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5008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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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壽岳 |
영어공식명칭 | Lee Suak |
분야 | 역사/근현대,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영덕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권영배 |
출생 시기/일시 | 1845년 - 이수악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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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896년 1월 22일 - 이수악 집강소 조직 |
활동 시기/일시 | 1896년 2월 11일 - 이수악 영해의진 결성 |
몰년 시기/일시 | 1927년 9월 29일 - 이수악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3년 - 이수악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출생지 | 존재종택 -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오촌리 234 |
성격 | 의병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영해의진 창의장 |
[정의]
개항기 경상북도 영덕 출신의 의병.
[가계]
이수악의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치숭(致崇), 호는 우헌(于軒)이다. 존재(存齋) 이휘일(李徽逸)의 주손으로 1845년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오촌리 존재종택(存齋宗宅)에서 태어났다. 아들 이호발(李箎發)은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의 보인계첩(輔人契帖)에 올라 있다.
[활동 사항]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이 일어나고 단발령(斷髮令)이 시행되자 전국 각지에서 유림들이 의병을 일으켰다. 이에 영해(寧海) 지역에서는 이수악 등의 유림들이 1896년 1월 22일 집강소(執綱所)를 조직하였고, 2월 11일 집강소를 바탕으로 영해의진을 결성하였다. 이수악은 집강소의 도집강(都執綱)을 맡았고, 영해의진에서는 창의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이수악의 영해의진은 지휘부와 병사조직이 완료된 1896년 3월 말경부터 전투를 시작하였다. 1896년 8월 사천평(沙川坪)에서 진을 치고 있을 때 관군의 급습을 받아 패퇴하였다. 그 후 이수악의 영해의진은 고종의 의병 해산령에 의해 해산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