕면, 종남면은 강구면, 외남면은 남정면, 서면은 달산면, 북면은 지품면, 기존 영해군의 읍내면과 묘곡면은 영해면, 남면은 축산면, 북초면과 북인면은 병곡면, 서면과 오서면은 창수면이 되었다. 그리고 석보면은 영양군으로 이속되었다.
식민지 통치체제 구축과 더불어 농업과 어업에 대한 침탈이 이어졌다. 일제는 영덕의 농업을 장악하여 1920년대에 이르면 동양척식주식회사가 병곡면의 송천들, 영덕면의 남산들, 그리고 달산면과 지품면 일대에 상당한 토지를 소유하였다. 또한, 일본인 지주들은 대토지를 소유하고 과수원을 조성해 나갔다. 어업은 개항기 때부터 일본인에 의한 침탈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에 일제 강점기 이후에는 어업조합을 결성하여 영덕 지역의 어업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반면, 조선인 어업인들은 어장을 빼앗기고 항구 노동자로 전락하였다.
일제의 식민지 통제와 경제적 침탈이 지속되는 가운데 많은 인사들이 민족의 독립을 위해 노력하였다. 영덕 출신의 인사들도 국내외에서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펼쳤다. 1910년대는 일제의 무단통치를 피해 해외 망명을 통해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인사들이 많았다. 영덕에서는 1911년 박경종(朴慶鍾)과 황만영(黃萬英), 1912년 박건(朴健)·박의열(朴義烈)·박의훈(朴義熏) 형제를 비롯하여 이겸호(李謙浩) 등이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영덕에서는 그 어느 지역보다 치열하게 만세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영덕의 3.1운동은 개신교 계열이 주도하였고, 전통적인 유림 가문과 지역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가운데 진행되었다. 이에 3월 18일 영해면 3.1운동을 시작으로 같은 날 병곡면·축산면·영덕면에서, 3월 19일에는 창수면·지품면에서, 4월 4일에는 남정면에서 만세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1920년대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한 군자금 모집 활동을 펼쳐졌다. 이에 1921년 4월에는 흠치교(吽哆敎) 교도가 영덕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벌였으며, 1924년 6월에는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요원이 영덕에 들어와 창수면 일대에서 군자금 모집활동을 벌이다가 체포된 창수사건이 일어났다. 또한, 1920년대에는 1921년 결성된 영덕청년회를 비롯하여 각종 청년단체들이 지역에서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청년운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1925년 영덕청년연맹, 1928년 영덕청년동맹이 조직되어 일제의 교육 정책과 사회 문제를 비판하였다. 1927년에는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新幹會)가 창립되었는데, 영덕에서는 영덕지회와 영해지회가 각각 결성되었다.
1930년대 이후에는 비밀 결사 운동 단체의 활동이 주목된다. 이에 1931년에는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영덕영양그룹이 활동하였다. 또한, 영덕 출신의 학생들이 대구상업학교·대구사범학교·안동농림학교에서 공부하며 민족 독립을 위한 비밀 결사 조직에 가담하였다.
[현대]
1948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였으나, 국내에서는 좌우 세력 간의 대립이 치열해졌다. 그런 가운데 1948년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앞두고 영덕에서는 험준한 산악 지형을 배경으로 좌익 무장 유격대[빨치산]가 활동하였다. 1950년 6월 25일 민족상잔의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7월 16일 영덕은 북한군에게 점령되었다. 9월에는 유엔군의 인천 상륙 작전을 앞두고 북한군의 병력 분산과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해 영덕에서 ‘장사 상륙 작전’을 실시하였다. 이후 영덕 지역은 수복되었지만, 전란으로 많은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특히 국군이 후퇴하는 가운데 국민보도연맹원(國民保導聯盟員)에 대한 대규모 학살이 자행되었다.
6.25전쟁이 끝난 후 상흔을 딛고 전후 복구사업이 진행되었으며, 산업의 변화에 따라 지역의 모습도 변모하였다. 그런 가운데 1979년 5월 영덕면이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83년에는 경상북도 영일군 죽장면 하옥리 일부가 달산면에 편입되었다. 1989년 경상북도 영덕군 지품면 오천리 일부를 분리해 신애리를 신설하였다. 1990년 경상북도 영덕군 강구면 하직리를 원직리로, 병곡면 휘리를 덕천리로 개칭했으며, 축산면 화천리가 영덕읍 화천리로 행정 구역이 개편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경상북도 영덕군은 현재의 1읍 8면 118개 법정리, 204개 행정리, 325개 자연부락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현재 경상북도 영덕 지역은 이촌향도(離村向道) 현상으로 인구가 유출되는 가운데, 해양 관광과 신재생에너지 선도 도시로 발돋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