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5006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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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九明 |
영어공식명칭 | Nam Gumyeong |
이칭/별칭 | 기서(箕瑞),우암(寓庵)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영덕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광우 |
출생 시기/일시 | 1661년 - 남구명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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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87년 - 남구명 진사시 입격 |
활동 시기/일시 | 1693년 - 남구명 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707년 - 남구명 보안도찰방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711년 - 남구명 과천현감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712년 - 남구명 제주판관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716년 - 남구명 순천부사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716년 - 남구명 파직 |
몰년 시기/일시 | 1719년 - 남구명 사망 |
출생지 | 원고리 -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원구리 |
거주|이주지 | 우암 -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
부임|활동지 | 제주목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부임|활동지 | 순천부 - 전라남도 순천시 |
사당|배향지 | 죽림사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영양 |
대표 관직 | 순천부사 |
[정의]
조선 후기 영덕 출신의 문신.
[개설]
남구명(南九明)[1661~1719]은 1693년(숙종 19)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제주판관(濟州判官)·순천부사(順天府使) 등을 지냈다.
[가계]
남구명의 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기서(箕瑞), 호는 우암(寓庵)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진사 남경훈(南慶薰), 할아버지는 진사 남길(南佶), 아버지는 종사랑(從事郎) 남상주(南尙周), 어머니는 진사(進士) 조정형(趙廷珩)의 딸 한양조씨(漢陽趙氏), 부인은 이진(李璡)의 딸 경주이씨(慶州李氏)이다.
[활동 사항]
남구명은 1661년(현종 2) 경상도 영해도호부(寧海都護府) 원고리(元皐里)[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원구리]에서 태어났다. 1687년(숙종 13) 진사시에 입격했는데, 이듬해 부친상을 당하였다. 상례를 마친 후에는 처가가 있는 경주(慶州)로 이거하였다. 1693년(숙종 19) 문과에 급제하였고 얼마 후 권지성균관학유(權知成均館學諭)에 제수되었으나, 관직에 뜻이 없어 향리로 돌아와 10여년간 은거하였다.
1707년 다시 관직에 나아가 보안도찰방(保安道察訪)에 임명되었고, 이후 창락도찰방(昌樂道察訪)으로 부임하였다. 1711년 과천현감(果川縣監)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향리로 돌아왔다. 이 무렵 영호(影湖)[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소재]에 우암(寓庵)을 지었다. 1712년 제주판관(濟州判官)으로 부임하였다. 재임 중 흉년이 들자 관의 곡식을 내어 백성들을 구휼하였다. 1716년 순천부사(順天府使)로 부임하였으나, 어사(御史) 황귀하(黃龜河)의 별단(別單)으로 파직당하였다. 제주판관 시절 진정(賑政)을 하는 과정에서 곡식 60석을 도용하였다는 이유이다. 이후 경주 우암으로 돌아와 만년을 보냈다.
1720년 균전사(均田使) 김재로(金在魯)에 의해 곡식을 도용하였다는 누명을 벗었다. 이조에서 순천부사로 복직시키려고 했지만, 남구명은 이미 1719년 우암에서 사망한 후였다. 이형상(李衡祥)·이익한(李翊漢)·조덕린(趙德鄰)·권이진(權以鎭) 등의 인사들과 교유하였다.
[학문과 저술]
문집으로 5권 3책 『우암집』이 전한다. 특히 『우암집』에는 제주도와 관련된 글이 많다. 권3의 「남정일기(南征日記)」는 제주 부임까지의 노정을 기록한 것이고, 기(記)의 「서산점마기(西山點馬記)」는 제주 공마(貢馬) 점검을 소재로 하고 있다. 전(傳)의 「상식전(尙植傳)」은 제주 관노(官奴) 김상식(金尙植)의 전기이며, 권4 설(說)의 「신산설(神山說)」은 한라산을 소재로 한 것이다. 잡저(雜著)의 「흉년기사(凶年記事)」에서는 1713년 제주 기근의 참상과 구휼책을 기록하였다. 「야마대(野馬對)」는 공마와 야마 간의 대화를 소재로 하는 우화이다.
[묘소]
경주부 동쪽 별산(鼈山)에 묘소가 마련되었다. 조덕린(趙德鄰)이 묘지명(墓誌銘), 정범조(丁範祖)는 묘갈명(墓碣銘)을 지었다.
[상훈과 추모]
제주 죽림사(竹林祠)에 제향되었으며, 순천에는 치적을 기리는 동비(銅碑)가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