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0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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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改新敎 |
영어공식명칭 | Protestantism |
이칭/별칭 | 프로테스탄트,신교 |
분야 | 종교/기독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엄진성 |
[정의]
경상북도 영주시에서 활동하고 있는 기독교의 한 분파.
[개설]
개신교는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를 일컫는 말로, 구교(舊敎) 가톨릭과 달리해 신교(新敎)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에 있어서 개신교는 1884년(고종 21) 알렌(Horace Newton Allen) 선교사가 입국함으로써 정식으로 선교사업이 시작되었다. 1887년 최초로 장로교의 새문안교회가 창립되었으며, 이어 1887년 10월에는 감리교의 정동교회가 세워졌다. 그 후 개신교 교회는 부산·대구·평양·의주 등지로 확대되어 전국에 교회가 세워졌다. 이들은 선교뿐만 아니라, 교육·의료·사회사업 등을 활발히 전개하였으며, 특히 한국이 일본의 침략을 받자, 자주정신을 고취하는 한편, 독립운동에 직접·간접으로 협조하였으며, 3.1운동 때 일본군에 의해 저질러진 제암리학살사건 등의 만행을 외국에 알려 여론화하는 등 우리 실정을 세계에 알리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영주 개신교의 출발]
영주 지역 개신교의 초기 역사는 자료의 소략으로 명확하게 밝히기 어려우나, 크게 3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선교사가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신자가 된 사람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외지에 나가 생활하는 중 신자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들에 의해 교회가 설립되었다. 둘째, 영주 초기 신자들은 안동의 방잠교회(芳岑敎會)를 출석하였는데, 영주의 경우 안동의 신자로부터 전도 받아 신자가 된 사람이 다수 있었을 것으로 이해된다. 셋째, 1902년 아담스 선교사는 경북 북부 지역을 방문하였다. 그 기간 약 1,000권을 책을 팔았다고 한다. 영주, 봉화는 안동과 같은 선교지역으로 아담스 선교사가 방문하였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그를 통해 신자가 된 사람은 확인되지 않는다. 하지만 선교사들이 팔거나 나눠준 단편 성서와 전도문을 읽고 신자가 된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경안노회 이전 시기(1907~1920)]
1907년 9월 17일 조선 예수교 장로회 노회가 조직되었을 때 영주 지역은 경상대리회에 소속되어 있었다. 1912년 9월 1일 총회가 조직되기 전, 1911년 12월 6일 부산진교회당에서 경상노회로 발전 개편되었다. 그 후 1916년 12월 27일 제11회 경상노회가 대구제일교회에서 모였을 때 경북·경남노회로 분립하였다. 영주 지역은 1921년 12월 20일 경안노회가 창립되기까지 줄곧 경북노회에 소속되었다.
[경안노회 시기(1921~1984)]
영주 지역 초기 신자인 강두수, 임재봉 등은 안동의 방잠교회를 오가며 예배를 드리다 1907년 지곡교회를 설립하였다. 강후진, 강성도, 강대홍, 강노구, 강율원 등 10명의 옹천 교인들이 지곡교회로부터 독립하여 옹천교회를 설립하였다. 한편 강신원, 강재원, 강병창도 방잠교회를 다니다가 내매교회를 설립하였으며, 1909년 영주교회[현 영주제일교회]가 설립되었다.
영주 지역에 설립된 교회 가운데 일제강점기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폐지 또는 합병된 교회들이 있는데 박산·성내·평은·문촌·성곡교회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 가운데 박산·성내·평은·문촌교회는 1946년, 나머지는 1949년 복구되었다. 광복 이후 미국 교회의 선교사를 통해 확보한 구제품을 각 교회 교역자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이는 교회 성장에 큰 도움이 되었다. 영주 지역 교회 역시 여타 교회와 마찬가지로 6.25전쟁을 피해 갈 수 없었는데, 이중 영주중앙교회는 소실되는 큰 아픔을 겪었다.
[영주노회 시기(1984~현재)]
경안노회가 크게 성장하자 1982년 9월 제112회 경안노회에서 영주노회 분립을 논의하게 된다. 1984년 3월 6일 제115회 노회가 모여 영주노회 분립 예배를 드림으로써 영주노회가 설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