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0363
한자 豊基小作組合
영어공식명칭 Punggi Tenant Association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23년 3월연표보기 - 풍기소작조합 설립
개칭 시기/일시 1925년연표보기 - 풍기소작조합에서 풍기농우동맹으로 확대 개편
개칭 시기/일시 1929년연표보기 - 풍기농우동맹에서 영주농민조합으로 확대 개편
최초 설립지 풍기소작조합 -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지도보기
성격 농민단체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영주 지역에 있었던 농민 단체.

[개설]

풍기소작조합(豊基小作組合)은 1923년 3월 풍기·봉현·안정 등 3면을 중심으로 창립되었다. 창립 당시 집행위원장 강응진(姜應鎭)을 비롯해 각 동 대표 40명의 집행위원이 선출되었다.

[설립 목적]

풍기소작조합은 소작농의 경제적 이익 옹호와 농민계몽 등을 설립 목적으로 삼고 있다.

[변천]

풍기소작조합은 1925년에 “세계 조류에 합류하기 위한다”라는 명목으로 풍기농우동맹으로 조직을 변경하였다. 1929년에 풍기농우동맹은 다시 영주농민조합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풍기소작조합은 창립대회에서 지주제에서 소작인의 경제적 이익을 쟁취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결의 사항을 택하였다.

- 소작료는 반 분할로 할 것.

- 두량(斗量)은 평균케 두개(斗槪)를 사용하고 곡품(穀品)은 정실(精實)케 할 것.

- 지세, 기타 공과금은 모두 지주가 부담할 것.

- 보(洑), 제방 등의 토목 석재 기타 제반 비용은 지주가 부담하고 노력은 5개인 분까지는 소작인이 부담하되 5개인 이상은 지주가 부담할 것.

- 이모작과 고초(藁草)[볏짚]는 모두 소작인이 수득(收得)할 것.

- 말이, 말체와 무상 노동을 폐지할 것.

- 소작료 운반 거리는 2리 이내만 소작인이 부담할 것.

- 소작권은 소작인이 과실이 없을 때는 지주가 변경치 못할 것.

- 지주에게 이상 조항을 준행하도록 권유할 것.

- 일반 조합원은 이상 조항을 실행할 것.

결의 사항을 보면 지주에 대한 소작인의 권리와 요구 사항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다. 특히, 풍기소작조합 창립대회에서부터 소작료를 기본적으로 50%로 적시한 것은 주목할 점이다.

풍기소작조합은 1923년 4월 17일 전국적 농민운동 조직인 조선노농총동맹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는데, 그즈음 풍기소작조합강택진(姜宅鎭)이 전국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사건을 일으켰다. 「지주권을 포기하고 소작인 제군에게 고백하노라」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강택진의 전 재산인 토지 9,000여 평[29,752㎢]을 풍기소작조합에 기부하였다. 이를 보도한 신문에서는 “…수일 전 경상북도 지방에서는 아직까지 꿈 가운데 있는 지주들에게 정문일침(頂門一針)되는 사실이 있었다. …”라는 내용을 실었다.

강택진은 자신의 토지를 기부한 뒤 서울로 올라가 중학동의 어느 집 문간방에 세 들어 살면서 아이스크림 장사를 하며 생활하였다. 강택진은 인터뷰를 요청한 신문기자에게 ‘박애·평등·자유’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먼저 ‘소유욕’을 버리고 ‘참사람’의 ‘참살림’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전 재산을 기부했다고 언급하였다.

1923년 5월 1일 풍기소작조합은 500~600명의 농민이 참여한 가운데 풍기강습소에서 메이데이 기념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이 강연회에서 김동필(金東弼)은 「노동자와 소작인의 억울한 과거와 현재」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으며, 안기석(安基錫)·이윤식(李允植)·이의백 등의 강연이 이어졌다. 강연회 마지막에는 위원장 강응진의 선창으로 “만국 노동자 만세”를 삼창한 후 폐회했다.

1923년 9월 풍기소작조합은 조선노농총동맹준비회에 발기 단체로 참여하고, 김동필이 대표로 참석했다. 1923년 10월 조선노농총동맹에서 탈퇴하였다. 1923년 10월 풍기소작조합은 수확기에 맞추어 임시총회를 열고 “지세는 전부, 소작료 5할 이상은 절대 불응”과 “지주가 만일 무리하게 소작권을 이동할 때는 일반 소작인은 결속하여 소작권 옹호를 주장하고 어떠한 소작인이든지 경작치 말 것” 등을 결의하였다. 이에 장경환(張景煥)·강재규(姜在珪)·김기선(金箕璇)·이종하(李鍾河) 등의 지주들이 다음날 소작인의 결의를 존중하여 자신들이 지세를 부담하겠다고 선언하였다. 1924년 1월 조선노농대회주체단체 총회에 참가했으며, 1924년 2월 창립 1주년 기념식과 정기총회를 동시에 열고, 지세불납동맹을 결의하였다. 식을 마친 뒤에는 조합원들이 조합기와 농단기를 앞세워 농악을 울리면서 시위행진을 벌였다.

이상과 같이 풍기소작조합은 지주들에게 소작인들의 권리를 내세웠지만, 지주 대부분은 완강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에 1924년 12월 풍기소작조합은 임시총회를 개최하고, 지주와 마름에 대한 투쟁을 결의하였다. 그러자 지주들은 기존 소작인의 소작권을 무효화하고, 새로 소작인을 선정하는 방식으로 지주권을 지키려 하였고, 그 과정에서 신·구소작인이 물리적으로 대립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태를 계기로 풍기소작조합은 노농교육연구회를 만들어 소작 운동의 체계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일제 관헌은 풍기소작조합 회원을 검거하는 탄압적 조처를 했다.

[의의와 평가]

풍기소작조합은 소작농의 경제적 이익 옹호를 목적으로 창립된 이래 소작료 감면, 강택진의 토지 기부, 지세불납동맹 투쟁 등의 소작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이후 풍기소작조합은 풍기농우동맹으로 확대되었고, 나아가 영주농민조합으로 발전하였다. 이렇듯 풍기의 소작 운동에서 출발해 영주 전체 지역으로 확대해 나갔다. 이처럼 풍기소작조합은 일제강점기 영주 지역 소작 운동의 확대 발전에 크게 이바지를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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