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711 |
---|---|
한자 | 權𪐴 |
영어공식명칭 | Gwon Ju |
이칭/별칭 | 자지(子止),춘수당(春睡堂)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효자·열녀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수환 |
출생 시기/일시 | 1576년 - 권주 출생 |
---|---|
활동 시기/일시 | 1605년 - 권주 진사시 급제 |
몰년 시기/일시 | 1651년 - 권주 사망 |
거주|이주지 | 권주 거주지 - 경상북도 영주시 |
거주|이주지 | 춘수당 - 경상북도 영주시 영주동 |
묘소|단소 | 권주 묘소 -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문단리 |
사당|배향지 | 병남리사 - 경상북도 영주시 |
성격 | 효자 |
성별 | 남 |
본관 | 안동(安東) |
[정의]
조선 후기 영주 출신의 효자.
[개설]
권주(權𪐴)[1576~1651]는 임진왜란 때 아버지를 왜군으로부터 구한 효자이다.
[가계]
권주의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지(子止), 호는 춘수당(春睡堂)이다. 아버지는 통례원좌통례를 지낸 권두문(權斗文)[1543~1617], 어머니는 박해(朴海)의 딸 숙부인 반남박씨(潘南朴氏), 할아버지는 장악원정을 지낸 권유년(權有年), 증조할아버지는 부장을 지낸 권담(權譚)이다. 부인은 계공랑 류탁(柳濯)의 딸 의인 진주류씨(晉州柳氏)이다.
[활동 사항]
권주는 17세가 되던 1592년(선조 25) 평창군수로 부임한 아버지 권두문을 따라 임소에 머무르고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1592년 8월 왜군이 평창으로 진격해 오자, 권두문은 험지인 응암굴에 진지를 구축하여 적들을 방어하려 했다. 권주는 왜군과 전력 차가 커서 아버지에게 일단 적의 예봉을 피했다가 뒷날을 도모하자고 건의했으나, 권두문은 이를 거부하고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다. 결국, 두 부자는 왜군에게 사로잡혔으며, 권주의 서모(庶母) 강씨(康氏)는 정절을 지키기 위해 절벽에 떨어져 자결하였다.
권두문·권주 부자는 원주로 이송되었고, 1592년 8월 11일부터 20일 동안 포로 생활을 하였다. 도중에 권두문이 죄책감으로 여러 차례 자결하려 했으나, 권주가 민첩하게 대응하여 아버지를 보호할 수 있었다. 하루는 적들이 권주에게 선조의 이름을 묻자 아들은 아버지의 이름을 말하지 않고, 신하는 임금의 이름을 말하지 않는다고 대답하였다. 또 적들이 나라를 버리고 도망간 선조를 지적하자 거빈(去邠), 즉 임금이 도성을 떠나 난리를 피하는 것은 옛 도리라고 하였다. 이어 김성일(金誠一)[1538~1593]·이덕형(李德馨)[1556~1618]과 같은 어진 재상이 얼마나 있냐고 묻자 셀 수 없이 많다고 하였으며, 명나라 원군에 대한 물음에는 그들의 위용을 높게 평가하였다. 그러다 어느 날 밤 우레와 함께 큰비가 쏟아지자 토굴을 부수고 아버지와 함께 탈출하였다. 이에 주위 사람들은 권주의 지극한 효성에 하늘이 감응하여 뇌우를 내렸다고 칭송하였다.
권주는 1605년(선조 38) 진사시에 급제하였으나, 광해군 즉위 후 정국이 어지러워지자 과거를 단념하게 된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1637년 청나라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더더욱 세상을 멀리한 채 고향 영천(榮川)에 춘수당(春睡堂)과 모명재(慕明齋)를 짓고 은둔하였다. ‘춘수당’이라는 당호는 제갈량(諸葛亮)이 와룡초당(臥龍草堂)에 숨어 낮잠을 즐긴다는 의미이며, ‘모명재’라는 재호는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의미이다. 평소 집안 자제를 훈계하는 데 사마광(司馬光)의 「거가잡의(居家雜儀)」를 모범으로 삼았다.
권주의 유고로는 2권 1책의 『춘수당일고(春睡堂逸稿)』가 전하는데, 권1에 수록된 「평창일기(平昌日記)」는 아버지 임소인 평창에서의 일을 기록한 것이다.
[묘소]
권주의 묘소는 봉화군 봉화읍 문단리 방현(方峴)에 있다.
[상훈과 추모]
권주는 신환(申瓛)[1575~1659]과 함께 병남리사(屛南里社)에 제향되었다. 권주가 지었던 춘수당은 1959년 후손들에 의해 현 영주시 영주동 구성산 중턱으로 이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