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두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0585
한자 權斗南
영어공식명칭 Gwon Du-nam
이칭/별칭 경망(景望),역락당(亦樂堂)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광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73년연표보기 - 권두남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09년 - 권두남 생원시 급제
활동 시기/일시 1612년 - 권두남 식년시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619년 - 권두남 병조낭관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27년 - 권두남 형조정랑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36년 - 권두남 병자호란 창의
몰년 시기/일시 1646년연표보기 - 권두남 사망
출생지 권두남 출생지 -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지도보기
묘소|단소 권두남 묘소 - 경상북도 영주시 상망동 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안동(安東)
대표 관직 교서관박사|함경도도사|형조정랑

[정의]

조선 후기 영주 출신의 문신.

[개설]

권두남(權斗南)[1573~1646]은 광해군 연간에 과거 급제하여 병조의 낭관을 비롯해 교서관박사, 함경도도사, 형조정랑 등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의병을 일으켰다.

[가계]

권두남의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망(景望), 호는 역락당(亦樂堂)이다. 아버지는 부장을 지낸 권용중(權用中), 어머니는 여무백(余武伯)의 딸 증 숙부인 의령여씨(宜寧余氏), 할아버지는 호군을 지낸 권황(權諻), 증조할아버지는 참봉을 지낸 권준손(權俊孫)이다. 권두남의 부인은 이무육(李無育)의 딸 숙인 대흥이씨(大興李氏)와 황인(黃認)의 딸 숙인 창원황씨(昌原黃氏)이다.

[활동 사항]

권두남은 1573년(선조 6) 경상도 풍기군에서 출생하였다. 1609년(광해군 1) 생원시, 1612년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권두남이 처음 관직에 진출했을 때에는 대북 세력이 권력을 잡고 있었다. 특히 인척 관계였던 대북의 실세 이이첨(李爾瞻)[1560~1623]은 권두남을 자파 세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여러 번 회유하였지만, 권두남은 「송운가(松雲歌)」라는 글을 지어 거절의 뜻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거처의 뒷산을 안심산(安心山), 거처의 당호를 ‘역락(亦樂)’이라 이름하고 한동안 은둔하였다. 1617년 11월 교서관박사로 있을 때 인목대비(仁穆大妃) 유폐 문제로 조정에서 의논이 있었는데, 권두남은 “종묘사직에 관계되고 국시(國是)가 이미 정해졌으니, 어찌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는 의견을 내었다.

권두남은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물러난 후 상소문을 올려 경연과 성학을 장려할 것이며, 이전에는 광해군이 간신의 말을 들어 명나라의 요청에도 구원하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의군을 일으켜 명나라를 도와 오랑캐를 물리쳐야 한다고 간언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여러 고을에 격문을 돌려 의병 모집과 군량미 확보를 위해 노력하였다. 이때 서기 한상빈(韓尙賓)이 권두남의 공로를 관찰사에게 보고하려고 했으나, 권두남은 신하된 자로서 직분을 다한 것이라며 거절하였다. 1627년 9월에는 형조정랑에 제수되었다.

권두남은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몇몇 동지들과 의병을 일으켰다. 그러나 황강에서 길이 막혀 가지 못했다. 결국,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자 통분하며, 다시는 세상에 나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묘소]

권두남의 묘소는 영주시 상망동 외단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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