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0599
한자 金若鍊
영어공식명칭 Kim Yak-ryeon
이칭/별칭 유성(幼成),두암(斗庵),인수(忍叟)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수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730년연표보기 - 김약련 출생
활동 시기/일시 1774년 - 김약련 생원시 급제
활동 시기/일시 1774년 - 김약련 증광시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776년 - 김약련 평안도 삭주로 유배
활동 시기/일시 1777년 - 김약련 해배
활동 시기/일시 1792년 - 김약련 사도세자 신원 만인소 참여
활동 시기/일시 1800년 - 김약련 승정원우부승지 제수
몰년 시기/일시 1802년연표보기 - 김약련 사망
거주|이주지 김약련 거주지 - 경상북도 영주시
유배|이배지 김약련 유배지 - 평안북도 삭주군
묘소|단소 김약련 묘소 - 경상북도 안동시 녹전면 매정리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선성(宣城)
대표 관직 통정대부|병조참의|승정원좌부승지

[정의]

조선 후기 영주 출신의 문신.

[개설]

김약련(金若鍊)[1730~1802]은 1776년(정조 즉위년) 사도세자(思悼世子)[1735~1762]의 죽음에 의혹을 제기한 이응원(李應元)의 상소에 연루되어 삭주로 유배당했다.

[가계]

김약련의 본관은 예안(禮安)[선성(宣城)], 자는 유성(幼成), 호는 두암(斗庵)·인수(忍叟)이다. 아버지는 생원 김지(金墀), 어머니는 생원 박태래(朴泰來)의 딸 의인 반남박씨(潘南朴氏), 할아버지는 김원렬(金元烈), 증조할아버지는 생원 김동주(金東柱)이다. 부인은 김만채(金萬采)의 딸 숙부인 순천김씨(順天金氏)이다.

[활동 사항]

김약련은 젊은 시절부터 향촌에서 신망이 깊었다. 그래서 작은아버지 김위(金㙔)[1709~1789]가 향선생으로 있을 때 김약련에게 고을의 어려운 일을 수시로 물어보았다고 한다. 김약련은 『맹자』에 심취하여 20세 무렵부터 200~300번에 걸쳐 탐독하였다. 27세가 되던 1756년(영조 32) 태백산 각화사(覺華寺)에 머무르고 있던 이광정(李光庭)[1674~1756]을 찾아가 『맹자』의 요체와 수신의 방법에 대해 가르침을 받았다.

김약련은 1774년(영조 50) 45세의 나이로 생원시에 급제하였으며, 1774년 증광시 문과에도 급제한 뒤 승문원가주서에 제수되었다. 1776년(정조 즉위) 안동의 유생 이도현(李道顯)이 아들 이응원을 시켜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고 관련자 처벌을 요구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이 일로 이도현·이응원 부자는 대역죄가 적용되어 처형당하였는데, 이때 김약련은 흉소(凶疏)를 동정했다는 이유로 심한 국문을 받았다. 여러 신하가 김약련도 처형시킬 것을 건의하였으나, 정조의 지시로 감사(減死)하여 평안도 삭주에 유배되었다. 1777년 신하들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조의 특명으로 유배지에서 풀려났다. 이후 고향 영천(榮川)에서 16년 동안 소요하였다.

1792년(정조 16) 경상도 유림이 사도세자 신원을 요청하는 만인소를 올렸는데 김약련도 참여하였다. 1793년 정조는 특명을 내려 김약련 등에게 벼슬길을 열어주라고 지시하였다. 1793년 특별히 가주서에 임명되었고, 이후 성균관전적·병조좌랑·사헌부지평에 제수되었다. 특히 사헌부지평 자리는 정조가 삼망(三望)에 들지 않았음에도 특별히 첨서낙점(添書落點)한 것이다. 하지만 김약련은 관직에 뜻이 없어 사은 숙배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김약련은 1800년(정조 24) 정월에 열린 왕세자 책봉에 참석했다가 통정대부로 품계가 오르고 병조참의·우부승지·좌부승지에 제수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모두 사직하였다. 1800년 6월 정조가 승하하자 71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상경하여 졸곡을 지냈다.

[학문과 저술]

김약련의 문집으로 10권 5책의 『두암집(斗庵集)』이 전한다. 『두암집』 권1에 수록된 시문 중 23수는 김약련이 별도로 엮은 「감은록(感恩錄)」의 시를 수록하고 있다. 여기에 수록된 시문은 1776년 김약련이 삭주로 유배당한 후 자기 뜻을 굽히지 않겠다는 의지, 가족에 대한 그리움 등 유배지에서 다양한 감정을 노래하고 있다. 권2의 「기유의서(己酉擬疏)」와 「계축의서(癸丑擬疏)」는 각각 1789년과 1793년에 올리려다가 그만둔 상소문이다. 두 상소문 모두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의리를 다루고 있어, 당시 남인들의 정국 인식을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권5에 수록된 「열계전(烈雞傳)」, 「충구전(忠狗傳)」, 「의구전(義狗傳)」은 닭과 개를 등장시켜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를 교훈으로 제시한 단편소설이다.

[묘소]

김약련의 묘소는 안동시 녹전면 매정리 신암(新巖)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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