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8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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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容萬 |
영어공식명칭 | Park Yong-man |
이칭/별칭 | 영암(嶺巖)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임경희 |
출생 시기/일시 | 1924년 - 박용만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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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42년 - 박용만 김천고등보틍학교 졸업 |
수학 시기/일시 | 1944년 - 박용만 일본 주오대학 입학 |
활동 시기/일시 | 1946년 7월 - 박용만 전국학생총연맹 조직 |
활동 시기/일시 | 1948년 - 박용만 대통령 비서관 역임 |
수학 시기/일시 | 1949년 - 박용만 서울대학교 철학과 졸업 |
활동 시기/일시 | 1973년 - 박용만 제9대 국회의원 선거 당선 |
활동 시기/일시 | 1984년 - 박용만 민주화추진협의회 상임위원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988년 - 박용만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당선[4선]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박용만 국민훈장 무궁화장 추서 |
활동 시기/일시 | 1994년 - 박용만 자유민주민족회의 상임공동의장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995년 - 박용만 대한민국 건국회 회장 역임 |
몰년 시기/일시 | 1996년 - 박용만 사망 |
출생지 | 박용만 출생지 -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
학교|수학지 | 김천고등보틍학교 - 경상북도 김천시 |
학교|수학지 | 주오대학 전문부 법과 - 도쿄도 하치오지시 |
학교|수학지 | 서울대학교 철학과 - 서울특별시 관악구 |
성격 | 정치가 |
성별 | 남 |
본관 | 밀양(密陽) |
대표 경력 | 국회의원 |
[정의]
경상북도 영주시 출신의 정치가.
[개설]
박용만(朴容萬)[1924~1996]은 4선 국회의원으로 군사정권 시절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가계]
박용만의 본관은 밀양(密陽), 호는 영암(嶺巖)이다. 1924년 지금의 영주시 풍기읍에서 약국을 경영하던 박은식(朴殷植)의 4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활동 사항]
박용만은 1942년 김천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1944년 일본 주오대학[中央大學] 전문부 법과를 졸업하였다. 1945년 와세다대학[早稲田大學] 문학부 영문학과 재학 중 해방을 맞이해 중퇴하고 귀국하였으며, 1946년 서울대학교 철학과에 편입해서 1949년에 졸업하였다. 해방 직후 서울에서 유학생동맹 위원장을 지낸 이래, 박용만은 우익 청년운동에 투신하였다. 1946년 7월에는 이철승(李哲承) 등과 함께 전국학생총연맹을 조직, 공동의장이 되어 반공·반탁 투쟁에 앞장섰다. 1948년 정부 수립 직후 이승만 대통령의 비서관으로 일하기도 했다. 1950년 원외 자유당이 창당될 때 감찰부 차장으로 참여하였으나 민족청년단계 세력에 밀려 제명되었다. 1953년에 다시 조직부장으로 복귀해 이기붕(李起鵬)[1896~1960] 등과 함께 당내에서 민족청년단계를 축출하는 주역이 되었다.
박용만은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영주 지역에서 출마한 이래, 제3·4·5·6·7·8대 선거에 연속하여 출마, 또는 출마 시도를 하였으나 당선되지 못하였다. 1973년 제9대 선거에서 비로소 당선해 국회의원이 되었다. 이후 1978년 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신민당의 공천을 받아 재선에 성공하였으며, 1979년 신민당의 YH사건 진상조사위원회 위원장을 맡는 등 민주화 투쟁에 앞장서기도 했다. 1980년 신군부의 ‘정치풍토 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에 의해 1983년 2월까지 정치 활동을 금지당하였다. 1984년 민주화추진협의회가 조직될 때 발기인 및 상임위원과 지도위원으로 참여하였고, 신한민주당 창당준비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하였다.
박용만은 1985년 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서울 성동으로 지역구를 옮겨서 신한민주당 후보로 당선되었다. 1987년에 신한민주당 내 직선제 민주화 추진세력이 집단으로 탈당하여 통일민주당을 결성할 때 합류하였다. 1987년 6월 항쟁과 6·29선언을 거친 뒤 민정·민주당 간에 8인 개헌 협상이 열렸을 때 민주당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박용만은 1988년 치러진 13대 총선에 서울 성동을에서 통일민주당 후보로 나서서 당선되었으나, 1992년 14대 총선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출마해서 낙선한 후 국회로 복귀하지 못하였다. 1994년 자유민주민족회의를 조직하여 상임공동의장이 되었고, 1995년 대한민국 건국회를 조직하여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저술 및 작품]
박용만의 저서로는 1986년에 간행된 『(제1공화국) 경무대 비화』가 있다.
[상훈과 추모]
박용만은 1990년 대한민국 건국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아 국민훈장 무궁화장에 추서되었다.